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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질 앲는 생각들 본문

일상, 단상/사랑, 운명, 인연

부질 앲는 생각들

샛솔 2015. 2. 1. 23:10

부질 없는 생각들

 

 

 

아내를 만난 것은 1960 년 12 월 어느날이다.


그러나 우린 옛날에 이미 서로 알 수 있는 사이였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일 때 아내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혜화동의 매형의 두째 형님이 살던 공가에서 타이핑 연습을 할 때였다.  그 집에서 7촌 조카가 같은 고향(안양)의 반우와 자취를 했다.   그 둘 모두가 아내와 고등학교 한 반에 다니고 있었다. 


한 반에 다니던 아내가 7년후에 내 아내가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난 그 질녀를 시켜 불러 오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때는 우리 모두 정신적으로나 법적으로 미성년자였지만 신체적으로는 남자고 여자였다.    내가 신체적으로 남자임을 안 것이 고1 때였고  아내도 중3이나 고1 때 초경을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고3인 난 고1인 아내와는 결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 부모시대엔 훨씬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린 나이에 혼인을 했고 합방을 한 것은 몇년 후라고 들었다.  큰 누나가 태어 난 것은 아버지가 17 살 때였고  3년 연상인 어머니가 20 살 때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합방을 한 것은 아버지가 16이나 17살 때 였을 것이다. 


내 경험으로 비추어 보건데 아버지도 남자가 된 것은 16이나 17살 때였을 것이다.  남자가 되자마자 아니 합방을 한 이후에 남자가 되었을 수도 있다.  손이 귀한 집에서 빨리 자손을 보기 위해 일찍 합방을 시켰을 것이다.  


어머니는 예뻣기 때문에 누나같은 예쁜 색시와 잠자리를 하는 것은 즐거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의 아버지의 유필에는 어머니에 대한 언급도 없고 이미 년년생으로 두 딸을 둔 아버지로서의 언급도 없다.   아마도 부끄러워서 그런 감상을 글로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큰 누님과 두째 누님은 연년생으로 아버지가 17, 18살에 생산한 셈이다.   양자 양자로 대를 이어 오던 익헌공 종손가에서 종손을 빨리 생산해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달리 생각하면 아버지는 종마와 같았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단지 자손을 보기 위해 잠자리를 했을까?


 
사람만이 유일하게 생산과 무관하게 남녀가 잠자리를 한다는 것이다.    진화생물학적으로 보면 그것은 자식을 성년까지 키우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완전한 성인이 되는데에는 20년이 걸린다.  20년까지 자식을 키우려면 부모가 최소한 20년 붙어 있어야 한다.  

 

편모나 편부가 자식을 키우는 유전자는 도태되었을 것이다.    20년 그 안에 또 생산을 하면 여자의 가임기간이 끝나는 4,50 까지 부모가 함께 살아야 한다.    그 방편은 부모에게 남녀 잠자리의 즐거움을 주어야 했던 것이다.   원시시대에 부모를 묶어 두는 방편은 잠자리의 즐거움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 유전자가 살아 남았던 것이다.

 

아무리 사람이  생산과 무관하게 잠지리를 즐긴다 해다 그 기간도 언젠가는 신체적으로 불가능해 질 수 있다.   미국사람들의 문화에서는 키쓰가 애정의 표현이고 수시로 입맞춤을 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그것조차 할 수 없거나 힘들어 질 때가 있다.   언젠가 미국 노부부는 잠자리 인사로 키쓰를 실제로는 하지 않고 말로만 "키스 한걸로 해요."(Consider be kissed) 라는 말로 대신한다고 읽은 일이 있다.

 

우리 시대엔 조혼의 풍습은 없어졌고 남자는 20 살 중반 여자는 20살 초반에 결혼을 했다.    여자의 경우 고등학교 학력은 꽤 높은 편이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2,3 년 후면 결혼을 했다.    남자의 경우에도 대학에 간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고 대학 졸업후라면 몇년안에 결혼을 했다.  대학에 다닐 때 결혼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내 동기 하나도 대학 다닐 때 결혼을 했다.  

 

우리가 고3이고 고1일 때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해도 결혼을 한다거나 잠자리를 같이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7년후에 만나서 결혼할 운명의 상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면 어땠을가 부질없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가 결혼한 때는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와서 대학원 1년때이고 아내도 대학을 졸업한 해에 미국에 와서 그 이듬해 결혼을 했다.  당시의  한국사화의 기준으로는 이른 편도 아니고 늦은 편도 아니다.   


미국의 학생들도 대학원생이면 반 이상 결혼을 했다.  나와 함꼐 조교(TA) 를 한 동료 학생들도 1/3 은 결혼을 했다.  나와 한 연구실을 썼던 친구는 아들도 하나 뒀다.     TA 급여도 부부가 근근히 생활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당시 UW(Seattle)의 경우 결혼한 학생용 아파트나 단독주택 임대료는 매우 쌌기 때문에 주거비도 큰 걱정이 아니었다. 


아내가 알바를 하거나 직장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도 첫 두해는 긴축으로 살았지만 2년후 아내가 석사과정을 마치고 극동학과 도서실의 한국학 사서가 되면서 풍족한 결혼생활을 했다.

 

 

 

 

대학원생 신혼 시절

 

 

 

Far Eastern 학과 한국학 사서시절의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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