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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가와(安治川) 바다밑에 수몰된 내 유년시절의 족적 본문

해외여행기/일본 오사카2012

아지가와(安治川) 바다밑에 수몰된 내 유년시절의 족적

샛솔 2012. 4. 26. 12:10

아지가와(安治川) 바다밑에 수몰된 내 유년시절의 족적

 

내가 태어 난 곳은 오사카시 코노하나꾸 시칸지마 시라도리쵸 1 반찌(大阪市 此花區 四貫島 白鳥町 1 番地) 로 되어 있다.   내 호적에 그렇게 적혀 있다.   

 

그러나  그곳이 어디인지 잘 모르고 내 기억에도 그 곳은 없다.   어쪄면 내가 낳자마지 내가 기억하는 유년 시절의 이시다소토무라쵸(石田外村町)로 이사를 온 것 같다.   이시다쵸의 집은 집의 구조까지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유년시절의 기억들이 많이 남아 있다.

 

내가 초등학교(전쟁이 시작한 그 당시는 모두 국민학교로 개칭이 되었다)에 들어 간 해가 지금으로 부터 정확히 70년 전이다.     그 학교 이름이 <미나토야고꾸민각꼬(湊屋國民學校)>다.    1942년 4월 18일 찍은 입학기념사진이 남아 있다.     그 뒷면에 선친이 쓴 촬영날짜가 적혀 있다.  

 

내가 이 학교에 들어가고 3학년에 진급한지 얼마 안된 1944년 초 여름 임박한 미군의 공습을 피해 귀국해서 부모와 헤어져 살아야 했다.  

 

그러니까 내가 유년시절을 기억하기 시작해서 귀국했던 1944년 5월이나 6월까지를 보낸 <오사카시 미나토쿠 이시다 소토무라쵸 잇쵸메 나나반찌(大阪市 港區 石田外村町 一丁目 7番地)>는 유년시절을 보낸 고장이다.     고향이라면 고향이다.      아지가와에서 멀지 않아서 아지가와에서 낚시를 했던 아니 낚시 시늉을 했던 기억도 있다.  

 

그 지음 할머니가 돌아 가시고 어미니가 유골을 모시고 강원도 철원 선산에 갔을 때 난 거의 혼자 집에 있을 때가 많았다.     셋째누님은 도쿄로 출가했고 손윗누이는 나보다 세살 위라 내가 3학년 때 6학년이라 오후 늦게 까지 수업이 있어 일찍 귀가한 나는 할 일 없이 2층 뒤켠 모노호시(건조 베란다)에서 비누방울을 날리기도 하고  아지가와에서 낚시대를 드리우는 시늉도 하곤 했던 것 같다. 

 

그 지음 그 동네에는 애들이 없었던 것 같다.     오사카 대공습을 예상하고 모두 시골로 소까이(흩어 피난)를 시켜서 그랬을 것 갈다.   나도 이런 소카이 계획으로 일본 시골에 소까이 예행을 간 일이 있다.    아버지는 날 연고가 없는 일본 시골에 보낼 수 없어  조선에 출가해서 사는 첫째 누님집에 보낼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난 부모와 1년 반을 넘게 헤어져 살아야 했던 것 갈다.

 

우리집에서 아지가와만큼 내륙편으로 전차가 지나 갔다.  학교에 다니기 전에 난 동네 아이들과 그전차 철로위에 못을 갖다 놓고 전차가 지나간 다음 못이 납작해 진 것을 신기해 하면서 장난을 쳤던 생각이 난다.   전차가 오고 있는데 그런 짓을 하니 어른들이 보면 위험한 짓이라 야단을 맞았을 것이다.

 

우리 옆집은 모퉁이집이었는데 술집이었던 것 같다.    그 길 건너에 약국이 있었고 그 다음엔 목욕탕이었던 것 같다.  그 앞엔 문방구 겸 구멍가게였던 것 같다.  난 그 가게에서 손윗 누나가 풀을 사러 심부름 가면 쫓아 가서 주인 할망구가 풀을 담으려 안으로 들어 가면 잽사게 유리 뚜껑을 들어 안에 든 엄지손가락만한 인절미 비슷한 떡을 훔쳐 먹는 것을 재미로 삼았다.

 

그 거리에는 일주일인지 보름이면 야시가 섰는데 전등을 휘황하게 대낮같이 밝히고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것이 마치 축제같아 좋았다.   그것도 전쟁이 나고나서는 전력 절약차원에서 못 열게 되었던 것 같다.

 

어렸을 땐 다리에 부스럼이 많이 나서 무슨 약인지 분홍색 나는 약을 바르곤 했는데 가끔 나보고 혼자 가서 사오라고 했다.  난 약국에 가서 "모모이로노 구스리(분홍색 약) 구다사이"  하고 사오곤 했던 생각도 난다.

 

그래서 늘 언젠가는 오사카에 가서 내가 살고 놀던 곳이 어딘지 확인해 보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사카에 올 때마다 <이시다쵸> 근방을 서성이며 여기쯤일까 저기쯤일까 상상을 해 보며 정확한 위치가 어딜까 궁금해 하곤 했다.

 

내가 칫코(築港)에 아파트를 구한 것도 바로 칫코 근방이 내가 살고 놀던 곳에 가깝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성공했다.  내가 다닌 학교의 위치를 알 수 있었고 전쟁전의 오사카 지도를 찾아 내어 내가 살던 지역이 어딘지 알아 냈다.    

 

그런데 오호애재라 내가 다닌 학교터도 내가 살던 집터도 모두 아지가와 바다밑에 수몰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려노> 정지용님의 싯귀가 생각 난다.

 

 

 

 

미나토야 고꾸민각꼬 입학생

 

 

 

 

그 뒷면에는 선친이 쓴 촬영 일자와 내 생년 월일이 적혀 있다.

소화17년은 1942년이다.

지금 부터 정확히 70년 전이다.

당시는 조선사람에 대한 일본사람들의 차별과 구박이 심해서

아버지는 내게 일본 이름을 지어 주신 것 같다.

어떻게든지 "조센징 아이"라고 따돌림을 당하지 않게 해 주려는 아버지의 고심어린 배려였다.

이 학교에도 또 그 전에 다닌 유치원에도

일본말이 서툰 어머니를 대신하여 아버지가 시간을 내어 데리고 다니지 않으면 

동경으로 출가한 셋째누님이 학부모 노릇을 해 주었다.

그래서 내 일본 이름이 <사다미츠 이사오>가 되었던 것이다.

 

 

 

미나토꾸의 역사를 보면 원래 농지였던 이시다쵸에 인구가 늘자 동네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시다쵸는 그 이후 더 세분화해서

이시다 소토무라쵸로 갈라졌다.

 

 

 

1934년 내가 태어 나기 1년전 지도

여기에 보면 오사카 전차는 칫코선 밖 아지가와 연안으로

그 지선이 지나가고 있다.

나는 이 지도를 보기전 까지는 칫코선이 내가 기억하는 전차길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가 놀던 전차길은 이 지도의 미나토마치와 이시다쵸 정류장 사이었을 것이다.

우리 집은 아모도 미나토야쵸오 이시다쵸사이 쯤 되지 않았을 까

궁금한 것은 내가 기억하는 남쪽의 정류장은 <고옴바시>였는데

아 지도에서 <바시>는 맞는 것 같은데 그위의 두자는 판독할 수 없다.

이 지도에서 재미 있는 것은 <이치오카 파라다이스>위지가 표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치오카파라다이스>는 30년대의 오사카 명물인 거대 위락단지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자리가 지금 <오릭스 드라이빙 스쿨> 자리라는 것이다.

또 지금 아지가와 북안을 달리는 JR 유메사키센은 옛 시니나리센이고

아지가와 정류장이 지금의 아지가와구치정류장으로 추정되니

그 두 사이를 직선으로 이어 보면 <이시다소토무라쵸>의 위치가 나온다.

그렇게 해서 추정되는 이시다 소토무라쵸의 위치를 주정해 보니 현대 구글지도상

아래의 핀 마크 지점이란는 결론을 얻었다.

 

 

 

핀 마크한 지점이 <이시다소토무라쵸> 언저리로 추정된다.

 

 

 

또 <미나토고꾸민각꼬>는 벤텐부두 끝 언저리로 마크 되어 있다.

이 지도는 인터렉티브 지도인데

공습으라 사라진 미나토꾸 학교와 사라 남은 학교를 빨간 사각(사라진 학교)과

현존학교(푸른 색 사각)로 표시해 놨다.

벤텐부두 코앞 바다밑에 빨간 사각이 있다.

이 빨간 4각을 클릭하니 아래의 사진과 설명이 나온다.

 

 

 

 

””””””””” 미나토야 국민학교 언저리는 지금 벤텐부두의 끝 바다밑이 되어 있다.

1945년 6월 1일 공습으로 반소했고  그 지역이 전소했기 때문에 <이소지>소학교와 통합하면서 폐교가 되었다. 

반소한 교사는 신제 <미나토다이이찌 쭈각꼬>(현 이치오카중학교)가 사용하기도 했고 <이소지>소학교 분교로도

쓰였고 기꾸수교가 되기도 했으나 <아지가와>내항화를 위해 1953년 해면 아래로 사라졌다.  ””””

 

 

 

이 역사를 알고 난 다음날 우리집에서 1~2 Km 떨어진 아지가와 부두에 가 봤다.

마주 보이는 돌출부가 벤텐부두이고 그 앞이 미나토 학교가 있던 자리

그 보다 더 하류 지역이 <이시다 소토무라쵸> 일대일 것이다.

내 브로미가 서 있는 자리 언저리에 전차가 지나 갔을 것 같다.

오호라 쌍전 벽해라더니

헛 말이 아니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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