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별에서 - Things Old and New :: 비극의 유산 --- 조선 근대사를 몸으로 살다 간 우리 어머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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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유산 -- 조선 근대사를 몸으로 살다 간 어머니
 


비극의 유산 

--- 조선 근대사를 몸으로 살다 간 어머니 -------

어머니는 조선 근대사를 몸으로 살다 간 사람이었습니다. 19세기 한말의 가난한 양반가에서 태어난 어머니는 집에서 언문은 깨쳤지만 그 이상의 교육은 없었지요. 큰 외삼촌은 독립운동을 한다고 뛰쳐 나갔다가  1920년대 미국을 휩쓴 독감에 걸려 샌프란시스코에서 불귀의 객이 되었습니다.  해방 후 어머니는 한참 영화를 누리던 "이기붕"씨와 함께 찍은 외삼촌의 사진을 꺼내 보며 못내 아쉬워 하셨지요. 

어머니는 세살 아래 아버지에게 시집을 갔고 아들 하나 딸 셋을 낳았습니다. 아버지는 나이 많은 사촌에  보증을 잘못 서 준 탓에 가산을 하루 아침에 모두 날리고 야반 도주하다시피 일본으로 건너 갔습니다.    어머니는  4 남매를 다리고 친정이 있는 충남 당진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러나 기둥뿌리가 뽑힌 외가는 그야 말로 쇠락 일로의 길을 걷고 있었으니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답니다.  

한동안 소식이 끊겼던 아버지에게서 소식이 온 것은 몇 년 후 였답니다. 어찌 어찌  자리 잡은  아버지는  생활비와 양육비를 보내기 시작했답니다.   그러나 두 분이 재회한 것은 생이별을 한지 십 여년 만이었습니다.  4 남매를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어머니는 거기에서 네 살 터울의 남매를 낳았는데 내가 바로 그 막내였습니다.   

내가 초등(국민)학교에 들어 가자 태평양 전쟁이 일어 났고 일본의 도시들은 미국 장거리 폭격기의 폭격 대상이 되었습니다.  도시의 어린이들을 모두 피난 시키는 계획이 수립되었습니다. 시골에 연고가 없는 어린이는  일본 정부가 세운 피난(소개)계획으로 일본의 농촌에 나누어 보내지게 되었습니다.  나도 그 예행 연습으로 일본의 시골에서 며칠 밤을 지낸 일이 있습니다.  조선사람인지 모르는 시골 사람들은 나에게 무척  친절했습니다.  젊은이들은 모두 전쟁터에 나갔고 남아 있던 시골 누나들은 도시에서 온 "봇짱"(귀동이)을  여간 귀여워 해 주지 않았지요. 

아버지는 아들을 아무  연고가 없는 일본 시골에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어차피 조선사람으로 알려지면  그 차별과 멸시를 받게 될 터이니깐요.  그러나 고국에는 친 외가를 막론하고 가까운 친척이 없었지요.  있다면 이미 장성하여 조선으로 출가한 위의 두 딸과 그 사돈집뿐이었습니다.  나는 그 한 집에 보내졌답니다 .  
관부 연락선을 타고 부산에 내려 게이조(경성=서울) 행 완행열차를 탔습니다. 밤 열차였던 것 같아요.  내가  어머니 무릎에서 깨어났을 때 기차는 추풍령쯤 지나 갔을 겁니다.  내 뇌리에 아직도 남아 있는 조선 땅의  첫 인상은 흙이 빨갛다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의 황토를 처음 본 것입니다.  오사카의 흙은 검은 회색 이었습니다.  일본의 시골에서도 황토를 본 기억이 없습니다.  "아래, 쯔찌가 아까이(아! 흙이 빨개)"  조선말 을 잘 못하는 나는 일본말로 탄성을 질렀지요.

나는 시집살이를 하는 큰 누님 사돈댁에 맡겨지고 어머니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 갔습니다. 초등학교를 갓 들어간 어린 막내를 사돈집에 남겨 놓고 떠나는 어머니의 심정은 오죽 했겠습니까?   일본에는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일본에서 태어난 바로 위 누나인 K 셋만 남았습니다.  또 하나의 누님은 동경에 시집가서 살고 형은  동경의 한 명문 대에 유학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은 점점 일본의 불리한 쪽으로 흘러가고 급기야 공업도시 오사카는 미군의 폭격의 일차 목표가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근 삼년 어머니와 나는 헤어져 살았습니다. 전쟁이 끝날 지음에는  일본과 조선 사이에는 우편조차 순조롭지 않았지요. 해방 전후 한 반 년은 서로의 소식조차 끊어졌답니다.  폭격의 소식은 뉴스를 통하여 들려 오지만 생사도 모르는 채 나는 어머니를 기다리며 살았답니다. 

오사카는 미군이 처음 개발한 소이탄의 융단 폭격으로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고 살던 집도 타 버렸습니다.  목숨 건진 것으로 만족해야 했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어린 누나가 어머니와 아버지를 살렸다고  했습니다.  대공습의 와중에서 우왕좌왕하는데 어디서 들리는 딸의 목소리는 "여기에요 ,여기에요" 라고 일본말로 외치 더랍니다.   소리 나는 것으로 달려와 방공호에 대피하는데 이어서 떨어지는 소이탄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 있던 그 자리를 불바다로 만들었답니다.  어머니는 가끔 그 공포의 순간을 회상하면서 "우리는  K가 아니었다면 다 죽었어"  하고 K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시곤 하였지요.   

전쟁이 끝나고 얼마 안 있어 나는 3년 만에 어머니를 만납니다.  전쟁의 잿더미에서 몸만 살아 귀국한 것입니다. 모자는 부등껴 안고 울었지요.  

우리집의 불행은 이어집니다. 귀국한지 반년도 안되어 아버지는 발병하여 일주일을 앓다 세상을 떠납니다 .  해방 후 혼란한 조선 사회에서 오갈 때 없는 귀국 동포는 치료는 고사하고 제대로 진단 조차 못 받아 사인도 모르는 채 한 많은 세상을 하직했습니다.   나이 쉰이 채 안 되었었지요. 

한편 동경 유학 중이던 큰 아들은 조선사람 까지 징병이다 학병이다 잡혀 가는 일제 말기의 발악을 피해 여기 저기 피신하다 결국은 학병으로 잡혀가 있다가 해방 후 귀국하여 아버지의 대를 이어 가장이 됩니다.    그러나 평탄한 생활은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결혼하고 두 아들까지 두었지만 이상주의자였던 형은 동경 유학시절부터 좌경화 되었던 것입니다.  남노당에 가입했던 형은 검거, 투옥, 회유, 검거 등 이어지는 악순환에서 나는 이곳 저곳 옮겨져 살았답니다. 

625가 터지면서 비극은 크라이막스에 치닫습니다.  형은 형수와 어린 두 아들을 뒤에 두고 단신 월북합니다.  나 중에 데려갈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타의에 의하여 납북되였는지 그간의 사정은 알 수 없습니다.   928 수복  직전에 북에서 매형에게 띄운 형의 간단한 엽서를 나는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스러운 환경에서 쓴 내용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월북가족이 있는 남한의 가족은 의심의 눈초리를 항상 받았고  사회와 국가가 주는 알고 모르는 불이익도 적지 않았지요. 나에게도 신원조회를 의뢰하면 중앙정보부에서 돌아오는 회신에는 "특이사항"이 붙어 다니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여권 발급이 보류되거나 지연되기가 일수였답니다.   형이 아니라 아버지를 월북자로 둔  조카들은 어떻겠습니까?   작은 조카는 ROTC 과정을 훌륭히 마쳤지만 장교임관이 거부되었습니다. 예의 "특이사항" 때문이었지요.  그들은 모두 고국을 등지고 이민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다 독수공방  생과부로 평생을 지낸 형수까지 모셔가고 말았지요.  이제는 형의 피붙이는 한국 땅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어머니가 항상 자랑스러워 하던  세종대왕의 직계 후손이요, 조선 갑반, 숙종때 좌의정을 지냈고 해동 명신록에도 올라있는 익헌공의 종손가는 대가 끊기고  말았지요. 

어머니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어요.  625 동란 때 서울의 누님 집에 있던 막내 딸, K, 나에게는 네  살 위의 누나가 인민군을 따라나가 행방불명이 된 것입니다.  형의 영향으로 좌경화 되었는지 아니면 신상의 불행에 대한 항거였는지 모릅니다.  몇번 자원 봉사자로 인민군을 따라 나섰는데  완전히 집을 나가고  말았습니다.    그 후 살았는지 죽었는지 월북했는지 아무 것도 알 수 없습니다.   

나중에 나는 이태씨가 쓴 다큐소설 "남부군"을 읽었습니다.  남쪽에 있던 인민군은 인천상륙으로 퇴로가 차단되어 지리산에 집결하여 남부군으로 재편합니다. 그리하여 몇 년간 빨치산으로 전쟁을 계속합니다.  우리에게는 "공비" 라 불리는 저주와 토벌이 대상이 되었던 빨치산이지요.   남과 북 모두에게 버림받아 끝내 소멸하고 만 남부군이었지요.  

거기에는 서울에서 간호 보조원으로 인민군을 따라 나선 한 처녀가 등장합니다.  열 아홉의 나이입니다.  K  누나가 인민군을 따라 나섰을 때 나이가 바로 열 아홉 살이었습니다.  이 처녀 역시 타의에 의하여 지리산 의 여자 빨치산이 되어 종래에는 피아골의 외로운 혼령으로 사라집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어쩌면 K 누나 였는지 모른다고요.

80 년대 교통사고를 당한 어머니는 그 후유증으로 몸 져 누으십니다. 개문 발차하는 뻐스에서 추락하여 뇌진탕을 일으켰어요.  그로 인해 치매 현상까지 일으키며 4년 가까이 안타까운 투병 생활을 합니다.  1987년  정월 어느 추운 겨울날 어머니는 끝내 한 많은 이 세상을 하직합니다.

유품을 정리하던 나는 어머니의 낯익은 필적을 발견합니다.  내가 씨애틀에 살 때 푸른 봉함엽서에  "... 보 거라"  로 시작하며 보내셨던 안부 편지.  글씨와 글씨가 이어지는 옛날 붓 글씨체로 세로 쓰기 했던 그 필적. 지폐 스무 장(이십만원)과 금비녀를 함께 쌌던 그 유서에는 "내가 K가 시집 갈 때 아무것도 못 해 줬는데 나중에 K를 보면 이것이라도 전해 주어라..."

언제 쓰신 유서인지 모릅니다.  아마도 교통사고 이전이라고 추측 됩니다.  어떻게 K 가 살아 있다고 생각 하셨을까?  그리고 시집갔다고 생각하셨을까?   나에게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입니다. 

조선 근대사의 비극을 몸으로 살다간 우리 어머니 창녕 성씨는 그 마지막 장을 마감하지 못한 채 떠나 갔습니다.   그 마지막 장을 나에게 남긴 채.

나는 생각합니다. 이 비극의 마지막 장을 내 생전에 보게 될는지.....  그리고 어머니의 비원을 이뤄 드릴 수 있을지.......
아 어머니....

 

 

 

1970년대 어머니

서울대 자연대 물리학과와 화학과 사이의 잔디밭에서

 

 




Posted by Satsol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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