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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을 보내며

 

83 번째 섯달그믐 날이다.  올해는 대그믐을 제주도 중문에서 보내고 있다.

 

어제   밤 늦게 중문 천제연로에 있늘 해리안 호텔에 도착했다.  묘하게 제주도에 오갈 때에는 날씨가 나쁘다.  작년 겨울 제주 여행을 마치고 돌아 갈 때에도 중산간도로를 넘어 갈 때 안개가 끼고 이슬비가 내려 몇10 미터도 앞이 안보이는 열악한 환경에서 운전을 해야 했다.

 

지난 늦가을 여행때에도 올 때와 갈 때 모두 비가 내렸다. 그런데 어제도 비 오는 밤에 평화로를 달려 제주공항에서 중문의 해리안 호텔에 왔다.  참으로 묘한 인연이다. 

 

다행한 것은 이 번 여행에서는 차를 모는 대신 항공편을 이용했기 때문에 제주공항에서 택시를 탔다.  그래서 내가 직접 운전을 하지 않아서 좋았다..

 

해가 넘어 간다는 것은 사람이 정한 달력 때문이지 지구가 공전과 자전을 해서 어떤 특정한 지점에 와 있기 때문은 아니다. 

 

내가 1960년 8월 22일 일부변경선을 넘었다고 내가 탔던  Northwest Airline 항공기의 기장이 서명한 증명서를 만들어 주는 등 법석을 떨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얼마나 하찮은 일이었던가 (2007/01/08 - [일상, 단상/잡문] - 1960년과 2007년).

 

일부변경선을 사람들이 날짜와 시간을 통일해서 쓰기 위해 만든 가공의 선이다. 

 

그러니까 섣달 그믐이란 것도 달력을 통일해서 쓰기 위해 정한 가공의 한 시점에 불과하다.  태양이나 지구의 특별한 위치가 아니다.

 

해가 넘어 갈 때엔 항상 다사다난했던 한해라고 호들갑을 떨지만 그렇지 않았던 해가 정말 있었던가? 

 

해가 지날 수록 기억이 약화되니까 가장 최근의 지난 해가 바로 강열하게 기억에 남아 가장 다사다난했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

 

북핵문제가 가장 큰 이슈였고 트럼프와 김정은의 기싸움이 우릴 불안하게 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날 것인가?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김정은은 결코 전쟁을 먼저 일으킬 것 같진 않다.    미국이란 나라는 믿을 수 없는 나라이고 막나가는 트럼프라 해도 한국을 패싱하고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 같다.    ( 나를 울렸던 국사책 , 필요하다면 쳐라 그리고 부숴라 - If Necessary, Strike and Destroy )

 

여기까지 쓰고 글을 끝내지 못한 채 해가 넘어갔다.  2018년 정월 초하룻날에 이어쓰고 있다.


어제(그믐날)는 202 번을 타고 이마트 서귀포점에 갔었고 오늘은 걸어서 바다다에 갔었다.  자난 내 생일에 사 먹은 새우버거가 맛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먹을 생각으로 간 것이다  (2017/11/27 - [국내여행기/제주도] - 82번째 생일 -2017-11-20 제주도 Vadada 카페 )

 

사람이 미어지게 많았는데 모히토 한잔식(알콜한잔 무알콜 한잔)을 시켜 마셨다.  알콜이 든 것이나 안 든 것이나 한잔에 만7천원 받는다.  그것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진동호출기로 부르면 가서 받아와야 한다.   앞 손님이 사용하고 남긴 네프킨 조차 치우지 않아서 우리가 테이블을 정리해야 했다.

 

아무리 인테리어가 좋고 바다경치가 좋다해도 이런 서비스로 모히토 한잔에 만7천원에 사 마시는 것은 가성비로 보면 갈 만한 곳이 아니다.    웬만한 고급호텔 칵테일 라운지 술값이다.  특이하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알려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몰리는 지 모르지만 이 건 너무 심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참을 만 했는데 여기 대표 음식메뉴로 메뉴판 제일 앞에 나와 있는 새우버거를 안판다고 한다.

 

사실은 칵테일은 이 새우버거를 먹기 위해서 식사전주로 마신 것이다.  그런데 막상 점심을 주문하려는데 그 메뉴는 제공할 수가 없단다.    새우재료가 없어서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가관이다.   새우를 대 주는 업자가 이틀을 쉬어서 새우가 없어서란다.   자기네 잘못이 아니라는 투다.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는지 모르지만 그렇다면 메뉴판에 써 넣어야 한다.  새우가 없을 때에는 새우버거를 제공할 수 없다고,

 

 작년 겨울 부산 "고옥"이란 히츠마부시 장어덮밥집에 헐레벌떡 시간 마춰 갔는데 재료가 떨어져 손님을 받을 수 없다고 허망하게 쫓겨 났던 일이 있었다. ( 2017/05/22 - [국내여행기/부산 영남] - 부산에서 )

 

기다려서 먹는다는 집쯤 되면 시건방지게 된다.   외국식당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설혹 실수로 시킨 메뉴가 아닌 것이 나왔다 던가 하면 정말 저자세로 사과를 하고 뭔가 보상을 해 준다.   칵테일 값을 받지 않는다든가 손님에게 보상을 해 준다.   그런 일도 별로 없지만 ...

 

그렇기 때문에 기억에 없는지 모른다.

 

하여간 정월 초하루부터 기분을 잡쳤다.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와 도담에서 이태리안 음식을 먹었다.

 


 

 

Adieu 2017  서울

 

종이 책의 반은 버렸다.

 

 

 

버리려고 내 놓은 책

건질 만한 것이 있을 지 모르지만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에 오지 않겠단다.

건축 폐기물과 함께 나갈 것이다.

 

 

 

이사짐이 나간 내 서재 2018년 2월 14일 돌아 가면 어떻게 변해 있으려나?

 

Happy New Year 2018

정월 초하루 제주도 이태리안 레스토랑 “도담”에서


 

 

도담에서

"바다다"의 모히토 두잔 값으로 맛 있는 점심을 먹었다.

 

 

 

 

 

 

 

 

 

 

 

 

 

Posted by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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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천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8.01.02 07:59 신고

    새해에도 두분 늘 건강하시고 매일매일 즐겁게 지내시길 소망합니다.

시계와 시간

 

 

2017년도 며칠 남지 않았다.   내일 모래 30일 우린 제주행 항공기를 타고 제주로 간다.

 

서울은 지금 영하 -2℃ 라는데 서귀포시 중문동은 12℃ 다.  무려 14도나 차이가 난다.   따뜻한 남쪽나라다.      30일날 아침 7시에 이사짐 센터가 와서 포장이사를 해 주기로 예약되어 있다.

 

한달반 컨테이너에 실어 창고에 보관해 두기로 했다.   돌아 오는 2월 14일 창고에 보관해 두었던 이사짐이 들어 온다.

 

버리고 버려도 또 버릴 짐이 쏟아져 나온다.   남은 이틀안에 정리를 마져 마쳐야 한다.

 

이렇게 어수선할 땐 시간이 빨리 가기를 바란다.   빨리 2월 14일이 와서 깨끗하게 리모델링한 집에 새로 입주하는 기분으로 돌아 올 날을 기다린다.  

 

우리가 묵기로 한 해리안 호텔에는 시계가 없어 블편했다.   전자레인지 시계를 맞춰 놓고 시계 대용으로 이용했는데 외출할 때 현관의 키를 뽑으면 컨센트 전원마저 꺼져 시계가 0시로 리세트되어 있다. 

 

돌아와서 항상 시간을 다시 맞춰나야 했다.   그래서 그 김에 여행용 휴대 시계하나를 구입하려다 보니 시계앱 생각이 났다.

 

안드로이드 갤럭시폰에는 시계가 들어 있어 꺼진 상태에서 시계를 셧다운 바탕화면으로 설정해 놓으면 꺼져 있을 때 항상 시계가 나온다.

 

아이폰에는 red clock 이란 앱이 있었다.  이걸 며칠 켜 놓고 사용해 보니 여러 모로 쓸모가 있다.   시간만 알려 주는 것이 아니라 날씨나 기온 풍속등 외출할 때 필요한 정보를 알려 준다.   적어도 10시간은 버티니까 충젼기와 연결해 놓기만 하면 외출했다 돌아 온 후 자동 충전해 주니까 따로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대치동 날씨 현재 -2℃

 

 

 

서귀포 중문동 기온 12℃

 

 

 

"Red Clock"이란 시계앱

거의 쓰지 않는 아이패드 미니를 전원에 연결해 놓아 시계로 쓰면 대형디지털 시계로 변모한다.

날씨와 기온까지 알려 준다.

Posted by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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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ruprin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7.12.29 02:14 신고

    안녕하세요.
    제주도 가시는군요. 따뜻한 제주도에서 좋은 음식과 공기를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보리스님, 코니님 올한애 잘 마무리 하시고, 내년에도 건강과 좋은일만 생기시기를 바라겠습니다.
    ( _ _)
    저도 시계앱을 써봐야겠습니다.

    • 샛솔  댓글주소 수정/삭제 2017.12.29 10:21 신고

      안녕하세요. 오래간만입니다. bruprin님도 새해에 건강하시고 좋은 일이 가득하시기 빕니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옛날 기념 우표 시트

 

 

난 1960 년 8월 22일 일부 변경선을 넘었다.   미국유학길에 오른 것이다. (2007/01/08 - [일상, 단상/잡문] - 1960년과 2007년 )

 

미국 유학길에 오르기 1주일전 난 중앙우체국에 가서 광복 15주년 기념우표 시트를 여러장 샀다.   우표수집 목적으로 산 것이 아니었다.

 

당시 유학생에게는 미화 300불밖에 환전을 해 주지 않을 때였다.   그래서 기념우표 시트를 사 가지고 가면 돈이 될 거라는 어느 지인의 권고로 시트를 사가지고 갔던 것이다.

 

우표수집가가 아니기 때문에 딱히 어디에 가야 이 시트를 매도할 수 있는지 알 수도 없었고 또 선물로 사용하기도 그렇고 해서 그냥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60년가까이 까지 그냥 지니고 있게 된 것이다. 

 

그 우표시트는 계륵과 같았다.  버리기엔 아깝고 가지고 있자니 짐스러웠다.  물론 물리적 공간은 얼마 차지하지 않는다 해도 볼 때 마다 "어떻거지" 하는 마음의 무게가 물리적 공간을 훨씬 넘게 큰 것이었다.

 

며칠 인터넷 서치를 해서 우표를 무제한 매입한다는 사이트를 찾았다.  "우표사랑" 이란 사이트다.   그냥 우체국 등기 택배로 보냈다.   감정가대로 매입을 희망한다는 메시지와 계좌번호를 적고 간단하게 소장하게 된 이력을 덧 붙였다.

 

어제 붙였는데 오늘 연락이 왔다.   18만원에 매입하겠단다.   곧 입금하겠다는 연락이다.  

 

그래서 60년 가까이 끼고 있던 계륵 하나를 처치했다.

 

우송하기 전에 사진을 찍어 놨다.    앞 포스팅에 올렸던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의 저자 "사사키 후미오"의 권고를 따른 것이다.    사사키씨의 권고는 버리기엔 너무 추억이 많은 물건에는 "사진을 찍어 남겨둬라" 였다.   그러면서 사족을 달기엔 그 사진도 아마도 다시 볼 기회는 없을 것이지만... 이라고 했다.

 

내가 이 블로그를 쓰는 것은 그 사진을 다시 볼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일 지 모른다.

 

 

 

60년 가까이 끼고 있던 1960년 8월 15일 발행한

광복 15주년 기념우표

 

 

 

시트 전지 (우표 50매)

모두 6장이다.

 

 

 

일종의 소형시트

 

 

 

우표사랑이 보내준 매입금

 

 

 

Posted by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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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통계물리학의 역사 -  My Memory of late Professor Soon-Tak Choh

 

 

마지막 리모델링을 하려고 내 서재를 정리하다 뜻밖의 오래된 잡지하나를 발견했다.

 

재미한인 물리학자협회가 발간하는 뉴스레터 April 1997호다.  1995-1996년 Brown 대학에서 안식년을 보냈기 때문에 이 잡지에 고 조순탁교수에 대한 회고록을 기고했었다.

 

내가 이 원고를 기고할 때 pdf 형식으로 갖고 있어 내 홈피에 올려 놨었다.  2000년경 당시 하나로통신사를 인터넷 제공자로 쓰고 있어 그 통신사에서 제공하는 서버에 올려 놨었다.  통신사를 바꾸는 과정에서 사라졌다.   이런 잡지는 학술지도 아니기 때문에 도서관에 보관되는 것도 아니고 찾을 길이 없었다.

 

내가 이 잡지를 종이 형태로 갖고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찾을 길이 없었다.  서가를 뒤지고 뒤지고 심심하면 뒤지고 뒤졌는데 못 찾다가 종이책을 버리려다 보니 발견한 것이다.

 

또 사라질 지 몰라 내 글만 스캔해서 여기 올린다.

 

한국 통계물리학의 역사다.  내가 죽으면 이 말을 전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책을 함부러 버리기도 그렇네...

 

 

 

MyMemory.pdf

 

 

PS:

 

정리를 하다 보니 1985년 조순탁교수의 화갑기념회에서 "통계역학의 발전"이란 기념 논문집을 냈을 때 내가 읽었던 헌사 원고가 나왔다.  한국 통계역한의 역사의 일부이기 때문에 여기 스캔해서 올린다.

 

 

조순탁교수회갑헌사.pdf

 

Posted by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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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황찬용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7.12.18 10:56 신고

    교수님 올리신 화일의 pdf본을 좀 받아볼 수 있을까요?
    저는 통계물리 전공은 아닙니다만.
    이메일은. cyhwang@kriss.re.kr

2017 년 송년회

 

살 날보다 산 날이 더 많은 나이가 되면 내 블로그도 옛날 얘기가 더 많아진다.  어제는 물리학부 송년회에 갔었었다.  내가 처음 물리학과에 부임해서 가르쳤던 3번째 해의 학생이 은퇴해서 명예교수의 반열에 끼어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아직 현직에 있는 한 제자 교수에게서 처음 듣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교수가 아직 미국에서 박사과정에 있을 때 내 prl 에실린 논문을 본 이야기였다.  (단상)


내 분야인 통계물리와는 다른 입자물리를 전공했는데 비록 분야는 달라도 자기가 배운 모교의 교수가 미국의 교수들도 싣기 어려운 prl( Physical Review Letters)에 실린 논문을 보고 자랑스럽고 뿌듯했다는 이야기였다.

 

내가 prl 에 올린 몇개의 논문중의 하나로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연구업적이다.  

 

1950년대 중국계 미국 물리학자인 TD Lee 와 CN Yang 은 젊은 나이에 노벨상을 탄 것으로 더 유명해 진 인물이다.   그 두 물리학자는 통계역학과 입자물리 두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Ising Model 의 Onsager solution 을 증명한 것으로 유명한데 거기에 더 나아가 상전이의 이론을 제시했다.

 

노벨상도 입자분야의 업적으로 탄 것이기 때문에 이 제자교수가 내 논문에 관심을 가진 것도 입자물리분야의 대가인 Lee-Yang 이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Lee-Yang Circle theorem 이란 이름으로 알려 진 이 이론은 추측이었지 엄밀한 증명이 빠졌었다.  이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애썼지만 결국 실패했다.  내가 prl 에 게재한 논문이 이 이론을 증명하고 더 나아가 일반화해서 Lee-Yang therorem 이 특수한 경우로 포함되게 한 것이다.

 

논문을 쓴 것이 30년전 이야기이고 물리에서 손 뗀지 10년이 넘었으니 나도 대강 어떤 것을 했다고 기억만 할 뿐 자세한 것은 잊어버렸다.

 

그래서 다시 보면 새각이 나려나 하고 침대위에 걸져 있는 아이패드로 검색하니 논문이 나온다.  그러나 초록만 보여 줄 뿐 본문은 돈을 내고 사야 한다.

 

25불을 신용카드로 결재하고 논문을 내려 받았다.  내가 내 논문을 25불 주고 산 셈이다.

 

 

PhysRevLett.73.2801.pdf

 

지금 돌이켜 보면 그 때 그 엄청난 계산을 하면서 흥분했던 기억이 새롭다.   아쉬웠던 것은 이 논문은 내 방대한 증명을 위한 계산의 초요약이고 이를 해설했어야 하는데 하지 않았던 점이다. PRL 은 4 페이지 이상의 논문은 실어 주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방대한 내용이라 해도 4 페이제로 요약해야 한다.  이논문에 관해 해설하고 미진했던 부분을 더 자세히 연구했다면 적어도 5,6편, 많으면 10편의 논문을 썼었을 것이다.   

 

난 일단 난제를 풀고 나면 다른 문제에 도전하는 게 재미가 있지 이것을 다시 해설하거나 가지를 키우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난 내 업적을 알리는데 손해를 많이 봤다. 

 

 

 

PS:

 Lee-Yang theorem 의 CN Yang(楊振寧) 교수는 한국과 또 나와도 특별한 인연이 있다.  CN Yang 교수는 내가 은퇴하기 몇년전인  1996년에 한국에 유치 설립된 아태이론물리센터(APCTP = Asia Pacific Center for Theoretical Physics) 의 초대소장을 지냈으며 내가 한 때 CN Yang 소장의 특별고문을 지낸 일이 있다.  그 때 찍은 사진이 오랜 사진묶음에서 발견되어 여기 스캔해서 올린다.

 

 

 

아태 이론물리 센터 국내외 인사들

앞줄 한 가운데가 CN Yang 소장이고 그 왼편이 필자

해외 인사는 대부분 노벨상 수상자들이다.

1998 년 경

 

 

 

Posted by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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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메이데이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7.12.16 15:14 신고

    선생님, 까막눈이라 읽을 수 없지만 선생님께서 '다시 해설하거나 가지를 키우지 않으셨던' 뜻을 배우고 싶습니다. 1922년 생, 楊振寧 교수와 1926년 생 李政道 교수네요. 楊振寧교수는 현재 중국 국적을 회복하고 중국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 샛솔  댓글주소 수정/삭제 2017.12.16 16:11 신고

      제 논문이 지엽적이 아니고 뿌리같은것이라 여기서 파생하는 지엽적인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확장해서 여기 저기에 응용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대개 Postdoc 이나 박사과정학생에게 시켜서 하는 연구인데 당시 포닥도 변변한 박사과정 제자도 없었기 때문에 혼자 하기에는 벅차고 또 새로운 연구가 더 흥미가 있어서 그냥 넘어간 것입니다. 다행이 나중에 큰 아들이 이어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 http://boris-satsol.tistory.com/1020 )



얼마전 내 블로그를 방문하고 댓글을 남기고 간 분이 계셨다. 

일본 저전거여행을 마치고 일본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고 고백하셨다.   반일주의자에서 친일파가 되었다고 스스로 고백하신 분이다.  

 

내 블로그의 글 들이 그분의 생각과 비슷한 분위기 또는 여운을 남기고 있다고 느꼈는지 자신의 전향을 재확인하겠다고 내게 물음을 남기고 가셨다.

 

나 또 한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 분의 전향에 전적으로 동감했다.   그런 경험을 5년전에 글로 썼는데 공개하지 않았다.   한일문제는 민감한 문제라 내 생각과 다른 사람들이 공격적으로 내 글에  악풀을 달기 때문에 그런게 귀찮아서 아예 글을 써 놓고 올리지 않았다.   여기 그 때 그 글을 다시 옮겨 적는다.

 

"은원의 그 너머"는 키쿠치 칸의 소설 恩讐の彼方に(おんしゅうの かなたに) 의 제목에서 따 온 말로 불교적 의미가 함축되어 였다. ( 2012/03/19 - [해외여행기/일본 큐슈] - <은원(恩怨)의 그 너머> - 야바케이 자전거길 )

 

 

 

동굴을 파는 선승 젠카이(禪海)

 

 

 

********** 은원을 넘어서야 2 -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을 생각하며  (2012.08.23 썼던 글)  *********

 

 

MB 의 독도 방문으로 유발된 한일간의 갈등은 날이 갈 수록 격화되는 느낌이다.     일본 우익들이 이젠 한류의 최상급인 욘사마(배용준)까지 공격을 한다는 뉴스가 들린다.

 

한일 모두를 사랑하는 나에겐 가슴아픈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내 생전엔 불가능하겠지만 언젠가는 부관, 관부 해저 터널이 뚫리고 여권 없이 한 일 양국을 오가는 날이 올 것이라고.

 

오늘 날  우리의 국민감점, 민족감정이란 것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면 그 해답이 나온다.

 

내가 <은원을 넘어서야> (2012/08/20 - [일상, 단상/지나간 세상] - 은원을 넘어서야 - 우린 아직 고작 숫캐의 수준인가)라는 글을 네이버의 블로그에 옮겨 올렸더니 댓글 하나가 달렸다.  독도에 대해 잘 못 알고 있으면서 알고 있는체 하는 댓글이기에 반박을 해 줄까 하다 이런 댓글이 하나 둘이 아닐 터인데 소모적인 논쟁을 하며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아 댓글을 삭제하고 그 글엔 아예 댓글을 달지 못하게 차단해 버렸다.

 

오늘 날 평균적인 우리 국민이 가지고 있는 대일관은 실체가 없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오직 딴 사람들이(언론매체,  정치모리배,  반일교과서)  떠들어 대는 것에서 형성된 막연한 추상적인 반일 의식일 뿐이다. 

 

역사란 항상 역사를 기술하는 사람의 기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역사교과에서 배운 내용은 지식의 일부로 간직해야지 그것을 바탕으로 감정으로 이어 가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감정으로 이어가게 만드는 것이 바로  매체와 그릇된 지도자들의 선동때문이다.

 

그렇다면 일제 강점기를 직접 체험해서 반일 감정을 갖게 된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내 나이보다 더 많은 사람이 그래도 뭔가 일제 강점기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연령층일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직접적으로 일제 강점기때의 피해기억을 가지고 있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일제 강점기의 피지배자로 입은 피해를 일차적으로 기억하가 있는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내가 그 극소수자의 한사람이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라면서 일본사람들이 재일 조선인을 조셍징으로 부르면서 차별과 멸시를 일삼던 것을 직접 보았다고 해도 무방하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탓에 열살도 되기 전에 부모와 헤어져야 했고 전쟁의 후유증으로 난 10살 되던 해 아버지를 여의고 불행한 유소년 시절을 보내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나와 내 가족이 일차적인 피해를 체험한 세대인 것이다.    일본사람들에게 차별 받고 멸시를 받았던 재일 조셍징의 후예이니 내가 일본사람들에 대한 반감은 우리 일반 국민의 그것보다 더 강했다.    60년대 말 미국에서 귀국할 때만 해도 일본을 거쳐갈 때 일본에 들르는 것을 꺼려 했었다.     두려웠다는 것이 솔직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 죽 일본을 여행하는 한국 사람들,   자전거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거기서 만난 일본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내 선입견과는 전혀 달랐다.   또 일본을 여행하는 우리 한국 젊은이들은 나와 같은 자의식이 없이 일본사람을 대할 때 자연스러웠을 것이고  일본사람들 역시 자연스럽게 대했을 것이다.   나는 내가 편견과 허상을 지니고 있음을 차츰 깨닫게 되었다.

 

내 대일관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점점 긍정적 방향으로 변화해 갔다.   조셍징으로 한국인을 멸시하던 일부 늙은 세대는 가고 한국의 경제성장과 진보로 한국을 보는 눈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나 또한 작년부터 일본을 여행하면서 내 과거의 체험에서 형성된 자의식과 편견을 씻게 되었다.      일본에서 우린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자꾸 배우게 된 것이다.    일본이 좋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난 자연 일본의 과거사의 굴레에서 벗어 나기 시작했다. 

 

일본의 우익들 또한 허상에 매인 사람들이다.    일본의 경제 침체가 심화되자 옛날 군국주의 시대가 일본의 영광의 시대라고 착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끔 일본의 인터넷 토론장에 들어 가 보면 일본 우익의 주장이 얼마나 허상이고 무식한 소치인가를 곧 알 수 있다.  그들이 주장은 나라가 어려울 수록 일사 불란 단결했던 군국주의 시대에로 돌아 가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그리워하던 그 군국주의시절이란 얼마나 암담했던 시절인가를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서구의 자유주의사상과 교육의 배경을 가진 일본의 일반 국민은 결코 이들에 동조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든다.  얼마전 일본 NHK 에서 방송한 아침 드라마 <순정 반짝>을 보면 일본 군국주의가 국민을 전쟁의 광란으로 몰고 간 것은 군부와 일부 그릇된 극우세력 탓이지 일반 국민은 그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것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일본은 군국 주의로 돌아 가지 않는다.

 

단지 묘하게도 일본 정치인들은 이 일본의 신우익세력을 여간 의식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들은 속은 어떻던 이런 세력을 대변하게 되고 일본 전체가 우익화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 주고 있는 것이다. 

 

 1963년 8월 28일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명연설,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 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I have a dream, that one day on the red hills of Georgia the sons of former slaves and the sons of former slave owners will be able to sit down together at the table of brotherhood.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조지아의 언덕 위에서 예전의 노예들의 후손들과 예전의 노예 소유주들의 후손들이 형제애로 모인 식탁에 함께 않을 수 있게 되리라는.)

 

지난 미국 대선에서는 마틴루터의 이 명연설 당시엔 꿈도 꿀 수 없었던 흑인 대통령을 뽑았다.  마틴 루터 킹의 꿈이 이루어 지는 순간이었다.

 

우리나라에도 마틴 루터 킹과 같은 지도자가  나와

 

<나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관부, 부관 해저터널이 뚫리고 신칸센과 KTX 가 부관, 관부해저를 달리게 될 날이,  그리고 여권 검사없이 서울에서오사카에 오사카에서 부산에 오갈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란 것을.....

 

그리고 옛 지배자의 후손과 피지배자의 후손이 한 KTX 식당차의 식탁에서 <막걸리>를  나눠 마실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

 

그리고 우리 모두가 더 먼 옛날엔 한 조상의 갈라진 후손들이란는 것을 알게 될 날이 ...

 

싸워야 하고 미워야 할 이유가 없는 같은 피의 후손이란 것을...>

 

이란 연설을 듣게 되기를 꿈꾸어 본다.

 

은원을 넘어서야 한일간의 미래가 보인다.



출처: http://boris-satsol.tistory.com/915 [지구별에서-MyLifeStory]

 

 

Posted by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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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연주의자의 고백

 

지난 토요일 늘 보는 "불후의 명곡" 프로그램에 "이난영"씨의 "다방의 푸른 꿈" 이란 노래가 나왔다.     그런데 그 노랫말의 첫 머리에 "담배연기"란 말이 나온다.  

 

내뿜는 담배연기 끝에
희미한 옛 추억이 풀린다
고요한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며
가만히 부른다 그리운 옛날을 ....

 

담배연기 끝에 희미한 추억...

 

멋 있는 가사다.   

 

 

 

담배의 명장면은 뭐니 뭐니 해도 "제3의 사나이(The third man)"의  라스트 신이다.    

 

 

 

Joseph Cotton 주연의 1949년 영국 영화 "The Third Man"  의 마지막 장면 

Greham Greenee 원작의 이 영화는 1999년 영국 영화협회(British Film Institute)가 영국 영화 역대 최고의 작품

(greatest British film of all time.)으로 선정했다.

https://youtu.be/X7bInqjmEN4

 

 

 

옛날에는 담배는 이처럼 멋이 있었다.

 

담배 연기하면 나도 추억이 있다.    극렬한 금연주의자인 나도 한 때 담배를 피웠다.

 

2년에 한 번씩 공단 건강검진 문진표를 작성하다 보면 옛날에 내가 지은 죄를 고백하게 만든다.   담배를 언제 얼마동안 하루에 몇가치 피웠는가를 되새기게 한다.   아 2년전에도 물었는데 또 이걸 묻네....

 

이 문진표의 답을 미리 말하면 난 스물 한 두살때 부터 마흔이 되기 한, 두해 전까지 하루 반갑 (열가치) 정도의 양을 피웠다.

 

내가 담배를 배울 땐 담배의 해독에 대해서 알려진 것도 없었고 담배를 피우는 것은 멋을 부리는 것과 비슷하게 받아 들였다.

 

남자가 술 담배 못하면 뭣에 쓰노?  할 만큼 남자면 술 담배 정도는 해야 남자라 불릴 수 있다는 식이었다.

 

1956년 내가 대학 2,3 학년 무렵에 쓴 일기장엔 담배연기를 자연(紫煙 보라빛 연기)이란 낱말로  멋을 부려 표현했다.

 

 

 

1956년 3월 18일 (일요일) 에 쓴 내 일기장의 일부

Viceroy는 그 당시 한국에서 유행하던 양담배 이름이다.

 

 

내가 담배를 배우게 된 계기는 내가 대학생 때 가정교사를 하고 나서였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혜화동 일대에서는 쪽집게 A급 가정교사로 소문이 났었다.  (2007/08/04 - [일상, 단상] - 강남엄마 따라잡기 - 쪽집게 과외선생)

 

그 때 그 글에서도 내가 담배를 배우게 된 동기를 간략하게 쓴 일이 있다.     과외를 맡긴 엄마들이 과외비를 낼 때가 되면  날 찾아와선 과외비와 함께 당시로는 최고의 선물인 양담배를 한 두 보루(10갑)씩  대 주었다.  자연히 담배를 자꾸 피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1959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양담배를 대 놓고 피게 되었던 것이다.    Chesterfield 와 Philip Morris 를 좋아하는 줄 알고 그 종류를 잘 갖다 주었다.   일기장에 적힌 Viceroy 도 한 동안 그 logo 가 한국 공군 마크를 닮았다해서 "공군담배"라는 닉네임이 붙어서 뜨던 담배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갔는데 군대에서는 "화랑" 담배를 대 주었다. 화랑담배는 그냥 보통 종이 포장이라 배급을 받을 때면 담배는 바짝 마른 풀가루였다.   연기가 너무 매워서 담배를 꺼꾸러 물고 입김으로 적셔서 불을 붙이곤 했다.   훈련소에서 노는 시간에 할 일 이 없으니 담배 피우는 일이 휴식의 전부였다.  화랑 담배를 꺼꾸러 물고 입김을 불어 넣던 생각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제대하고 419 가 났고 그 해 8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 다음 해 아내와 결혼했지만 담배 피우는 습관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1960 년 초반에 담배의 유해성 공방이 처음 일었다.   미국의 담배 회사와 보건 담국이 담배의 유해성에 대해 공방을 벌였다.    담배갑에 담배 유해성 경고를 넣어야 하느니 마느니 논란이 일었던 것이다.

 

막강한 자금을 동원한 담배회사들은 로비와 광고,  사이비 연구비를 지원하는 등 반격이 만만찮았다.

 

내가 박사논문 자격시험에 합격하고 논문을 준비하고 있을 때 이론물리 전공 대학원 학생은 Annex 라고 불렀던 물리학과 뒷켠 목조 건물에 연구실을 배당 받았다.    그 연구실을 쓰던 대학원생 대부분은 담배를 피지 않았는데 내 office mate 인 Nori 만 담배를 피웠다.   그래서 자연히 우리는 담배 피는 Office mate 끼리 방하나를 나눠 쓰게 되었다.

 

우린 대부분 올빼미족이었다.   낮에는 시끄러워 공부가 제대로 되지 않으니까 저녁을 먹고 다시 연구실에 와서 밤샘 공부들을 했다.   자정을 넘기는 것은 보통이고 두시 세시에 집에 돌아 갔다.   자연 다음날은 늦잠을 자고 10시 아니면 11시에 학교에 왔다.  

 

그러다 보니 자정 쯤 되면 출출해져서 캠퍼스에서 1 마일은 떨어 진 45가의 "Rainbow" 라는 Tavern (피맥)에 가선 피자를 사 먹곤 했다.     다시 연구실에 돌아 가지 않을 땐 생맥주도 한 두잔 했다.

 

그 때 옆방의 Ed Fizet 라는 친구는 의자 팔거리에 걸친 내 오른 손 손가락사이에 끼운 담배와  왼 손으로 잡은 맥주 Pitcher의 포즈를 쳐다 보고는  멋 있는 "Classic pose" 라고 칭찬해 주곤 했다.

 

난 그저 무심히 자연스럽게 취한 포즈인데 그 친구의 "classic pose" 라는 칭찬이 아직도 귓가에 맴 돈다.

 

담배는 내겐 그런 멋이었다.

 

1964 년경 경북대학교 전자공학과 교수이던 물리학과 선배 한 분이 UW 에 연수를 오셨다.    물리학과 선배이기 때문에 같이 많이 다녔는데 사진에 일가견이 있는 분이었다.  

 

내 담배 피는 모양을 사진 찍어 준 것이 있다.   아마도 멋 있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앨범에 붙어 있었던 같아 찾아 보니 있었다.

 

캐나다 Vancouver의 UBC 에서 포닥(박사후 과정)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에도 금연을 못하고 담배를 피울 때였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양담배를 금지하였고 공무원이 양담배를 피우다 들키면 엄중한 처벌을 내렸다.    그 땐 전매청에서 팔 던 최고품 담배는 "백양"이었는데 "청자"가 최고품으로 대체되던 시기였다.   전매청 담배는 양담배에 비하면 값도 만만찮은데 질은 형편 없었다. 

 

내 옆방에 내 동갑내기 교수가 있었는데 우리는 둘이 이 참에 담배를 끊자고 제안했다.  둘이서 끊으면 서로 격려하면서 감독하면서 금연이 용이하지 않을까 해서 였다.   그러니까 70년대 초에 내 최초의 금연 노력이 시작되었다.

 

"금연" 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이후에도 금연 다시 흡연등 여러번 끊고 피우고를 반복하다 1975년 관악 캠퍼스로 이사 간 다음엔 완전히 끊었다.      그러니까 불혹의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소싯적" 못된 버릇을 청산한 셈이다.

 

1977 - 78 년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USC 에서 방문교수로 1년 지낼 때 미국의 금연상황은 굉장히 발전해 있었다.     그래도 Semiar 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한 둘 있었지만 재털이는 치운 상태라 담배갑에 재를 터는 궁상을 떨었다.    

 

1965-66 년 Brown 대학에 1년 방문했을 땐 물리학과 건물 자체가 금연 빌딩이었다. 

 

작년에 노벨상을 탄 Kosterlitz교수가 추운 겨울에도 건물 밖 현관에서 떨면서 담배를 피던 딱한 모습이 떠 오른다.(2016/10/04 - [일상, 단상/잡문] - 2016년 물리학 노벨상)

 

 

 

.................

 

 

 

 

과외 선생을 할 때 엄다들이 갖다 주던 Chesterfield 담배

아마 이 담배로 담배를 배우지 않았나 싶다.

 

 

 

공군 담배로 닉네임이 붙었던 양 담배

Viceroy

1956 년 일기장에 썼던

Viceroy 의 자연(보라빛 연기) 주인공

 

 

 

1963년이나 64년 무렵 담배에 불을 붙이던 내 모습

Seattle 에서

당시 UW 에 연수왔던 경북대 L교수가 찍어 준 사진

당시엔 크루컷(Crew Cut)이 유행이라 나도 한 동안 크루컷 머리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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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천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7.06.07 08:29 신고

    건강검진시 금연한 지 10년쯤 되고 아직도 100% 금연은 아닌 저는 사실대로 기재합니다만, 금연하신지 40년이 지나셨으면 건강 검진시 이실직고(?) 하시지 말고 평생 안피우신 걸로 간단 작성하셔도 검진에 영향이 없으실 듯합니다. ㅋ

    • 샛솔  댓글주소 수정/삭제 2017.06.07 11:37 신고

      감사합니다. 문항이 있으니까 항상 옛날 기억을 되 살려 주는 거지요. 담배라는 게 원래 인다안들은 의식으로만 피웠다던데 백인들이 그 악습을 달리 퍼뜨렸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그 많은 사람들을 고통의 도가니로 밀어 넣게 된 거지요. 안타깝습니다.

  2. 수문장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7.06.12 09:24 신고

    담배는 멋으로 피웠던 시기가 제게도 있었지요.
    담배 피우는 모습이 멋지십니다. 커피와 담배는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친구이자 필수품이었지요..^^

    • 샛솔  댓글주소 수정/삭제 2017.06.18 15:58 신고

      감사합니다. 수문장님도 흡연 경력이 있으셨군요. 전에는 담배에 대해 너무 몰랐습니다. 지금은 그 해악이 그 만큼 알려졌는데도 금연운동은 상대적으로 미약합니다. 좀 더 강력해 져야 할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3. 지나가는중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7.12.20 11:51 신고

    재미있게 잘읽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빠져들어 읽었네요

다시 자전거 아침 피크닉

 

처음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을 땐 새벽에 아침을 싸가지고 피크닉을 자주 했었다.

 

2007/08/17 - [잔차일기/서울 근교] - 불광천 달리고 한강변에서 아침 피크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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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5 - [잔차일기] - 브롬톤 타고 아침 피크닉

 

요즘 미세먼지가 잦아들어 공기도 깨끗하고 3륜도 고쳤기 때문에 다시 아침 피크닉을 시작했다.   전에 자주 아침 피크닉으로 가곤 했던 과천 체육공원에 몇번 갔다.

 

STEPS 를 장착했기 때문에 중간에 쉴 것도 없이 자전거길 제한속도인 시속 20 Km 로 달리니 사간도 별로 들지 않는다. 

 

오늘 아침도 7시 조금 지난 출발 해서 9시에 돌아 왔다.    다리 근력에 따라 Norm 에서 High 모드로 가면 적당한 다리 근육 운동이 된다.

 

여행을 떠나면 가을까지 3륜은 탈 수 없으니 네델란드에 가기 전 한 달은 열심히 탈 생각이다.

 

 

 

 

우리의 아침 메뉴

 

 

과천 체육공원에서

Posted by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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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수문장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7.05.29 15:23 신고

    요즈음은 산책하기 좋은 날이 연속되는군요. 멋진 하루의 시작을 보여주시네요.^^

  2. 샛솔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7.05.29 16:42 신고

    요즘이 서울에서는 자전거 타기가 제일 좋은 때 같습니다. 칠천도 여행 재미 있었습니다. 팬션 해프닝도 이야기거리를 줬고요. 감사합니다.

서울대학교에 가다 - 2017-05-17

 

 

이론물리 연구센터 소장을 하는 내 애제자 교수가 오늘 몇 명예교수를 점심에 초대했다.

 

5월 중순 스승의 날 근방이면 항상 점심 초대를 하곤 한다.     오랜 만에 서울대학교에 갔다.   작년 5월에 가곤 1년만이다.   학교는 많이 변해 있어 자하연 식당을 찾는데에도 몇 사람에게 물어 봐야 했다.

 

점심을 먹고는 옛 물리학과 건물에 갔다.    내가 관악 캠퍼스에 가서  은퇴할 때까지 25년 넘게 쓰던 연구실도 다시 가 보고 또 새로 지어 옮겨 간 물리학부 새 건물도 구경할 겸 가 본 것이다.

 

은퇴하고 학교를 떠난지 벌써 17년이나 되었으니 변한 것이 많은 것은 당연한 것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17년이 지났다.

 

학교는 5월 축제의 한 가운데였다. 

 

 

 

 

 

 

27동 건물 현관 바로 옆 2충 방이 내 연구실이었다.

이 건물은 개축을 하고 수학부가 쓰고 있다.

 

 

 

개축을 할 때 현관 바로 위 연구실 두개를 헐고 천정을 2층까지 높여 놨다.

동숭동 문리대 캠퍼스에서 1975년 관악캠퍼스로 이사오면서

난 정면에 보이는 벽의 연구실을 25년간 차지하고 있었다.

지금은 이름도 알 수 없는 어느 수학과 교수의 연구실이 되어 있었다.

 

 

 

반대방향에서 바로 본 내 옛 연구실

목련 나무 대신 소나무가 서 있었다.

 

 

 

이 건물이 물리학부 새 건물이다.

 

 

 

대학 본부 앞 5월 축제장

 

 

 

SNU Festival 이란 치장물이 서 있다.

 

 

 

58년 전 내 대학 졸업사진 1959년 2월 쯤 될 것 같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이 된 옛 서울대 문리과 대학 캠퍼스에서 찍은 사진이다.

왼쪽 어깨위에 "대" 자가 보이는 뒷줄 왼쪽에서 네번 째 졸업생이 58년전 내 모습이다.

1970년 난 여기서 교수 생활을 시작했다.

관악캠퍼스로 이사 갈 때 까지 5년 남짓 이곳에서 연구하고 가르쳤다.

마로니에 공원엔 대학 본부 건물 하나만 남아 있고 옛 건물들은 다 사라졌다.

단지 남은 것은 마로니에 나무 몇 구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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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의 데이트  -  옛 추억

 

 

2월 22일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그날 코니와 나는 치과 예약이 되어 있었다.  임플란트의 마지막 과정으로 심은 티타늄 뿌리에 크라운을 씨우는 시술이다.     한 열흘 전 본을 다 떴기 때문에 그 날은 제작한 크라운을 씨우면 끝난다.

 

오전 예약이라 12시쯤 모든 시술이 끝났다.

 

치과는 5호선 내방역 근방이다.   우린 치과가 끝나면 자주 여의도 "신동양대반점"에 가서 점심을 먹곤 했다.   거긴 채식 중식집이라 채식으로 된 중화요리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 2009/10/15 - [잔차일기] - 브롬톤이 열어 주는 새로운 세상 )

 

치과가 끝날 때 여의도에 가는 이유는 내방역에서 우면상쪽으로 올라가면 방배역이 나오는데 거기엔 461 번 버스가 지나간다.   시간은 꽤 걸리지만 가만히 앉아 있으면 여의도 역까지 데려다 준다.  신동양대반점가기 가 십상이다.

 

요즘은 9호선이 선정릉까지 연장되어 15분 남짓하면 여의도역에서 선정릉역까지 갈 수 있다.   그러나 지하철은 무임승차하는 노인들이 많아 가능하면 피하고 있기 때문에 버스를 많이 이용한다.    이 버스는 한티역도 지나가지만 한티역에서 타면 1시간 20분 넘게 걸린다.

 

그런데 그 날은 중식보단 다른 음식이 먹고 싶어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내방역을 지나는 버스 하나가 남산 3호터널을 지나간다.   406번이던가?

 

그렇다면 해방촌 경리단 정류장에서 내리면 "알마또"에 갈 수 있겠다.   ( 2015/11/08 - [국내여행기/서울] - 서울 기행 1 - 알마또 이태리 식당 )    그래서 버스를 타기로 했다. 경리단정류장에서 내려 녹사평 대로를 육교로 건너 "알마또"에 갔다.   

 

한 한달전에서 "알마또" 에 간 일이 있었다.  화요일이 정기휴업일이란 것을 몰라  들어가지 못했다 그래서 한 2주에 다시 화요일을 피해 가서 피자와 파스타를 맛 있게 먹었다.      알마또는 실망시키는 일이 없어 수요일인 22일에 갈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런데 또 문이 잠겨 있었다.   주인장이 이태리 여행을 갔다고 써 있었다.  아주 닫는 것이 아니고 3월 며칠까지만 휴업이라는 것이다.

 

아쉽지만 발길을 돌렸다.   피자 생각을 하니 딴 음식은 싫고 1~2년전에 대학로에서 나폴리 피자를 먹었던 일이 생각이 났다.   나폴리 피자라고 해서 들어 갔었다.   나폴리 피자는 10여년전 로마에 머믈 때 나폴리에 가서 먹고 맛 있어서 두번 갔던 생각이 나서 그 생각을 하고 그  집에 들어 갔던 것이다.

 

나폴리 본토에서 먹은 피자와는 비교가 되지 않겠지만 그런 대로 맛 있다고 생각해서 꿩 대신 닭이라고 그 알마또 대신 그 집을 찾아 가 보자고 했다.

 

거기서 택시를 타고 대학로에 갔다.   몇년전이지만 기억을 더듬어 그 집을 찾아냈다.

 

 

 

Di Matteo 란 집이었다.

그 때 주인장과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다.

 

 

 

루꼴라 피자와 와인을 시켰다.

 

 

 

점심을 먹고 대학로를 산책했다.   적당한 뮤지컬이나 연극을 볼까 생각해서 i 에 들어 갔다.  시간이 맞지 않는다.   그래서 대신  "학림다방" 에 들어 가 보기로 했다.

 

"학림다방"은 얼마전에 TV 에서 봤던가 기억에 떠 올랐다

 

대학로, 동숭동,  혜화동은 우리 둘에게는 추억의 옛 동네다.    (2007/06/27 - [일상, 단상/사랑, 운명, 인연] - 운명의 인연 ,   2007/07/02 - [일상, 단상/사랑, 운명, 인연] - 인연의 나선 궤적을 따라서  )

 

그리고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은 50년대 내가 다닌 문리대가 있던 곳이고 그 근방의 가게들은 다 익숙한 곳이다.    그런 가게나 다방은 다 사라졌지만 유일하게 같은 이름으로 남아 있는 곳이 "학림다방"이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학림다방이 문을 연 해가 1956년으로 나온다.

 

내가 문리대에 입학하던 해에 문을 연 것이다.

 

학림다방과 혜화동 로타리에 있던 "가나안· 다방은 내가 대학생 때 자주 갔던 곳이다.

 

학림다방은 내 한반 친구 L 군이 가기만 하면 Tosca 의 "별은 빛나고" 를 틀어 달라고 해서 우리가 가면 의례 주문을 하지 않아도 다방 레지는 "별은 빛나고"를 틀어줬다.   

 

그래서 "학림다방"은 내 기억속에는 "별은 빛나고" 와 연동되어 있다.

 

가나안 다방은 사라진 다방이지만 내 추억이 많이 서려 있다.  ( 2007/07/02 - [일상, 단상/사랑, 운명, 인연] - 인연의 나선 궤적을 따라서 ,  2014/12/17 - [이것저것/말, 글자, 중국어 ] - Things Old and New - 중국말 사전 앱 Pleco )

 

그래서 학림다방에 들어 가게 된 것이다.

 

내부는 옛 스럽게 꾸며 놨지만 60 여년전의 그 것들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식후식으로 아이스크림과 비엔나 커피를 마시고 다시 비를 맞으며 귀로에 나섰다.

 

여긴 143번이 대치사거리에서 온다.   그 버스를 타면 돌아 갈 수 있으려니 했는데 대학로에서는 강남행이 없었다.     그래서 마로니에 편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강남행 버스는 혜화동 로타리에서 탈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 버스를 올라 탔다.   버스는 창경궁과 종묘를 지나 을지로1가 를 신세계 백화점을 지나 남산 제3호 터널을 뚫고 간다.    잠원동을 지나 강남의 일대를 돌아 디니다 대치현대아파트역에 내리니 5시가 가까워졌다.

 

비 오는 날 오후의 긴 데이트가 끝났다.

       

 

 

 

학림다방은 최근의 TV 의 소개 탓인지 기다려야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우린 계단을 올라 다락같은 공간에 만들어 진 자리에 안내되었다.

 

 

 

다락 자리에서는 아래 홀과 주방이 잘 보인다

 

 

 

창밖 대학로는 여전히 가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이스 크림과 비엔나 커피

 

Posted by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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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천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7.02.27 21:55 신고

    비오는 날의 데이트, 참 멋있으십니다. 저도 다음에 대학로 나가면 학림다방에 꼭 들려봐야겠습니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