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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기억, 역사 - 1990 연변 물리학 대회 본문

일상, 단상/지나간 세상

사진, 기억, 역사 - 1990 연변 물리학 대회

샛솔 2013. 6. 30. 14:13

사진, 기억, 역사 -  1990 연변 물리학 대회

 

기억과 역사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모두 저장된 기록의 편린을 모아 이야기를 창작한다는 점이다.

 

창작을 한다는 말은 지어 낸다는 말이다.   사진을 찍어둔다든가 비디오를 찍어 두는 것과는 다르다.   조각조각을 모아 이야기를 지어 낸다는 말이다.

 

그래도 최근에는 사진이라는 것이 있어 기억의 편린을 좀더 사실적으로 기술하거나 이야기하게 해 준다.

 

언젠가는 해야겠다는 일을 오늘 조금 해 봤다.   1990년 7월 15일 부터 4일간 연변에서 현대 물리학 국제회의라는 것을 개최했다.    Brown 대학 교수였던 내 동기 동창인 고 강경식교수가 일을  주로 추진했다. 

 

1979년 닉슨이 이니시에트해서 미중 수교가 이루어졌고 미국은 중국을 인정하고 교류하기 시작했다.    등소평의 개혁정책으로 중국이 세상에 문호를 열자 중국은 비록 한국과는 수교전이었지만 간접적인 교류가 이미 시작된 때였다.

 

1990년은  1992년 한중수교가 성사되기 2년전이라  우린 중국에 들어 갈 수 있는 비자를 서울에서는 받을 수 없었다.   그 학회에 참석한 서울측 참가자 22명은 모두 홍콩을 거쳐 홍콩에서 중국입국 허가를 단체로 받아서 베이징 행 항공기를 탈 수 있었다.  북한측에서는 5명이 참가하였다.

 

미국측 참가자 16명 연변측 참가자 33명 모두 76명의 물리학자가 참가한 대회였다.    북한측 물리학자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이 학회를 연 큰 기대중의 하나였다.   분단 40년 가까이 되었는데 우린 아무 교류도 없었다.  북한 학자들은 거의 세계와는 교류가 없었고 그러니까 연변에 나올 수 있다는 것은 아주 큰 이벤트였던 셈이다.

 

동유럽 소비엣 위성국가들이 하나 둘 붕궤되고 있을 때였지만 소비엣 연방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을 때였다.    그래서 북한학자와 함께 하는 학회를 한다는 것엔 우리에겐 큰 기대를 가져다 주었다.

 

학회가 끝나고 돌아 오는 길에 두만강,  백두산, 베이징등을 관광했다.    연변에는 이미 한국의 영향이 많이 들어 가 있었다.  노래방에는 주현미의 노래가 나왔고 여기저기 한국 상품도 상륙해 있었던 거로 기억된다.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건 내 창작인가?

 

언젠가 남북이 통일이 되어 한국 물리학사를 쓴다면 이것도 하나의 역사적 사료가 될지 모른다.   여기에다라도 남겨 두면 그 것이 자료로 쓰이기에 손 쉬울 것 갈아서 늘 해 두려고 했던 작업이었다.  이 사진들이 내 앨범에 종이로 남아 있으면 결코 그 누구도 볼 수 없을 것이다.

 

 

 

  

 

 

 

이 학회가 끝난 다음 proceeding 이 나왔고 내 논문도 들어 있 이 프로시딩은 내가 은퇴하면서 연구실 도서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사라졌다.  물리천문학부 도서실에는 있을 것이다.

이 문서는 <한미과학기술교류 100년과
재미과기협의 역할>이라는 문서중에서 연변학회에 관한 부분만 클립한 것.

여기엔 이어서 2년마다 연변대학에서 이 학회를 열기로 합의했지만

그 이후 학회는 열리지 못했다.

1990년 학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것이다.

 

 

 

 

연변학회측에서 나온 마중인원

표말 든 이 왼편 반소매차림이 필자

 

 

 

 

 

어디엔가 단체 사진이 있을 지 모르지만

여긴 11명이 찍혔다.

왼쪽 부터

(이름 기억미상,  권오석박사,  북한학자1(?),  북한 학자 조병래씨,  북한 학자(이름 기억미상),  북한측 단장 여철기씨,

 김두철, 송희성,김정욱(Co-organizer),이구철(나), 강경식교수(Organizer))

 

 

 

 

왼쪽이 안창림박사(현 이대교수), 당시에 가장 젊은 병아리 Ph.D.  미국측인지 한국측으로 참가했는지 기억이 안남.

가운데가 나

제일 오른쪽이 조병래 북한 학자

이분과 내가 학회 내내 친하게 지냈는데 전공 분야가 같았고 내가 친절했기 때문인지 나를 좋아해서

나와 학회 내내 식사 테이블에서는 내 옆에 앉아서 이야기도 많이 했다.

이분 또한 고향이 남한의 진주라고 했던 것다.

625 때인지 625 전인지 월북했다고 한다. 

 

 

 

 

조병래 박사의 발표 같다.

 

 

 

 

만찬테이블에서

왼쪽부터 조병래 북한 학자, 나, 그리고 오른쪽이 연변측 참가자중 시니어 멤버(단장이 아니었나 싶다) 였던 것 같다.

 

 

 

 

내 발표 장면을 찍어 준 것 같다.

 

 

 

 

왼쪽이 한양대의 이철희(?) 교수(상대론),  조병래 북한 학자,  나

뒷줄엔 서울대 김제완교수 

 

 

 

두만강 가는 길가에서

북한 학자와는 관광을 함께 하지 못했다.

미국측에서 북한 학자의 체재비를 모두 지원해 주었는데

관광비까지는 대 주지 못했다.

대 주었다 해도 함께 갈 수 있었을런지는 알 수 없다.

 

 

 

 

용정시의 <용정> 이름의 유래를 적은 우물옆 비석아래에서

용정하면 내가 좋아 하는 시인 <윤동주>님이 떠 오른다.  

 

 

 

 

두만강 중국측 국경공원에서

 

 

 

 

두만강 국경 공원에서

 브라운대 강경식 교수와 함께

대학 동기 동창으로 이 학회를 조직하고

진행하는데 애를 많이 썼다.

아쉽게도 고인이 되었다.

 

 

 

 

두만강변에서 싸가지고 온 점심을 먹었다.

당시엔 관광지에도 식당이 많지 않아 이런 곳에 올 때엔 점심을 싸가지고 와서

나눠주었다.

 

 

 

 

두만강

강폭도 좁고 갈수기엔 그냥 건너 다닐 수 있을 것 같다.

 

 

 

 

백두산 초입

 

 

 

 

백두산 중턱

 

 

 

 

백두산 오르는 길

 

 

 

 

등산로의 일부는 돌밭이었다.

 

 

 

 

마침내 천지에 닿았다.

날이 흐려서 천지의 전경은 볼 수 없었다.

연변 조선족 부인들 한 그룹이 이미 올라와 있어

함께 사진을 찍었던 같다.

 

 

 

 

가운데는 연변교포같은데 누군지 모른다.

서울에서 참가한 한양대(?) 교수

 

 

 

 

 노란 우비를 입은 한양대(?) 교수가 천지에 올라 감격해서 애국가를 부르자고 제안했던 것 같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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