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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교수 간담회 2018

 

오늘이 스승의 날이다.   이 때 쯤 되면 서울대에서는 총장이 명예교수 간담회를 열어 학교의 현황을 보고하고 음대 졸업생이나 학생들의 공연도 보여 주고 점심도 낸다.

 

해마다 참석하지 못했지만  어제는 오랜만에 참석했다.    전에 교수회관이었던 건물을 리노베이션해서 컨벤션 센타라고 이름 지어 새로 내 놨다.   전 보다 훨씬 멋 있고 호화로웠다.

 

평균 수명이 늘어 나면서 명예교수 숫자도 만만치 않게 늘어 났다.   960명이라던가 이 번 가을 정년퇴직하는 교수가 가세하면 올해 1000 명을 넘을 것이란 명예교수 협의회 회장의 말이다.

 

현직교수의 거의 반에 육박하는숫자다.   작년 부터 내가 처음 부임해서 가르쳤던 1 학년생이 정년퇴임해서 명예교수 반열에 끼었으니 나는 명예교수 가운데에서도 꽤 연장자가 되었다.  

 

나 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도 아직 많이 살아 있긴 해도 관악 캠퍼스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이 컨벤션센터에까지 와서 참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어제 참가자중에서 내 또래가 가장 연장자였다.  나보다 더 연장자는 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나이가 꽤 들어 보여서 따져 보면 나와 비슷하거나 4,5 년 후배들이다.    다 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지만 난 내 나이로는 내가 젊어 보인다고 느끼니 자기도취증이 있나?

 

점심은 한식으로 갈비찜을 제외하고는 다 먹었다.  

 

50년대에 다닌 학교이고 60년대 말에 부임하여 21세기가 시작하던 해에 떠났으니 서울대학교는 내겐 고향집 같다.  

 

 

 

 

 

58년 전 내 대학 졸업사진 1959년 2월 쯤 될 것 같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이 된 옛 서울대 문리과 대학 캠퍼스에서 찍은 사진이다.

왼쪽 어깨위에 "대" 자가 보이는 뒷줄 왼쪽에서 네번 째 졸업생이 58년전 내 모습이다.

1970년 난 여기서 교수 생활을 시작했다.

관악캠퍼스로 이사 갈 때 까지 5년 남짓 이곳에서 연구하고 가르쳤다.

마로니에 공원엔 대학 본부 건물 하나만 남아 있고 옛 건물들은 다 사라졌다.

단지 남은 것은 마로니에 나무 몇 구루다.



출처:http://boris-satsol.tistory.com/1518[지구별에서-MyLifeStory]

 

 

 

간담회 순서와 점심 메뉴

 

 

 

음대 중창단의 공연

 

 

 

나시스트의 셀카

 

 

 

스페셜 죽

 

 

 

수삼 냉채 샐러드

 

 

 

곁반찬

 

 

 

삼색전유화

 

 

 

갈비찜

 

 

 

진지와 해물 된장

 

 

 

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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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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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협정이 조인되던 날

 

1953년 7월 27일 난 고 3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모든 고등학교와 대학에 "학도호국단" 이란 것을 만들어 교련을 받도록 하고 툭 하면 관제 데모에 동원했다.

 

전쟁고아나 마찬가지 신세가 된 난  혼자 대학진학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 날은 을지로 어느 학원에서 시사 영어 Time지 강좌를 청강하고 있었다. 

 

저녁 한 대여섯시쯤 되었던 것 같다.   갑자기 거리가 시끄러워져 강의를 듣다 말고 거리에 나갔었다.   신문 "호외"가 나왔던 것 같다.    그 중에는 미군을 위한 영자 신문도 섞여 있었다.    아직도 전쟁중이었으니까 서울시내에도 미군이 주둔한 곳이 많았다. 그래서 을지로 쯤 되는 거리에는 미군이 많이 눈에 띄였다.  그러니까 미군을 위한 영자 신문 "Stars and Stripes" 한국판이 호외로 거리의 미군 병사들을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영어를 읽는 한국사람들을 위해 호외를 돌렸는지 모른다. 

 

그 호외는 단 두 줄 두 단어 "TRUCE SIGNED" 가 전부였다.  뒷면에는 해설 기사가 있었겠지만 8절지의 한면만 보면 신문 전체가 단 두 단어였던 셈이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그런 크기의 신문 활자를 본 일이 없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그 때 그 신문의 다음날자 판이 나왔다. 

 

그 날 이후 65년이 흘렀다.  여러가지 이유로 휴전은 오늘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여전히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잔뜩 무장한 양측 군대가 대치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젊은이들은 여전히 군역의 멍에를 지고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며 휴전선을 지키고 있다.

 

공산주의의 종주국도 사라졌고 한국전쟁때 한반도에 들어와 우리 군대와 치열한 전쟁을 한 중국과도 평화로운 외교관계를 맺고 살고 있는데 동족인 북한과는 65년전과 마찬가지로 이를 들어내고 대치하고 있는 것이다.

 

며칠후면  그 휴전 협정을 조인했던 판문점에서 남북 정상이 만나 휴전을 종식시키는 길의 첫 발을 딛으려고 한다.   

 

그 두 사람 모두 1953년에는 이 세상에는 나오지도 않았던 사람들이다.   그러니 이 적대관계는 대물림한 것이다.

 

이 무슨 야릇한 한반도의 운명인가?

 

평화여 오라.     그리고 남북한 모두 함께 번영하는 길을 찾자.

 

 

 

 

1953년 7월 27일 저녁 대여섯시쯤 내가 본 호외의 앞면

 

 

 

이 건 그 다음날 조간

 

 

 

학도호국단은 여자고등학교도 예외가 아니었고

우리는 툭하면 "정(휴)전반대, 북진통일"의 관제 데모에 동원되었다.

정전을 반대한 이승만 정권은 정전회담에 참석도 하지 않고 조인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한국은 정전협정의 당사자도 아니다. 정전을 끝내고 종전을 선언하는 것은 미국의 몫이다.

그 때를 살지 않은 사람은 그 사실조차 잘 모를 것이다.

전에 샀던 "서울 타임캡슐을 열다" 에서 핸폰 스캐너로 스캔해 온 것이다

(그저께 MBC TV 를 보는데 "서울, 타임캡슐을 열다" 라는 표지 화면이 나오고  이어서 이승만 대통령의 취임식 장면,  옛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관제 데모 행렬을 하는 장면도 비추었다.  

출처: http://boris-satsol.tistory.com/337 [지구별에서-MyLifeStory])

 

 

 

 

Posted by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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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란교리서

일상, 단상 2018.04.20 20:58

화란교리서

 

80년초 내가 카토릭에 입교할 때쯤  엄청히 많은 종교 관련 서적을 읽었다.  카토릭 책 말고도 개신교 신학책도 많이 읽었다.   성당에서 만난 젊은이가 있었다.    캐토릭 신학대학을 다니다 중퇴하고 일반 회사를 다니는 젊은이었다.  어찌어찌하다 신학이야기를 했는데 그 때 읽고 있던 Harvy Cox 책 이야기를 하니까 깜짝 놀라하던 생각이 난다.  물리학 교수가 그런 신학책을 다 읽다니.. 하고.

 

종이책을 버리는 과정에서 종교관련 책도 다 쓸어 버렸다. Brittanica 가 폐지로 나갈 판이니 종교관련 책, 그것도 한글 아니면 대부분 영문책 복사본었던 그런 책이니 미련 없이 버렸다.(한글책은 쉽게 다시 구할 수 있고 해적판은 지니고 있는 것 자체가 꺼림직했다.)   아마도 신학대학 교재 아니면 참고서로 쓰이던 영어서적 복사판(해적판)이 버젓이 서점에서 팔릴 때였다.  영어책이라 해도 해적판은 값도 싸니까 책방에 가서는 이것 저것 서너권씩 사가지고 오면 금방 서가가 가득 메워졌다.

 

그런데 갑자기 생각난 것이 화란 교리서라는 카토릭 교리책이었다.  이 건 한글 번역판이었는데 누군가가 권해서 한 권 사서 읽었던 책이다.

 

이 건 가히 충격적인 책이었다.   카토릭교리서에 진화론이 나온다니..    그것도 진화론을 비판하기 위해서 인용한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의 근원을 되짚어 보는 서술에서 진화론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면서 인용한 것이다.   한국어로 번역되어 분도출판사에서 정식 출판된 교리서였다.

 

그런데 그 책도 정리할 때 함께 버렸던 같다.   찾을 수 없다.   

 

그책은 도미니꼬회 소속 네델란드 Nijmegen 대학 신학교수인 Edward Schillebeeckx 신부가 주 저자이고  Nijmegen 대학 신학교수 Piet Schoonenberg 가 공동 저자로 저술된 책이다.

 

이 책은 10여개의 나라 언어로 번역되어 100만부 이상 팔린 million seller가 되었다.

 

진화론의 본산인 분자생물학자가 진화론을 옹호하면서 카토릭 신앙을 고백한다고 해서 카토록 대상을 받는 시대(과학과 신앙)인 오늘에서 보더라도 진보적이랄 수 있는 책이었다.  그러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책이라 해도  당시(1966)에는 카토릭계에는 폭발적인 사건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위 인용글의 주인공인 Kenneth Miller 교수의 수상소식(과학과 신앙)을 듣고 그 때 읽었던 기억을 곱씹어 보고 싶어 책을 다시 살 수 있나 검색해 보아도 그 어디에도 파는 곳이 없었다.

 

이 책에는 진화론말고도 카토릭의 정통교리와는 다른 이야기들이 많아 끊임 없이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출판허가가 취소되기도 했다.  그 이후 이 책은 거의 금서에 가까운 처우를 받고 재출판은 고사하고 연구목적이 아니라면 쉽게 구해 보기 힘든 희귀본으로 사라진 것 같다.  여름마다 가는 암스테르담에서도 고서점에 가면 있을려나 했지만 내가 읽을 수 있는 영어번역판은 그런 곳에 있을 리 없었다.

 

기회가있으면 온라인에서 검색을 하곤 했지만 그 책의 해설이라든가 비판서 같은 종류이지 원서는 나오지 않았다.  

 

지난 제주 여행때 미국 아마존에서 헌 책이 하나 나온 것을 발견했다. 읽은 만한 상태라고 했고 값은 10불 미만이라 송료가 가장 낮은 방법으로 책을 주문했다.     제주도 여행을 끝내고 돌아 와 보니 그 희귀서가 집에 와 있었다.

 

어제는 그 책을 ebook화 했다.  책 자체가 낡아서 그 냥 읽으면 파손될 것 같기도 하고 또 활자가 작아서 읽을 수 없을 뿐 더러 아이패드로만 독서를 하는 요즘 내 독서습관으로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아마존에서 주문했다. 값은 $8.12 로 나왔는데 송료가 책값보다 더 들었다.

 

 

 

내가 구한 화란 교리서

최초엔 교황청에서 수정 명령을 내렸지만 책을 수정하는 대신 저자들은 수정명령을 받은 부분을 부록으로 뒤에 붙이는 방식으로 원 저작품을 그대로 유지했다.

 

 

 

책을 펼치자 마자 두 부분으로 갈라졌다.

ebook화하지 않으면 그대로는 읽을 수 없다.

 

 

 

조금씩 낙서도 보였다.

 

 

 

1966년에도 화란 교리서에 진화론을 수용했는데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창조과학을 믿는 박아무개 교수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http://boris-satsol.tistory.com/1555)

 

이 책을 돌이켜 보면 세상에는 반세기를 앞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황무지에 길을 내는 사람을 영어로는 trailblazer 라고 한다.   이 책의 주저자인  trailblazer Schillebeeckx 신부는 2009년에 95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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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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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창 - 내원 4일 째

 

등창은 등에 난 종기이기 때문에 본인에게는 완전한 사각지점(blind spot)다.   궁금증이 많은 나는 보호자인 아내에게 사잔을 찍어 달라고 했다.   나중에 보기 위해서였다.

 

등에서 느끼는 촉간만으로 의사가 시술하는 것을 상상했는데 그것은 확실히 눈으로 보는 것과 달랐다.

 

내원 4일째인 오늘은 더 이상 고름을 뽑아내지 않았다.  대신 푸른색 거즈를 뽑아 내고 그 속에서 끝이 둥글뭉특한 금속봉으로 고름을 긁어 내는 대신 붉은 색의 소독약을 상당히 많이 주입하고 씻어내고 다시 새 푸른 색 거즈를 삽입했다.

 

절개된 구멍안은 엄청히 큰 공간이 생성되어 있는 듯 했다.  사진으로 봐서 5cc 쯤 되는 소독액을 여러 방향으로 주입하고 흘려 냈다고 한다,  적어도 한번에 5cc 넘는 소독액을 주입해서 씻어 내기를 5번 이상 했다고 한다.  아마 일자로 절개한 구멍안이 꽤 넓은 것 같다.

 

마지막으로 푸른 거즈띠를 2cm 정도 일자 절개 구멍에 금속 봉으로 밀어 넣어 유착되어 막히는 것을 막고 거즈를 통해 소독액과 고름 찌거기가 스며 나오게 조치했다. 그리고 그 위에 높은 흰 거즈층을 만들고 테입으로 고정시켰다.   나중에 간호사가 그 목적은 등으로 누우면 거즈층이 등창 부위를 압박해서 고름을 푸른 거즈로 빼어 내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사실은 등창부위가 아팠기 때문에 바로 눕지 못하고 업드리거나 옆으로 누어 잤는데 그거 아니었던 것이다.

 

 

 

 

등창 치료를 받은 강남 세브란스병원 피부과

 

 

 

시술하기 전 상태

 

 

 

붉으스로한 소독액

세척겸 소독이라는 것 같다.

그 것이 고름과 셖여서

높게 쌓아 붙인 거즈에 새어 나오는 것 같다.

 

 

 

한번에 5cc 는 넘게 주사기를 써서 일자형 절개 구멍 속에 주입했다.

 

 

 

계속 주입

 

 

 

또 다른 각도로 주입

 

 

 

또 다른 각도

 

 

 

마지막으로 절개된 일자구멍에 푸른 색 두꺼운 거즈를 바세린 갈은 것을 발라 쇠꼬챙이로 밀어 넣었다.

 

 

시술이 끝나고 주사실에 가서 항생제 주사를 맞았다.

 

이젠 매일 오지 않고 하루 건너 내원하라고 한다.   더 이상 긁어 낼 고름은 없고 아무는 과정을 관찰할 것 같다.

 

현대의학중에서 외과술이 가장 효과적이고 빠른 치료법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수긍이 간다.

 

마취, 항생제 멸균 소독등 시술도구등이 사람을 살린다.   조선왕들이 무서워 했던 그 등창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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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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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후학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8.04.13 16:31 신고

    쾌차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8.04.14 12:56

    비밀댓글입니다

  3. 수문장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8.04.17 08:32 신고

    고생이시네요.
    잘 치료 받으시고 쾌차하시기를 바랍니다.

  4. 시루뫼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8.04.26 17:39 신고

    건강하세요. 오늘 우연히 뭘 찾다가... 우연히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배울 것이 많아서 자주 찿아서 읽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등창이 재발

 

등창이 무서운 병이란 걸 실감했다.

 

3월 20일(2018) 동네의원에 가서 바늘로 찔러 고름을 짜면서 항생제를 주사맞고 일주일 다녔더니 차도가 있었다  (2018/03/28 - [일상, 단상/노년, 건강] - 등창

 

그러나 매일 항생제 맞는 것이 부담이되어 1주일후엔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집에서 섭생을 했다.  조금씩 나아지는 느낌이라 마음을 놓고 아무 등받이지도 하지 않고 잤더니 환부가 압박이 되어 혈액순환이 원활하지 않았는지 다시 곪았다.

 

2주후인 어제 (4월8일)는 다시 통증도 나타나고 오늘 아침에 환부를 사진 찍어 보니 다시 고름이 생긴 것을 알 수 있었다. 

 

동네 병원(가정의)에서의 치료에는 한계가 있어 전문 병원을 가야하는데 마땅히 찾아 갈 병원을 알 수 없다.  아무래도 외과에서 칼로 절개하고 괴사한 내피부세포를 제거해야 회복이 빠르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어 1차 진료 외과를 찾으려 했으나 마땅한 곳이 없었다. 

 

또 칼을 대는 것은 마취와  감염등 위험요소가 많아 상급병원에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3차병원은 1,2차의원의 진료 의뢰가 있거나 뭔가 이유를 대야 하고 또 설혹 예약에 되어도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 망설여진다.

 

강남역 근방에 외과 1차진료 병원이 있어 등창진료를 문의했더니 당장 종합병원 응급실로 가라고 권고 한다.

 

그래서 제일 가까운 강남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에 갔다.

 

응급실은 일단 입원을 전제하기때문에 기본이 7만원이다.

 

혈액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수액을 맞고 있으려니 외과 의사와 피부과 의사가 다녀 갔다.  피부과로 올라가서 째고 고름(괴사한 세포 포함)을 긁어 냈다.   국부 피부 마취를 하고 속을 긁어 냈다.  그 금속 도구가 덜 마취된 부위에 닿을 땐 통증을 준다.  그래도 동네의원에서 마취 없이 손으로 눌러 짤 때 보단 덜 아팠다.

 

또 항생제 주사를 맞고 3일분의 항생제와 진통제를 처방 받아 경구 투입약을 사가지고 돌아 왔다.

 

등창이 심해지면 피부괴양이 생기고 욕창이 된다.  그 염증이 패혈증(혈액의 감염)까지일으키면 온 몸으로 염증이 퍼져 사망에 까지 이르게 된다.    조선왕들중에 이렇게 등창으로 목숨을 잃은 이들이 몇몇 있었던 것 같다. 

 

등창을 가벼이 볼 수 없는 이유다.  

 

 

 

 

병원에 가기 전에 찍어 둔 사진

 

 

  

길이 약 1cm 정도를 자르고 금속 도구로 고름과 죽은 피부 세포를 긁어 내고

그 속에 거즈와 액체(무슨 액체인지 모르지만) 를 주입했다. 

거즈(gauze)의 일부를 밖으로 내어 놨다. 내일 속을 다시 검사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샆다.

 

 

응급실에 돌아와 초진한 의사가 조치결과를 기록하기 위하여 드레싱 거제(바깥)를 제거하고 사진을 찍을 때 나를 따라 온 보호자도 함께 찍었다.   내가  뭐던지 궁금해 하는 것을 잘 아는 보호자가 알아 차리고 찍어 준 것이다.

 

여기에 이어서 진행상황을 기록하기로 했다.

 

PS 4월 10일

 

 

4월 10일 강남세브란스에 다시 가 피부과에서 치료를 받았다.

고름을 짜기 위해 거즈를 뽑았을 때 찍은 사진

화농이 심해서 며칠 계속 다니면서 고름을 짜야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거즈를 제거한 다음 고름을 짜고 다시 거즈를 삽입했다.

거즈를 삽입한 이유를 알았다. 절개한 틈이 아물어  유착하는 것을 방지하고

거즈에 고름을 흡착시켜 제거할 목적이었던 같다.

마취를 안하고 고름을 짜겠다고 하기에 펄쩍 뛰었다.

마취를 하고 고름을 짰다.  그래도 일부 마취가 안된 곳은 아팠다.

마취비는 환자부담이 25000원 정도 된다. 그것이  1주일이 될지 열흘이 될지 알 수 없으니까

마취비부담도 만만치 않다.   그래서 마취를 않고 짜겠다고 한 것 같다.

마취비까지 55000원을 내고 왔다.

3차진료기관이라 비싸기는 비싸다.

 

고름이란 침입한 균과 균과 싸우다 죽은 백혈구의 사체와 괴사한 피부세포조각과 혈청등이 뒤섞인 탁한 액체인데 이것을 제거해야지 상처가 아물지 그냥 끼고 있으면 계속 화농이 지속된다.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계속 짜내야 한다.

 

조선시대 같았다면 난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국민의 평균수명이 갑자기 늘어 난 이유를 절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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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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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천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8.04.10 20:20 신고

    등창이 생각보다 무서운 병이군요. 이번에는 완치될 때까지 꾸준히 치료하셔야 되겠습니다. 얼른 쾌차하시길 빕니다..

  2. 수문장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8.04.17 08:35 신고

    잘 지내시나 궁금해서 들어왔습니다.
    3차 진료기관으로 가시기를 잘 하셨습니다...

도시까치의 집 - 내 옥상에서 가져간 건축자재

 

제주도 여행에서 돌아와 옥상정원을 보면 뭔가 허술하고 많이 빠진 듯한 느낌이 난다.   내가 자주 쫓아 내던 까치가 옥상의 나무에서 꺾어 가져간 가지를 가지고 둥지를 튼 것 같다.

 

우리집 옥상 정원에 자주 와서 똥을 싸고 가서 늘 어디에서 사는 새인가 궁금했는데 코니의 침실 바로 창밖 2,3 미터 떨어진 전주위에 둥지를 지어 놨다.   한전에 연락했는데 알을 까고 새끼가 자라서 나가면 빈 둥지를 치우겠다고 한다.

 

까치가 정원을 해치는 것은 아니지만 날아 갈 때 배설하고 가기 때문에 그게 싫어서 쫓아 내지만 당할 수 없다.   같이 살아야 한다.

 

도시까치가 어디에서 사나 하는 궁금증은 풀렸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까치의 지능은 6살 정도의 아이의 지능을 가졌다 한다.  포유류 빼고는 "거울"속의 이미지가 자신이란 것을 아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한다.    

 

존중해 주어야 하겠다.

 

그리고 나무가지 꺾어 간 것도 무혐의 처분하기로 했다.  대기에서 탄산가스를 마시고 햇볕을 보고 자란 나무를 내 것이라 우기는 것도 나무의 "공개념" 에 위배하는 주장이 아닐까 싶어서였다.

 

 

 

 

 

 

둥지엔 두 마리가 산다.  아마도 암수 한 쌍일 것이다.

한마리의 꼬리만 보인다.

 

 

 

옥상 얼개를 덮었던 나무가 엉성해졌다.

가만히 보니까 가느다란 연한 가지만 꺾어 간 것 같다.

 

 

 

건축재와 둥지가 가까우니 집짓기 쉬었을 것이다.

이 것도 이 새가 약아서 그랬을 것이다.

 

 

 

까치는 거울에 비친 새가 자신이라는 것을 아는 포유류밖의 종으로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한다.

 

 

Posted by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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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천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8.03.28 20:57 신고

    나뭇가지 가져간건 무혐의처분이 되지만, 배설물은 유죄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ㅎ
    (제 집이 아파트 5층인데 난간에 걸린 에어컨실외기에 새 배설물이 있어서 가끔 청소하느라..)

    • 샛솔  댓글주소 수정/삭제 2018.03.29 16:31 신고

      새가 날기 전에 배설하는 습성은 진화과정에서 습득한 에너지효율을 높이기 위해 하는 행동이니 그것도 무혐의처분해야겠죠. ㅎㅎ

등창

 

조선왕들이 가장 무서워 했다는 등창이 나서 거의 한달 가까이 고생을 했다.

 

리모델링, 이사등의 스트레스로 면역력이 떨어진 틈에 화농이 심해져 결국 한 열흘 동네 의원에 다니며 째고 고름을 빼고 항생제를 맞고 항생제도 먹고 겨우 가라앉혔다.

 

오늘 아침에 셀카봉으로 등창을 찍어 보니 아직도 지름 한 3cm 부위가 자주색이다.  다 사라지려면 몇주 걸릴지 모른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나는 바로 누어 자는 잠버릇인데 등창으로 바로 눕지 못하니 잠을 설치는 것이었다.   그러잖아도 스틸녹스(졸피뎀)를 끊고 나서 잠들기가 힘든데 데 등창까지 더 하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몸이 정상이 아니었다.

 

열도 나고 몸살기까지 났다.  보통은 그냥 가라앉기를 기다리는데 견딜 수 없어 가까운 가정의학 의원에 가서 고름을 짠 것이다.   이틀은 너무 아파서 소리를 질렀는데 병원에서 어른이 소리지르는 것이 창피해서 사흘째 부터는 손수건을 입에 물고 이를 악물었다.

 

 

 

오늘 아침 셀카봉으로 찍은 등창

거울로는 볼 수가 없으니 셀카봉을 이용해서 등창의 진행을 관찰했었다.

셀카봉이 이런 때도 유용하게 쓰인다.

 

 등창이 아물지 않고 재발했다.

http://boris-satsol.tistory.com/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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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천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8.03.28 20:47 신고

    많이 나으신 상태인데도 크기가 저 정도이니 무척 고생하셨습니다. 얼른 쾌차하시길 빕니다.

구역질 나는 정치의 계절

 

또 다시 가장 혐오스런 정치의 계절이 왔다.  선거가 무슨 스포츠 게임이나 되는 듯 한가하게 613 지방선거 관전포인트 뭐니 하는 뉴스도 올라 오지만 미친개, 정치공작, 사냥개, 들개하면서 구역질 나는 말들을 하는 것을 듣자면 역겹다.  (6ㆍ13 지방선거 7대 관전 포인트)

 

미국의 2대 대통령 존 아담스처럼 정치가 진화해서 정치를 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가 (2017/04/24 - [이것저것/정치, 경제, 금융] - "내가 정치를 하는 이유") 생각해 보지만 그건 어림없는 소리고 정치는 날로 퇴화하고 있다.

 

정치가 퇴화하는 것은 퇴화라기 보다 기술문명의 진화에 정치가 따라 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Technology will make today’s government obsolete and that’s good )

 

정치는 산업혁명이 일어난 19세기 초반의 제도에서 별로 진화한 것이 없는데 사회는 이미 제2기계시대에서 제3 기계시대 AI-Robot 시대로 진입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도 말했다.  21세기에는 민주주의는 소멸된다.  왜냐하면 넘쳐나는 데이터를 정당이나 의회가 처리할 능력이 없기 때문다.

 

in the twenty-first century, democracy might decline and even disappear. As both the volume and speed of data increase, venerable institutions like elections, political parties and parliaments might become obsolete – not because they are unethical, but because they can’t process data efficiently enough.

Harari, Yuval Noah (2017-02-21). Homo Deus: A Brief History of Tomorrow (p. 373). HarperCollins. Kindle Edition.

 

지식과 데이터는 넘쳐 흐르는데 그것을 처리할 만한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고 지금의 정치인이라는 것은 그런 분야에 전혀 훈련받았거나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홍준표대표나 장제원대변인이 발악하듯 소리지르는 것을 보면 알만한 하다

 

앞에 인용한 글에서 그랬다.

 

Industrial age government, information age world

Already today, the private sector is deploying cutting-edge technology as soon as practicable while the public sector struggles to implement turn-of-the-century solutions to seemingly straightforward tasks.

 

산업혁명시대의 정부가 정보혁명시대에서 뭘 하려니 그 괴리가 점점 벌어지고 삐걱거리고 있는 것이다. 

 

JTBC 밀착카메라가 취재 보도하는 이 사회의 문제점들에 대해 해결해야 할 행정당국의 변명을 들어 보면 요즘은 돈(예산)이 없어서가 아니고  법령이 미비해서 손 쓰지 못한다는 경우가 더 많다은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 제도를 개선해야 하는데 그런 법령을 고치고 입법해야 하는 국회라는 것이 매일 한다는 것이  다음 선거에서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는가에만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기술이 지수함수적으로 발전하면 따라서 고쳐야 할 제도가 지수함수적으로 증가하는데 정부나 국회가 무얼 할 생각은 않고 툭하면 장외투쟁한다고 국회를 비워 놓고 나가기 일 수다.

 

정보 기술사회의 제일 큰 문제는  "실업" 즉 "일자리" 문제다.     정부는 "일자리"문제를 제1우선 순위로 두고 있지만 방향이 전혀 틀렸다.

 

영국의 공공기관의 일자리는 2030년이 되면  85만개가 없어진다는 Deloitte 와 Oxford 대학의 연구결과가 나왔다.  공공기관의 일자리엔 행정기관의 행정직과 학교 교사와 경찰등이 포함된다.

 

A 2016 study by Deloitte and Oxford University found that up to 850,000 jobs in the United Kingdom’s public sector could be lost as a result of automation by 2030, in administrative roles as well as jobs for teachers and police officers.



 

Government public servants such as police could be replaced by automation within 15 years. A police robot responds to a dangerous criminal incident in this still from the 2015 film Chappie, written and directed by Neill Blomkamp. (Handout) 

 

15년안에 경찰도 로보캅으로 대치된다.

2015년 영화 "Chappie" 중에서

 

그러니까 공무원이라고 안심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다.  그런데 현 정부는 일자리 창출이라고 공공부분의 일자리나 만들고 노조나 강화하자고 하니 10년이나 15년후엔 어떻게 하자는 계획인지 모른다.

 

자동차 산업만이 아니라 정부야 말로 파괴적 혁신이 무르익은 분야다. 

 

15년후면 나는 아마도 이 변화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지 모르지만 지금 막 사회에 진입하려는 젊은이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툭하면 철지난 이념타령이나 하는 "홍준표"나 "장제원"같은 “obsolete”한 무리들이 이 파괴적 혁신에 의해서 쫓겨 나는 것을 생전에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아니 어쩌면 생각보다 이 파괴가 더 빨리 올지 모른다.  빨리 와서 “obsolete하고 혐오스런 정치인들이 쓰레기장으로 떠 밀려 나가기를 학수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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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천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8.03.25 10:56 신고

    요즘의 추세로 보면 변화가 더 빨리 올 것 같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여성의 날과 미투

 

어제가 여성의 날이었다고 한다.  그런게 있는 줄도 몰랐다.  미투운동과 맞물려 여러가지 행사가 있었던 것 같다.

 

"여인"하면 가슴이 아프다.   난 왜 여성하면 가슴아프고 눈물이 날까? 

 

내가 내 생전 가까웠던 여성은 모두 비운의 여인들이었다.

 

내가 처음 가장 좋아했던 여성은 할머니였다.  내게 "귀먹어리 세 할멈" 이란 구전 동화를 불러 주시고 불러주셨던 그 할머니다.  (2014/04/08 - [일상, 단상/나의 가족, 가족사 ] - 세 귀머거리 할멈 이야기 - 내 할머니가 들려 주신 구전동화)

 

 

"내 할머니는 고종 계유 (윤 6월 13일) 생으로 족보에 기록되어 있어 추산해 보니 1873년에 태어 나셨다. 1943 경 돌아 가셨으니 한 70년 사신 것이다.   나하고는 8년동안 이 세상을 함께 지내셨는데 마지막은 오사카 집 이층 다다미방에 병환으로 누어 계셨다. 

 

병환나시기 전까지 내가 너댓살쯤 되었을 때 할머니는 내게 많은 한국의 구전 동화를 들려 주셨다.  할머니의 이야기 주머니는 엄청 컸다.   무진장의 이야기가 나왔다.  어머니는 자기는 얘기는 잘 못하는 데 할머니는 이야기도 많이 알고 이야기도 잘 하신다고 칭찬을 하곤 하셨다.

 

할머니는 우리와 아무 혈연이 없다.    익헌공 종가집은 증조할아버지때 혈손은 끊어지고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모두 그 윗대의 후손집에서 양자로 들어와 종가를 이어 왔다.   그런데 오사카에서 같이 산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3취로 첫번째 두번째 할머니가 모두 손 없이 돌아 가셨고  이 할머니도 할아버지와 얼마 살지 못하고 할아버지를 잃은 것이라고 한다. 마지막 이 할머니는 할아버지 사후 양아들인 아버지가 어머니로 모신 분이다.

 

파평 윤씨로 가난한 양반 집안이라는 것만 난 알고 있다.   어머니의 이야기로는 가난하니까 부자집 덕좀 보려고 나이 많은 할아버지에 3취로 시집 보냈다고 하셨다.   난 할어버지를 뵌 적도 없고 어머니 말씀으로 기억할 뿐이다.  할아버지 사후 아버지가 나이 많은 사촌의 빚보증을 섰다가 가산을 모든 날리고 말 그대로 우리집은 망했다.   할머니 친정은 덕은 보기는 커녕 나이많은 할아버지의 삼취로 보내서 자손도 못보았고 할머니는 할아버지 사후엔 집안이 망해서 일본으로 건너간 아버지의 부양으로 살다가 돌아 가신 조선조 말기의 비운의 여인이었다. "



출처: http://boris-satsol.tistory.com/1153?category=380860 [지구별에서-MyLifeStory]

 

내 어머니는 말할 것 없이 내겐 가장 소중하고 귀한 여인이었다.

 

한말에 태어나 가장 험난했던 조선 근대사를 몸으로 살다가셨다.   625때 6남매중 둘을 북쪽으로 보내 생이별을 했고 막내딸, 내겐 4살 터울의 손윗 누이는 생사도 모른다.   1997년 1월   그 막내딸에게 금비녀 하나와 지폐 20만원을 돌돌 말아 유언장과 함께 나에게 남기고 가셨다. (비극의 유산 --- 조선 근대사를 몸으로 살다 간 우리 어머니 ------- )

"유품을 정리하던 나는 어머니의 낯익은 필적을 발견합니다.  내가 씨애틀에 살 때 푸른 봉함엽서에  "... 보 거라"  로 시작하며 보내셨던 안부 편지.  글씨와 글씨가 이어지는 옛날 붓 글씨체로 세로 쓰기 했던 그 필적. 지폐 스무 장(이십만원)과 금비녀를 함께 쌌던 그 유서에는 "내가 K가 시집 갈 때 아무것도 못 해 줬는데 나중에 K를 보면 이것이라도 전해 주어라..."

언제 쓰신 유서인지 모릅니다.  아마도 교통사고 이전이라고 추측 됩니다.  어떻게 K 가 살아 있다고 생각 하셨을까?  그리고 시집갔다고 생각하셨을까?   나에게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입니다. 

조선 근대사의 비극을 몸으로 살다간 우리 어머니 창녕 성씨는 그 마지막 장을 마감하지 못한 채 떠나 갔습니다.   그 마지막 장을 나에게 남긴 채.

나는 생각합니다. 이 비극의 마지막 장을 내 생전에 보게 될는지.....  그리고 어머니의 비원을 이뤄 드릴 수 있을지.......
아 어머니...."


출처: http://boris-satsol.tistory.com/91 [지구별에서-MyLifeStory]

 

 

내 6남매중 위의 4남매는 나와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    우리 집안이 망하기 전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중에 세 누님은 내게 어머니 같은 분들이다.    첫째 누님은 내가 태평양전쟁때 오사카에 소카이(피난)와야 할 때 날 맡아 키워 주셨다.  그런데 625때 큰 매형은 1950년 가을 수복해 들어 온 국군뒤에 따라 온 서북청년단 같은 반공단체가 "치안대"라 자처하며 조금이라도 인공치하에서 나섰던 사람들을 마구 잡아다 폭행하고 죽이고 했다.   매형도 이 치안대라는 테러집단에 잡혀가 폭행당하고 결국 살해당했다.  이 누님은 남편의 시신도 찾치 못했다. 30대 중반에 과부가 되어 외로운 여생을 살다 기셨다.

 

두째 누님은 내가 대학을 다닐 때 돌봐 주셨고 내가 그 누님집에서 가정교사를 하면서 돈을 벌어 미국 유학을 갈 수 있었다.  그 누님이 가장 오래 사셨다. (두째 누님의 부고)

 

 내가 전에 쓴 "늙음은 더욱 아름다워라)의 주인공이다.

 

젊었을누님은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병상에 누워 있는 누님 또한 아름다왔습니다.  누님을625전쟁피난길에서 얼굴전체에화상을입어자국이아직도남아있습니다. 시대의모든땅의여인이그랬듯누님역시인고의생을살았습니다. 그럼에도여전히아름다운여인으로남아있는누님을나는송원스님이말한늙음의아름다움을생각해 봅니다 

 



출처: http://boris-satsol.tistory.com/87 [지구별에서-MyLifeStory]

 

"내가 좋아 했던 형수님은 형과 약혼했을 때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선화국민학교 전학을 도와 주셨다.  아버지가 하시다가 갑자기 알 수 없는 병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1946년경이다. 

 

그 형수님이야 말로 내가 좋아했던 여인중에서 가장 비극적 삶을 살다 가셨다.  결혼한지 5년이 채 안 되었을 때 625가 터졌고 형은 25살의 새 색시와 년년생 두 아들을 남겨 두고 인민군이 패주할 때 북으로 따라 갔다. 자발적이었는지 반 강제였는지 그 건 알 수 없다.

 

"14 후퇴로 서울이 다시 인민군치하에 돌아 왔을 때에도 형은 형수나 아들을 데리려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형수는 마냥 기다릴 수 없었다.   형이 안오면 자기가 아들 둘 데리고 남편을 찾으려 북으로 갈 결심을 한다.

 
 
어머니는 그 자랑스러워한 조선 갑반의 종부 답게 종부와 종손을 젊은 며느리의 손에만 맡길 수 없다는 생각으로 며느리와 손자 둘을 따라 월북을 결심한다.
 
 
 
나와 어머니에게는 행운이요 형수에겐 불운하게도 십리도 못가 미군의 폭격에 형수의 뒷굼치에 부상을 입는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뒤굼치가 아믈 때엔 이미 서울은 다시 미군과 국군이 들어 왔을 때였다.
 
 
 
이 사건이 아니었다면 중3인 어린 나이에 난 어머니와 생이별하는 전쟁고아가 될 번 했다.  

 
 
그 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형수는 끝내 독수 공방 외로은 삶을 살다 세상을 뜬 것이다.   이민 가서 살고 있는 두 아들이 있는 Los Angeles 에서 재작년에 한 많은 이 세상을 하직했다."
 

 

내가 은퇴하고 LA 에 자주 갔을 때  "데련님"에서 "서방님"으로 호칭이 바뀐 나에게 한국에서 이산가족 상봉이야기가 나올 때면 "서방님, 형님 소식 못 들으셨어요" 하곤 묻곤 했다.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가슴 아프다.

 

  출처: http://boris-satsol.tistory.com/1135 [지구별에서-MyLifeStory]

 

 

어머니의 비원의 대상인 K 누나는 나와 4살차이다.    오사카에서 태어난 6남매중에서도 같은 "세대"에 속한다.   위의 누님들이 어머니 같았다면 K누나는 내 진짜 동기같은 누나다.   손이 귀한 집에서 오시카에 와서도 또 딸을 낳았으니 어머니의 실망은 컸을 것이다.    그리고 막내로 내가 태어났으니 내가 얼마나 귀여움을 독차지 했을까는 상상이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얼마나 그 K누나에게 못되게 굴었을 까도 상상이 간다.  내가 국민학교에 들어 가 처음 여름방학을 맞았다. 한 달 방학동안을 팡팡 놀다 개학 하루전에 방학 숙제가 생각이 났던 것 같다.     난 울고불고 떼를 썼을 것이다.   내 한달 방학 숙제를 K누나가 대신 다 해 주었다.

 

그러니까 K 누나는 내 "밥"이었던 셈이다. K누나도 못된 동생이긴 해도 위의 4남매와는 달리 세대가 같은 나를 오사카에서 태어난 유일한 혈육 남매같은 의식이 있었을 지 모른다.  난 원남동의 셋째 누님집에 학교를 다녔고  K누나는 혜화동의 두째 누님집에서 가사를 도우며 살았다.  가끔 혜화동 두째 누님집에 가면 그 동안 생겼던 사탕 같은 것을 모았다가 날 주곤 했다.

 

625가 나자 인민군의 노력동원에 징발되어 나갔다 오곤 했다.   나가서 무슨 일을 하고 왔는지 알 수 없지만 서울대 부속병원이 가까이 었었으니 인민군 부상병을 치료하는 간호보조일 같은 걸 하지 않았나 추측할 뿐이다.     인민군의 패색이 짙어 가던 9월 어느날 노력동원이 끌려 나갔던 K누나는 끝내 집에 돌아 오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928 수복이 되고 세상은 또 한번 뒤집혔다.

 

"나중에 나는 이태씨가 쓴 다큐소설 "남부군"을 읽었습니다.  남쪽에 있던 인민군은 인천상륙으로 퇴로가 차단되어 지리산에 집결하여 남부군으로 재편합니다. 그리하여 몇 년간 빨치산으로 전쟁을 계속합니다.  우리에게는 "공비" 라 불리는 저주와 토벌이 대상이 되었던 빨치산이지요.   남과 북 모두에게 버림받아 끝내 소멸하고 만 남부군이었지요.  

거기에는 서울에서 간호 보조원으로 인민군을 따라 나선 한 처녀가 등장합니다.  열 아홉의 나이입니다.  K  누나가 인민군을 따라 나섰을 때 나이가 바로 열 아홉 살이었습니다.  이 처녀 역시 타의에 의하여 지리산 의 여자 빨치산이 되어 종래에는 피아골의 외로운 혼령으로 사라집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어쩌면 K 누나 였는지 모른다고요."



출처: http://boris-satsol.tistory.com/91 [지구별에서-MyLifeStory] 

 

은퇴후 어느 봄날 지리산 한화 호텔에 며칠 머믄 일이 있다.    그 때 그 아픈 이름의 피아골에 올라 가 본 일이 있다.

 

이데올로기란 이름으로 갈라져 싸운 그 전장의 골짜기, 그 날은 유난히 봄바람이 세차기 불었다.  몸을 가누기 힘든 세찬 바람이었다.

 

난 그 무서운 바람소리가 50여년전 피아골에서 스러져 간 젊은이들의 울부짖음 같이 들렸다.   

 

내 구원의 연인 아내도 자칫 비련의 주인공이 될 뻔 했었다.

 

1960년 말 미국 시애틀에서 아내를 만나 열애에 빠지고 마침내 결혼을 결정하고 서울의 양가에 알렸을 때 우리가 동성동본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결정적인 반대의 구실엔  더 심각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양가 모두에게 해당되고  우리들 자신에게도 미치는 심각한 결혼 장애 요인이었다.    우리는 동성 동본이었다.   우리는 모두 전주 이씨였다.  그러나 우리 모두 족보를 보면 나는 세종대왕의 23대 직계 후손이고 아내는 태조가 추존한 태조의 할아버지 때에서 갈라져 온 후손으로 27대에서 갈라진 동성동본이다.   

 

1960년 한국의 민법에는 동성동본 금혼이 규정되어 있었고 사회통념상으로도 결혼은 불가였다.   그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아내는 집안에서는 다른 이유를 더 대어 봐야 먹혀 들지 않으므로 동성동본을 들먹거리면서 한국에 오면 결혼신고도 할 수 없다고 위협을 하였다.

 

민법의 동성동본 금혼조항은  여성에게는 엄청난 불평등 조항이었다.  결혼은 하되 결혼신고가 되지 않으면 아내는 단순히 내연의 처가 될 뿐이다.   내가 맘을 달리 먹고 다른 여자와 다시 결혼한다 하여도 아무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다.  아이를 낳아도 내 호적에 입적시키면 "모"가 등재되지 않은 호적에선 자기 자식에 대한 친권을 주장할 아무 법적 근거가 없다.   삐뚤어진 문화와 몽매한 인습으로 한국에서 태어 난 여성들이 받는 갖가지 고통중의 하나였다.

 

이 조항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동성동본 결혼부부가 고통을 받았겠는가.  끝내 결혼을 반대하여 남자가 결혼을 무효화하는 순간 아내는 그냥 쫓겨 나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남자는 다른 여자와 버젓이 결혼해도 아내는 아무 주장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 한국의 민법 실정이었다.  

 

우리의 경우에 비추어 보면 우린 고려시대의 친척이었던 사람들의 후손인데도 한 왕조(조선조)가 서고 망한 20세기에서까지 결혼을 금하고 있는 민법이었던 셈이었다.  "

 



출처: http://boris-satsol.tistory.com/375 [지구별에서-MyLifeStory]

 

동성동본 금혼 조항을 개정하는 데 반 세기가 넘게 걸렸다.  

 

 

"그러나 상상해 보라 우리가 혜화동에서 만났다면 과연 우리는 백년 해로의 맺음에까지 이어졌겠는가.  그것은 비극의 인연으로 끝나 버렸을 것은 불 보듯 훤한 일이다.   설혹  어찌어찌 맺어졌다 하여도 우리들이 겪었을 고통과 시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맺어지기 보다도 못한 비극이었을 것이다."

출처: http://boris-satsol.tistory.com/375 [지구별에서-MyLifeStory]

 

 

이 글을 쓰면서 난 연신 눈물을 닦아 냈다.   특히 K누나를 회고하면 계속 눈물이 난다.  

 

왜 내 주변엔 슬픈 여인들 뿐인가?

 

아니 내 주변이 특별한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조선의 여인들이 아팠고 슬펐다.

 

"우리는 참으로 많은 왜곡된 인습에 의하여 상처 받고 고통을 당한다. 
우리나라의 여성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 어려서는 부모에 따르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따르고 늙어서는 자식 을 따르라고 가르친 옛 도덕율.
칠거지악이니 하여 여성의 자유를 억압하는 유교적 전통들에 의하여 우리 나라 여성은 한없이 구박 받고 속앓이 하였다. 
우리의 어머니 우리의 누나들이 또 아내와 딸들이 그런 대우 를 받은 것이다.  아직도 그 인습이 우리사회 구석구석에 남아 있다."

출처: http://boris-satsol.tistory.com/84 [지구별에서-MyLifeStory]  (인생, 만남, 부부)

 

오는 세상에서는 이 땅의 여성이 더 이상 아프고 슬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Posted by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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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ruprin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8.03.12 01:02 신고

    한 밤중에 읽다가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ㅠ ㅠ
    통일 보다 우선 남북간 이산가족들이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념, 경제와
    상관없이..가족끼리 생사도 모르고 지낸다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분들이 점점 연세가 들고 있기 때문에, 하루 빨리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부디 보리스님의 소원이 이뤄지길 바라겠습니다.
    보리스님, 코니님...일교차가 큽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바라겠습니다. (_ _)

    • 샛솔  댓글주소 수정/삭제 2018.03.12 12:01 신고

      감사합니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휴전이 된지 65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휴전상태라니 이 것은 너무 한 것입니다. 안타깝네요. 공감해 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2. 황성주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8.03.14 15:41 신고

    눈물이......

    소설보다, 영화보다 더한 비극이었군요.

  3. 히브리사람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8.03.17 14:37 신고

    탈북자인데, 교수님의 글을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저의 부친의 사촌누님도 해방전에 남쪽으로 시집간 후 38선이 막혀서 영영 만나지 못하고 생사도 모르고 살았다는 얘기를 북에 있을 때 들었습니다. 남쪽분들의 옛날 이야기를 들으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2017년을 보내며

 

83 번째 섯달그믐 날이다.  올해는 대그믐을 제주도 중문에서 보내고 있다.

 

어제   밤 늦게 중문 천제연로에 있늘 해리안 호텔에 도착했다.  묘하게 제주도에 오갈 때에는 날씨가 나쁘다.  작년 겨울 제주 여행을 마치고 돌아 갈 때에도 중산간도로를 넘어 갈 때 안개가 끼고 이슬비가 내려 몇10 미터도 앞이 안보이는 열악한 환경에서 운전을 해야 했다.

 

지난 늦가을 여행때에도 올 때와 갈 때 모두 비가 내렸다. 그런데 어제도 비 오는 밤에 평화로를 달려 제주공항에서 중문의 해리안 호텔에 왔다.  참으로 묘한 인연이다. 

 

다행한 것은 이 번 여행에서는 차를 모는 대신 항공편을 이용했기 때문에 제주공항에서 택시를 탔다.  그래서 내가 직접 운전을 하지 않아서 좋았다..

 

해가 넘어 간다는 것은 사람이 정한 달력 때문이지 지구가 공전과 자전을 해서 어떤 특정한 지점에 와 있기 때문은 아니다. 

 

내가 1960년 8월 22일 일부변경선을 넘었다고 내가 탔던  Northwest Airline 항공기의 기장이 서명한 증명서를 만들어 주는 등 법석을 떨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얼마나 하찮은 일이었던가 (2007/01/08 - [일상, 단상/잡문] - 1960년과 2007년).

 

일부변경선을 사람들이 날짜와 시간을 통일해서 쓰기 위해 만든 가공의 선이다. 

 

그러니까 섣달 그믐이란 것도 달력을 통일해서 쓰기 위해 정한 가공의 한 시점에 불과하다.  태양이나 지구의 특별한 위치가 아니다.

 

해가 넘어 갈 때엔 항상 다사다난했던 한해라고 호들갑을 떨지만 그렇지 않았던 해가 정말 있었던가? 

 

해가 지날 수록 기억이 약화되니까 가장 최근의 지난 해가 바로 강열하게 기억에 남아 가장 다사다난했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

 

북핵문제가 가장 큰 이슈였고 트럼프와 김정은의 기싸움이 우릴 불안하게 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날 것인가?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김정은은 결코 전쟁을 먼저 일으킬 것 같진 않다.    미국이란 나라는 믿을 수 없는 나라이고 막나가는 트럼프라 해도 한국을 패싱하고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 같다.    ( 나를 울렸던 국사책 , 필요하다면 쳐라 그리고 부숴라 - If Necessary, Strike and Destroy )

 

여기까지 쓰고 글을 끝내지 못한 채 해가 넘어갔다.  2018년 정월 초하룻날에 이어쓰고 있다.


어제(그믐날)는 202 번을 타고 이마트 서귀포점에 갔었고 오늘은 걸어서 바다다에 갔었다.  자난 내 생일에 사 먹은 새우버거가 맛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먹을 생각으로 간 것이다  (2017/11/27 - [국내여행기/제주도] - 82번째 생일 -2017-11-20 제주도 Vadada 카페 )

 

사람이 미어지게 많았는데 모히토 한잔식(알콜한잔 무알콜 한잔)을 시켜 마셨다.  알콜이 든 것이나 안 든 것이나 한잔에 만7천원 받는다.  그것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진동호출기로 부르면 가서 받아와야 한다.   앞 손님이 사용하고 남긴 네프킨 조차 치우지 않아서 우리가 테이블을 정리해야 했다.

 

아무리 인테리어가 좋고 바다경치가 좋다해도 이런 서비스로 모히토 한잔에 만7천원에 사 마시는 것은 가성비로 보면 갈 만한 곳이 아니다.    웬만한 고급호텔 칵테일 라운지 술값이다.  특이하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알려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몰리는 지 모르지만 이 건 너무 심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참을 만 했는데 여기 대표 음식메뉴로 메뉴판 제일 앞에 나와 있는 새우버거를 안판다고 한다.

 

사실은 칵테일은 이 새우버거를 먹기 위해서 식사전주로 마신 것이다.  그런데 막상 점심을 주문하려는데 그 메뉴는 제공할 수가 없단다.    새우재료가 없어서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가관이다.   새우를 대 주는 업자가 이틀을 쉬어서 새우가 없어서란다.   자기네 잘못이 아니라는 투다.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는지 모르지만 그렇다면 메뉴판에 써 넣어야 한다.  새우가 없을 때에는 새우버거를 제공할 수 없다고,

 

 작년 겨울 부산 "고옥"이란 히츠마부시 장어덮밥집에 헐레벌떡 시간 마춰 갔는데 재료가 떨어져 손님을 받을 수 없다고 허망하게 쫓겨 났던 일이 있었다. ( 2017/05/22 - [국내여행기/부산 영남] - 부산에서 )

 

기다려서 먹는다는 집쯤 되면 시건방지게 된다.   외국식당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설혹 실수로 시킨 메뉴가 아닌 것이 나왔다 던가 하면 정말 저자세로 사과를 하고 뭔가 보상을 해 준다.   칵테일 값을 받지 않는다든가 손님에게 보상을 해 준다.   그런 일도 별로 없지만 ...

 

그렇기 때문에 기억에 없는지 모른다.

 

하여간 정월 초하루부터 기분을 잡쳤다.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와 도담에서 이태리안 음식을 먹었다.

 


 

 

Adieu 2017  서울

 

종이 책의 반은 버렸다.

 

 

 

버리려고 내 놓은 책

건질 만한 것이 있을 지 모르지만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에 오지 않겠단다.

건축 폐기물과 함께 나갈 것이다.

 

 

 

이사짐이 나간 내 서재 2018년 2월 14일 돌아 가면 어떻게 변해 있으려나?

 

Happy New Year 2018

정월 초하루 제주도 이태리안 레스토랑 “도담”에서


 

 

도담에서

"바다다"의 모히토 두잔 값으로 맛 있는 점심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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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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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천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8.01.02 07:59 신고

    새해에도 두분 늘 건강하시고 매일매일 즐겁게 지내시길 소망합니다.

  2. 곰두마리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8.05.26 12:09 신고

    브롬톤 때문에 선생을 글을 보게되었습니다. 책을 버리실때는 뭔가 다음에 또 보게 될 줄도 모르고 후대들이 내메모라도 봐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죠?^^
    다음부터는 그냥버리시지 말고 업체에 맡겨서 스캔떠서 하드에 저장하시고 폐기하세요. 몇일이면 작업완료하고 폐기할까요라고 묻더군요. 웹하드에 올려 놓고 원하시는분둘과 공유해보네요. ㅎ 선생님의 보고는 오래가야 하니까요^^

    • 샛솔  댓글주소 수정/삭제 2018.05.27 09:29 신고

      구하기 어려운 중요한 책은 학부 도서실이나 기타 도서관에 다 기증했고 버릴 만한 책들만 버렸습니다. 그 나마 무료로 가져가라고 연락을 해도 엘리베이터가 없는 집에는 방문을 않겠답니다. 스캔할 만한 책은 스캔해 둡니다. 장비까지 다 구입해 놨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