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별에서 - Things Old and New :: '일상, 단상/나의 가족, 가족사 ' 카테고리의 글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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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날과 미투

 

어제가 여성의 날이었다고 한다.  그런게 있는 줄도 몰랐다.  미투운동과 맞물려 여러가지 행사가 있었던 것 같다.

 

"여인"하면 가슴이 아프다.   난 왜 여성하면 가슴아프고 눈물이 날까? 

 

내가 내 생전 가까웠던 여성은 모두 비운의 여인들이었다.

 

내가 처음 가장 좋아했던 여성은 할머니였다.  내게 "귀먹어리 세 할멈" 이란 구전 동화를 불러 주시고 불러주셨던 그 할머니다.  (2014/04/08 - [일상, 단상/나의 가족, 가족사 ] - 세 귀머거리 할멈 이야기 - 내 할머니가 들려 주신 구전동화)

 

 

"내 할머니는 고종 계유 (윤 6월 13일) 생으로 족보에 기록되어 있어 추산해 보니 1873년에 태어 나셨다. 1943 경 돌아 가셨으니 한 70년 사신 것이다.   나하고는 8년동안 이 세상을 함께 지내셨는데 마지막은 오사카 집 이층 다다미방에 병환으로 누어 계셨다. 

 

병환나시기 전까지 내가 너댓살쯤 되었을 때 할머니는 내게 많은 한국의 구전 동화를 들려 주셨다.  할머니의 이야기 주머니는 엄청 컸다.   무진장의 이야기가 나왔다.  어머니는 자기는 얘기는 잘 못하는 데 할머니는 이야기도 많이 알고 이야기도 잘 하신다고 칭찬을 하곤 하셨다.

 

할머니는 우리와 아무 혈연이 없다.    익헌공 종가집은 증조할아버지때 혈손은 끊어지고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모두 그 윗대의 후손집에서 양자로 들어와 종가를 이어 왔다.   그런데 오사카에서 같이 산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3취로 첫번째 두번째 할머니가 모두 손 없이 돌아 가셨고  이 할머니도 할아버지와 얼마 살지 못하고 할아버지를 잃은 것이라고 한다. 마지막 이 할머니는 할아버지 사후 양아들인 아버지가 어머니로 모신 분이다.

 

파평 윤씨로 가난한 양반 집안이라는 것만 난 알고 있다.   어머니의 이야기로는 가난하니까 부자집 덕좀 보려고 나이 많은 할아버지에 3취로 시집 보냈다고 하셨다.   난 할어버지를 뵌 적도 없고 어머니 말씀으로 기억할 뿐이다.  할아버지 사후 아버지가 나이 많은 사촌의 빚보증을 섰다가 가산을 모든 날리고 말 그대로 우리집은 망했다.   할머니 친정은 덕은 보기는 커녕 나이많은 할아버지의 삼취로 보내서 자손도 못보았고 할머니는 할아버지 사후엔 집안이 망해서 일본으로 건너간 아버지의 부양으로 살다가 돌아 가신 조선조 말기의 비운의 여인이었다. "



출처: http://boris-satsol.tistory.com/1153?category=380860 [지구별에서-MyLifeStory]

 

내 어머니는 말할 것 없이 내겐 가장 소중하고 귀한 여인이었다.

 

한말에 태어나 가장 험난했던 조선 근대사를 몸으로 살다가셨다.   625때 6남매중 둘을 북쪽으로 보내 생이별을 했고 막내딸, 내겐 4살 터울의 손윗 누이는 생사도 모른다.   1997년 1월   그 막내딸에게 금비녀 하나와 지폐 20만원을 돌돌 말아 유언장과 함께 나에게 남기고 가셨다. (비극의 유산 --- 조선 근대사를 몸으로 살다 간 우리 어머니 ------- )

"유품을 정리하던 나는 어머니의 낯익은 필적을 발견합니다.  내가 씨애틀에 살 때 푸른 봉함엽서에  "... 보 거라"  로 시작하며 보내셨던 안부 편지.  글씨와 글씨가 이어지는 옛날 붓 글씨체로 세로 쓰기 했던 그 필적. 지폐 스무 장(이십만원)과 금비녀를 함께 쌌던 그 유서에는 "내가 K가 시집 갈 때 아무것도 못 해 줬는데 나중에 K를 보면 이것이라도 전해 주어라..."

언제 쓰신 유서인지 모릅니다.  아마도 교통사고 이전이라고 추측 됩니다.  어떻게 K 가 살아 있다고 생각 하셨을까?  그리고 시집갔다고 생각하셨을까?   나에게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입니다. 

조선 근대사의 비극을 몸으로 살다간 우리 어머니 창녕 성씨는 그 마지막 장을 마감하지 못한 채 떠나 갔습니다.   그 마지막 장을 나에게 남긴 채.

나는 생각합니다. 이 비극의 마지막 장을 내 생전에 보게 될는지.....  그리고 어머니의 비원을 이뤄 드릴 수 있을지.......
아 어머니...."


출처: http://boris-satsol.tistory.com/91 [지구별에서-MyLifeStory]

 

 

내 6남매중 위의 4남매는 나와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    우리 집안이 망하기 전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중에 세 누님은 내게 어머니 같은 분들이다.    첫째 누님은 내가 태평양전쟁때 오사카에 소카이(피난)와야 할 때 날 맡아 키워 주셨다.  그런데 625때 큰 매형은 1950년 가을 수복해 들어 온 국군뒤에 따라 온 서북청년단 같은 반공단체가 "치안대"라 자처하며 조금이라도 인공치하에서 나섰던 사람들을 마구 잡아다 폭행하고 죽이고 했다.   매형도 이 치안대라는 테러집단에 잡혀가 폭행당하고 결국 살해당했다.  이 누님은 남편의 시신도 찾치 못했다. 30대 중반에 과부가 되어 외로운 여생을 살다 기셨다.

 

두째 누님은 내가 대학을 다닐 때 돌봐 주셨고 내가 그 누님집에서 가정교사를 하면서 돈을 벌어 미국 유학을 갈 수 있었다.  그 누님이 가장 오래 사셨다. (두째 누님의 부고)

 

 내가 전에 쓴 "늙음은 더욱 아름다워라)의 주인공이다.

 

젊었을누님은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병상에 누워 있는 누님 또한 아름다왔습니다.  누님을625전쟁피난길에서 얼굴전체에화상을입어자국이아직도남아있습니다. 시대의모든땅의여인이그랬듯누님역시인고의생을살았습니다. 그럼에도여전히아름다운여인으로남아있는누님을나는송원스님이말한늙음의아름다움을생각해 봅니다 

 



출처: http://boris-satsol.tistory.com/87 [지구별에서-MyLifeStory]

 

"내가 좋아 했던 형수님은 형과 약혼했을 때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선화국민학교 전학을 도와 주셨다.  아버지가 하시다가 갑자기 알 수 없는 병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1946년경이다. 

 

그 형수님이야 말로 내가 좋아했던 여인중에서 가장 비극적 삶을 살다 가셨다.  결혼한지 5년이 채 안 되었을 때 625가 터졌고 형은 25살의 새 색시와 년년생 두 아들을 남겨 두고 인민군이 패주할 때 북으로 따라 갔다. 자발적이었는지 반 강제였는지 그 건 알 수 없다.

 

"14 후퇴로 서울이 다시 인민군치하에 돌아 왔을 때에도 형은 형수나 아들을 데리려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형수는 마냥 기다릴 수 없었다.   형이 안오면 자기가 아들 둘 데리고 남편을 찾으려 북으로 갈 결심을 한다.

 
 
어머니는 그 자랑스러워한 조선 갑반의 종부 답게 종부와 종손을 젊은 며느리의 손에만 맡길 수 없다는 생각으로 며느리와 손자 둘을 따라 월북을 결심한다.
 
 
 
나와 어머니에게는 행운이요 형수에겐 불운하게도 십리도 못가 미군의 폭격에 형수의 뒷굼치에 부상을 입는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뒤굼치가 아믈 때엔 이미 서울은 다시 미군과 국군이 들어 왔을 때였다.
 
 
 
이 사건이 아니었다면 중3인 어린 나이에 난 어머니와 생이별하는 전쟁고아가 될 번 했다.  

 
 
그 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형수는 끝내 독수 공방 외로은 삶을 살다 세상을 뜬 것이다.   이민 가서 살고 있는 두 아들이 있는 Los Angeles 에서 재작년에 한 많은 이 세상을 하직했다."
 

 

내가 은퇴하고 LA 에 자주 갔을 때  "데련님"에서 "서방님"으로 호칭이 바뀐 나에게 한국에서 이산가족 상봉이야기가 나올 때면 "서방님, 형님 소식 못 들으셨어요" 하곤 묻곤 했다.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가슴 아프다.

 

  출처: http://boris-satsol.tistory.com/1135 [지구별에서-MyLifeStory]

 

 

어머니의 비원의 대상인 K 누나는 나와 4살차이다.    오사카에서 태어난 6남매중에서도 같은 "세대"에 속한다.   위의 누님들이 어머니 같았다면 K누나는 내 진짜 동기같은 누나다.   손이 귀한 집에서 오시카에 와서도 또 딸을 낳았으니 어머니의 실망은 컸을 것이다.    그리고 막내로 내가 태어났으니 내가 얼마나 귀여움을 독차지 했을까는 상상이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얼마나 그 K누나에게 못되게 굴었을 까도 상상이 간다.  내가 국민학교에 들어 가 처음 여름방학을 맞았다. 한 달 방학동안을 팡팡 놀다 개학 하루전에 방학 숙제가 생각이 났던 것 같다.     난 울고불고 떼를 썼을 것이다.   내 한달 방학 숙제를 K누나가 대신 다 해 주었다.

 

그러니까 K 누나는 내 "밥"이었던 셈이다. K누나도 못된 동생이긴 해도 위의 4남매와는 달리 세대가 같은 나를 오사카에서 태어난 유일한 혈육 남매같은 의식이 있었을 지 모른다.  난 원남동의 셋째 누님집에 학교를 다녔고  K누나는 혜화동의 두째 누님집에서 가사를 도우며 살았다.  가끔 혜화동 두째 누님집에 가면 그 동안 생겼던 사탕 같은 것을 모았다가 날 주곤 했다.

 

625가 나자 인민군의 노력동원에 징발되어 나갔다 오곤 했다.   나가서 무슨 일을 하고 왔는지 알 수 없지만 서울대 부속병원이 가까이 었었으니 인민군 부상병을 치료하는 간호보조일 같은 걸 하지 않았나 추측할 뿐이다.     인민군의 패색이 짙어 가던 9월 어느날 노력동원이 끌려 나갔던 K누나는 끝내 집에 돌아 오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928 수복이 되고 세상은 또 한번 뒤집혔다.

 

"나중에 나는 이태씨가 쓴 다큐소설 "남부군"을 읽었습니다.  남쪽에 있던 인민군은 인천상륙으로 퇴로가 차단되어 지리산에 집결하여 남부군으로 재편합니다. 그리하여 몇 년간 빨치산으로 전쟁을 계속합니다.  우리에게는 "공비" 라 불리는 저주와 토벌이 대상이 되었던 빨치산이지요.   남과 북 모두에게 버림받아 끝내 소멸하고 만 남부군이었지요.  

거기에는 서울에서 간호 보조원으로 인민군을 따라 나선 한 처녀가 등장합니다.  열 아홉의 나이입니다.  K  누나가 인민군을 따라 나섰을 때 나이가 바로 열 아홉 살이었습니다.  이 처녀 역시 타의에 의하여 지리산 의 여자 빨치산이 되어 종래에는 피아골의 외로운 혼령으로 사라집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어쩌면 K 누나 였는지 모른다고요."



출처: http://boris-satsol.tistory.com/91 [지구별에서-MyLifeStory] 

 

은퇴후 어느 봄날 지리산 한화 호텔에 며칠 머믄 일이 있다.    그 때 그 아픈 이름의 피아골에 올라 가 본 일이 있다.

 

이데올로기란 이름으로 갈라져 싸운 그 전장의 골짜기, 그 날은 유난히 봄바람이 세차기 불었다.  몸을 가누기 힘든 세찬 바람이었다.

 

난 그 무서운 바람소리가 50여년전 피아골에서 스러져 간 젊은이들의 울부짖음 같이 들렸다.   

 

내 구원의 연인 아내도 자칫 비련의 주인공이 될 뻔 했었다.

 

1960년 말 미국 시애틀에서 아내를 만나 열애에 빠지고 마침내 결혼을 결정하고 서울의 양가에 알렸을 때 우리가 동성동본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결정적인 반대의 구실엔  더 심각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양가 모두에게 해당되고  우리들 자신에게도 미치는 심각한 결혼 장애 요인이었다.    우리는 동성 동본이었다.   우리는 모두 전주 이씨였다.  그러나 우리 모두 족보를 보면 나는 세종대왕의 23대 직계 후손이고 아내는 태조가 추존한 태조의 할아버지 때에서 갈라져 온 후손으로 27대에서 갈라진 동성동본이다.   

 

1960년 한국의 민법에는 동성동본 금혼이 규정되어 있었고 사회통념상으로도 결혼은 불가였다.   그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아내는 집안에서는 다른 이유를 더 대어 봐야 먹혀 들지 않으므로 동성동본을 들먹거리면서 한국에 오면 결혼신고도 할 수 없다고 위협을 하였다.

 

민법의 동성동본 금혼조항은  여성에게는 엄청난 불평등 조항이었다.  결혼은 하되 결혼신고가 되지 않으면 아내는 단순히 내연의 처가 될 뿐이다.   내가 맘을 달리 먹고 다른 여자와 다시 결혼한다 하여도 아무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다.  아이를 낳아도 내 호적에 입적시키면 "모"가 등재되지 않은 호적에선 자기 자식에 대한 친권을 주장할 아무 법적 근거가 없다.   삐뚤어진 문화와 몽매한 인습으로 한국에서 태어 난 여성들이 받는 갖가지 고통중의 하나였다.

 

이 조항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동성동본 결혼부부가 고통을 받았겠는가.  끝내 결혼을 반대하여 남자가 결혼을 무효화하는 순간 아내는 그냥 쫓겨 나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남자는 다른 여자와 버젓이 결혼해도 아내는 아무 주장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 한국의 민법 실정이었다.  

 

우리의 경우에 비추어 보면 우린 고려시대의 친척이었던 사람들의 후손인데도 한 왕조(조선조)가 서고 망한 20세기에서까지 결혼을 금하고 있는 민법이었던 셈이었다.  "

 



출처: http://boris-satsol.tistory.com/375 [지구별에서-MyLifeStory]

 

동성동본 금혼 조항을 개정하는 데 반 세기가 넘게 걸렸다.  

 

 

"그러나 상상해 보라 우리가 혜화동에서 만났다면 과연 우리는 백년 해로의 맺음에까지 이어졌겠는가.  그것은 비극의 인연으로 끝나 버렸을 것은 불 보듯 훤한 일이다.   설혹  어찌어찌 맺어졌다 하여도 우리들이 겪었을 고통과 시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맺어지기 보다도 못한 비극이었을 것이다."

출처: http://boris-satsol.tistory.com/375 [지구별에서-MyLifeStory]

 

 

이 글을 쓰면서 난 연신 눈물을 닦아 냈다.   특히 K누나를 회고하면 계속 눈물이 난다.  

 

왜 내 주변엔 슬픈 여인들 뿐인가?

 

아니 내 주변이 특별한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조선의 여인들이 아팠고 슬펐다.

 

"우리는 참으로 많은 왜곡된 인습에 의하여 상처 받고 고통을 당한다. 
우리나라의 여성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 어려서는 부모에 따르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따르고 늙어서는 자식 을 따르라고 가르친 옛 도덕율.
칠거지악이니 하여 여성의 자유를 억압하는 유교적 전통들에 의하여 우리 나라 여성은 한없이 구박 받고 속앓이 하였다. 
우리의 어머니 우리의 누나들이 또 아내와 딸들이 그런 대우 를 받은 것이다.  아직도 그 인습이 우리사회 구석구석에 남아 있다."

출처: http://boris-satsol.tistory.com/84 [지구별에서-MyLifeStory]  (인생, 만남, 부부)

 

오는 세상에서는 이 땅의 여성이 더 이상 아프고 슬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Posted by Satsol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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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ruprin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8.03.12 01:02 신고

    한 밤중에 읽다가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ㅠ ㅠ
    통일 보다 우선 남북간 이산가족들이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념, 경제와
    상관없이..가족끼리 생사도 모르고 지낸다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분들이 점점 연세가 들고 있기 때문에, 하루 빨리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부디 보리스님의 소원이 이뤄지길 바라겠습니다.
    보리스님, 코니님...일교차가 큽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바라겠습니다. (_ _)

    • Satsol 샛솔  댓글주소 수정/삭제 2018.03.12 12:01 신고

      감사합니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휴전이 된지 65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휴전상태라니 이 것은 너무 한 것입니다. 안타깝네요. 공감해 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2. 황성주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8.03.14 15:41 신고

    눈물이......

    소설보다, 영화보다 더한 비극이었군요.

  3. 히브리사람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8.03.17 14:37 신고

    탈북자인데, 교수님의 글을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저의 부친의 사촌누님도 해방전에 남쪽으로 시집간 후 38선이 막혀서 영영 만나지 못하고 생사도 모르고 살았다는 얘기를 북에 있을 때 들었습니다. 남쪽분들의 옛날 이야기를 들으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2015년 10월 30일 오후 6시경 내 Y-염색체를 가진 아기가 태어났다.

 

Y-line 은 부계로 이어지는 완전한 유정정보다. 

 

 

 

 

 

 

어제 태어난 두째의 두째

아직까지는 유일한 내 Y-염색체를 가지고 태어 났다.

저 아이도 2100년이면 내 나이보다 많은 85세가 된다.

그 땐 어떤 세상일까?

 

 

Posted by Satsol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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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기원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5.10.31 23:31 신고

    축하드립니다! ^^

  2. 경천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5.11.02 12:13 신고

    축하드립니다. 손녀가 아니고 손자라서 더 기뻐하시는 것은 아니신 걸로 알겠습니다. ㅎ

오늘 두째 누님의 부고를 들었다.

 

LA에 사시던 누님이 지난 19일 세상을 떴다는 기별을 받았다.  전에 이 누님 이야기를 블로그에 올린 일이 있다. 그 누님이다. (2005/09/01 - [일상, 단상/나의 가족, 가족사 ] - 늙음은 더욱 아름다워라 )

     

이젠 내 동기는 아무도 없다.  

 

2012년 정월 그리고 5월에 셋째, 첫째 누님들이 세상을 떴고 며칠전에 두째 누님이 마저 세상을 떴다.  작년(2014) 1~2 월 LA 여행때 뵈운 것이 마지막이 된 것이다.    그 때  누님은 ”내년에 또 볼 수 있을까”  했지만 그게 마지막이었다. 

 

1920년대 아버지와 어머니의 어쩔 수 없는 별리로 우리 6남매중 위의 4남매와 아래의 2 남매사이엔 나이차이가 많이 난다.

 

난 10살도 되기 전에 아버지를 여의었고  625때 행불된 형이 사라진 이후 난 누님들의 신세를 많이 졌다.      태평양 전쟁전에 큰 누님이,   해방이후엔 3째 누님이 날 돌봐 줬고 625 전쟁이후엔 두째 누님댁 신세를 졌다.  

 

그래서 세분 누님들은 내 어머니 같은 사람들이다.   

 

작년에 장모님이 세상을 떴고 어머니 같은 누나들이 하나 하나 세상을 뜨니 우리가 갈 때가 가까워졌다는 신호처럼 느끼게 된다.   

 

 

 

 

 

신기하게도 내가 태어 나기 직전에 찍었다고 생각되는

사진이 있었다.

날 뺀 우리 5남매의 사진이다.

왼쪽부터

위줄이 형과 큰 누님

아래쪽이 셋째, 넷째, 두째

형과 당시 아가였던 넷째 누님은 625때 행불이 되었다.

생존해 있을 확률은 거의 없다.

1933년 아니면 34년 쯤 사진이 아닌가 추측된다.

 

 

 

625 전쟁 전에 형님이 만든 앨범이 어머니의 유품 속에 있었는데 어머니가 돌아 가신 후엔 내가 보관하고 있었다.  앨범의 페이지들이 삭아서 부스러져 간다.    그래서 쓸만한 사진 몇장을 건지고 모두 버리기로 했다. 

 

 

 

 

제일 큰 누님은 아마도 내가 태어 나기전에 출가했을 것이다.

혼담 중매용으로 한껏 멋을 내고 찍은 사진이  아닐까 싶다.

양재를 배웠다니까 옷도 누님 스스로 디자인해서 만들어 입은 것 아닌가 싶다.

지금으로 보면 우리 부모가 어린 나이에 아이들을 낳았지만

교육엔 열성이었다.

1930년쭘의 사진으로 추정된다.

 

 

 

며칠전에 작고한 두째 누님의 여학생시절의 사진

역시 1930년쯤 오사카에서 찍은 사진일 것이다.

 

 

 

우리 남매중에서 세번째로 태어난 형님

대학생 시절의 형님의 모습.

1940 년대의 사진으로 추정된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를 여윈 난 부모와 함께 산 기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

막내로 태어나 누님들의 귀엄은 받았는지 모르지만 부모의 정은 가장 아쉬었다.

1953 년경의 내 모습

제대로 된 사진 하나 없다

증명사진중의 하나일 것이다.

우리 남매는 모두 어머니의 모습을 조금씩 닮고 있다.

 

 

Posted by Satsol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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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천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5.03.23 10:37 신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 황성주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5.03.24 15:28 신고

    세월의 흐름과 함께 모두들 떠나시는군요.
    사진 속에서는 저렇게 젊고 총기가 있어 보이는데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3. 로링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5.06.02 10:39 신고

    공유 주셔서 감사합니다~

1969년 결혼한지 근 10년  되던 해 처음으로 장모님을 만났다.  1961년 미국에서 결혼하고 1969년 일시귀국하던 해 처음 만난 것이다.  아내가 가지고 있던 사진으로 얼굴은 모습을 보았지만 대면하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지난 토요일(2014 11월 29일) 9시 반경 세상을 떴다.가족은 하나 없이 간병인 한 사람이 임종을 지켰다. 10시쯤 도착했을때는 아직도 손이 따뜻했다. 그 손이 마지막 작별이었다.


다음날 입관식에서는 얼굴만 열린 시신을  마지막으로 뵈었다. 얼굴을 만져 보니 어름장처럼 차가웠다.


이것이 주검이구나 새각하니 죽음이 새삼 가까이 내게 다가왔다.  목 디스크때문에 갑자기 쇄약해진 내 몸 때문인가 내게도 죽음이란 멀지않다는 느낌이었다,


오늘 장례식을 치렀다.8시 30분에 시작하는 영결미사에서는 영성체를 봉헌할때 부르는 성가 <주여 임하소서>가 나왔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다. Lowell Mason 이 만든  영어로는 <Nearer God to Thee>라는 노래다. 


그 성가를 불러 본지도  얼마나 되었던가!   


간단한 미사를 올리고는 곧바로 영구차로 청계산 자락에 있는 화장터(서울추모공원)로 모셨다.화장을 기다리는 시신들은 많았다.   한시간 남짓하여 시신운구라는 방송이 나오고 유족들은 관이 화로에 들어가는 것을 지켜 봤다.   화장은 1시간 반쯤 걸린다.  유족들은 유족실에  안내되어 들어가 기다렸다.   밖은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화장이끝나고  유골을 분쇄하기전에 유골을 유리창밖에서 보고  확인하는 과정이 있었다. 그건 다만 형식이었다   확인 절차가 끝나니 유골을 가져가 분쇄기에  넣어 빠아가지고왔다.  한줌의 가루로  만들어 가지고 온 것이다.


이틀전 아침까지도 멀정하시던 어머니(장모님)가 한줌의 재만 남기고 우주에 흩어져 돌아 가신 것이다. 재는 종이에 싸여 나무 상자에 넣어 돌려 받았다.  그리고 장모님이 생전에 마련해 두셨던 배론 성지 조각공원 납골벽 가장 한 가운데 감춰졌다.  장례는 모두 끝난 것이다.

 

한 줌의 재를 남기고 98년 가까운 지구별 여행을 마치고 돌아 가셨다.   그리고 얼마 있다간 잊혀지고 흐려져 가는 기억속에 묻혀질 것이다.   삶이란 참으로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성체성사때 부르는 성가

주여 임하소서

장모님 영결 미사에서 오랜 만에 부른 성가

 

 

 

서울 추모공원의 조형물

 

 

 

초현대식 추모공원 시설

마치 공항로비에 설치된 전광판에서 이륙하는 항공기편을 알려 주는 것 같다.

하긴 지구별을 떠나는 우주선 아니던가!

 

 

 

화로에 들어 가기 전 마지막 작별을 위해 잠시 머믈다.

 

 

 

화장은 1시간 남짓 걸리는 데 그 동안 대기하는 유족실

 

 

 

장모님은 참으로 여성스러운 분이었고

교육은 별로 없으면서 능력이 좋아 부를 일구셨고

그 부의 상당 부분을 천주교 사회 사업에 바치셨다.

꽃동네에 엄청난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고 원주교구 배론 성지 조성에도 많은 지원을 하셨다.

 

 

 

 

조성 초기에 이 자리를 받으셨고

가장 좋은 위치에 납골함을 분양 받으신 것 같다.

 

 

 

십자가 의 한 가운데가 두 납골항아리가 들어 가는데

오른쪽에 안장되셨다.

왼쪽은 수원 묘소의 장인유신을 화장하여 합장할 계획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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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천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4.12.02 10:59 신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 sierrabird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4.12.02 12:38 신고

    고인의 명복과 가족들의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3. Wisconsin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4.12.03 03:59 신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선생님과 사모님께 마음으로부터의 깊은 위로를 보내드립니다.

셋째 누님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나에겐 네사람의 누나가 있다.     4남매 중의 위의 네 동기는 내 부모가 처음 출산한 4남매이고 나와 바로 손위 누나는 내 부모가 한 동안 헤어졌다 일본에서 재회한 다음 낳은 남매다.    나와 네살 터울인 오사카에서 태어난 손위 누나는 19살(만)되던해 일어난 625 전쟁 와중에서 행불이 되었다.   어머니가 나에게 남긴 비극의 유산의 주인공이다.  2005/02/17 - [일상, 단상/나의 가족, 가족사 ] - 비극의 유산 --- 조선 근대사를 몸으로 살다 간 우리 어머니

 

셋째 누님은 내 부모님이 철원에 사실 때 낳은 네 동기중의 막내인 셈이다.   개띠로 기억하고 있으니까 1922년생이다.      언젠가 내 가족사에 내 어렸을 때 모습을 기록한 일기를 공개한 일이 있다.   2011/01/04 - [일상, 단상/나의 가족, 가족사 ] - 셋째 누님의 옛 일기에서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이 일기의 단편은 사실은 그 누님이 1938년 5월 29일(일)에 쓴 일기다.   내 어렸을 때 모습을 그렸기에 이 블로그에 공개했었다.   블로그를 쓸 때 그 날이 정확히 몇년인지 몰랐다.  대개 내 나이가 서넛되었을 때라고 생각해서 1938년 안팍이라고만 추축했는데    What day of the week was the 29th of May 1938? 하고 구글링을 했더니 Sunday 라고 나왔다.  바로 전해인 1937년 5월 29일은 토요일이었으니 1938년이 맞다.

 

1938년 5월 29일은 내가 2돌하고 6개월 9일 된 날이다.   

 

2년전 오키나와 여행중에 세상을 떴다.   2012년 1월 20일 쯤으로 기억된다.  오키나와의 제일 북쪽을 드라이브하려고 아라하 비치 숙소를 나왔을 때 두 째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래서 그 때의 포스팅 ( 2012/01/20 - [해외여행기/일본 오키나와] - 오키나와 드라이빙 - 헤도미사키(辺戸岬) 와 야에다케(八重岳) ) 을 보니 세상을 뜬 날이 2012년 1월 20일 하루 이틀 전일 것이라 추측이 된다.    누님의 생일이 3월이나 4월 아니었나 싶으니 90년 마이너스 한 두달 살다 가신 셈이다.

 

전에 올렸던 셋째 누님의 그 일기는 실은 누님이 17살 때 쓴 일기로 그 때 출가해서 경기도 양주에서 살고 있는 큰 언니에게 쓴 편지의 일부에 옮겨 적은 것이다.      8 페이지에 이르는 이 편지의 첫 문장에 오사카에 살다 시집간 큰 언니에게 오랫 동안 편지를 올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자신의 일기를 발취해서 당시 여학생이었던 자신의 학교생활과 오시카 소식을 전한 것이다.    

 

아직 시집 안간  두째 언니의 이야기도 막내동생인 두돌 반짜리 내 이야기와 큰 언니가 시집 간 후에 이사 온 이시다쪼의 새 집 이야기와 도면까지 그려서 편지에 썼다.

 

아무리 일기의 일부를 베껴 썼다해도 8 페이지의 편지를 썼다는 것은 감수성 많은 여학생이 아니었다면 쓸 수 없었을 것이다.

 

큰 언니인 내 제일 큰 누님도 같은 해 5월 27, 8일경 세상을 떴다.   오사카 여행중 마지막 날에 받은 슬픈 소식이었다.     2012/05/28 - [해외여행기/일본 오사카2] - 오사카 마지막날

 

어제는 셋째 누님의 두째 딸 내외가 찾아 왔다.    유일하게 LA 에 살아 계신 두째 누님은 LA 에 갈 때 찾아 뵐 수 있고 생질들도 셋은 LA 에 살고 있어 겨울에 LA 여행을 가면 만날 수 있지만 오혀려 한국에 살고 있는 큰 누님 셋째 누님 가족들은 만난지도 오래 되고 소식도 드문드문이다.   

 

유일한 소식통로는 어제 찾아온 셋째 누님의 세째조카(두째 딸)다.  

 

어제 찾아온 조카사위는 10년전 누님을 모시고 뉴질랜드에 살고 있는 누님의 막내 아들을 방문할 때 누님을 모시고 간  두째 사위다.   그 땐 우리가 골프를 칠 때라  텅텅 빈 뉴질랜드의  골프장을 함께 누비고 디녔다. (2007/05/16 - [해외여행기/뉴질랜드] - 2004 년 뉴질랜드 여행기 )



 

그 때 이야기를 나누다 생각이 나서 오늘 그 때 찍은 사진 몇장을 보내 왔다.    그 때 내가 거기서 7순 생일을 맞았다. 두돌반 짜리 막내동생이 귀여워 죽을 지경이라고 일기에 썼던 그 막내의 7순 생일을 맞았던 것이다.    막내 아들에게 부탁해서 한국 떡을 사 오신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바로 정확히 10년전 이야기가 되었다.    세월의 무상함이여!

 

 

 

 

 

Half Moon Bay 가 하는 곳에서 페리를 타고 건너가 오크랜드 시내를 관광하고

페리를 기다릴 때 찾은 생맥주 전문점에서 

 

 

 

 

여러가지 생맥주를 팔고 있어

생맥주를 좋아 하는 나에게 반가운 발견이었다.

 

 

 

 

뉴질랜드에서 맞은 내 칠순 생일날

 

 

 

 

오사카에서 어렸을 때 살 던 집 구조

큰 언니가 시집 간 후에 이사 온 이시다쬬의 집

내 출생신고엔 내 출생지가 코노하나꾸 시칸지마라고 나와 있으니

미나토꾸 이시다 소또무라쵸의 이 집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오사카의 유년시절의 집이다.

한 때 할머니가 돌아 가시고 무서워서  혼자 들어 가지 못했던 집

오사카 대 공습 때(1945?) 타 버렸다고 한다.

 셋째 누님의 편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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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할머니는 고종 계유 (윤 6월 13일) 생으로 족보에 기록되어 있어 추산해 보니 1873년에 태어 나셨다. 1943 경 돌아 가셨으니 한 70년 사신 것이다.   나하고는 8년동안 이 세상을 함께 지내셨는데 마지막은 오사카 집 이층 다다미방에 병환으로 누어 계셨다. 

 

병환나시기 전까지 내가 너댓살쯤 되었을 때 할머니는 내게 많은 한국의 구전 동화를 들려 주셨다.  할머니의 이야기 주머니는 엄청 컸다.   무진장의 이야기가 나왔다.  어머니는 자기는 얘기는 잘 못하는 데 할머니는 이야기도 많이 알고 이야기도 잘 하신다고 칭찬을 하곤 하셨다.

 

할머니는 우리와 아무 혈연이 없다.    익헌공 종가집은 증조할아버지때 혈손은 끊어지고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모두 그 윗대의 후손집에서 양자로 들어와 종가를 이어 왔다.   그런데 오사카에서 같이 산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3취로 첫번째 두번째 할머니가 모두 손 없이 돌아 가셨고  이 할머니도 할아버지와 얼마 살지 못하고 할아버지를 잃은 것이라고 한다. 마지막 이 할머니는 할아버지 사후 양아들인 아버지가 어머니로 모신 분이다.

 

파평 윤씨로 가난한 양반 집안이라는 것만 난 알고 있다.   어머니의 이야기로는 가난하니까 부자집 덕좀 보려고 나이 많은 할아버지에 3취로 시집 보냈다고 하셨다.   난 할어버지를 뵌 적도 없고 어머니 말씀으로 기억할 뿐이다.  할아버지 사후 아버지가 나이 많은 사촌의 빚보증을 섰다가 가산을 모든 날리고 말 그대로 우리집은 망했다.   할머니 친정은 덕은 보기는 커녕 나이많은 할아버지의 삼취로 보내서 자손도 못보았고 할머니는 할아버지 사후엔 집안이 망해서 일본으로 건너간 아버지의 부양으로 살다가 돌아 가신 조선조 말기의 비운의 여인이었다.

 

할머니가 돌아 가신후 아래층에 고연(궤연)을 모시고 상식을 올리곤 했다.  궤연엔 할머니 유골(화장한) 도 있었던 것 같다. 난 그것이 무서워 학교에서 돌아와서는 혼자일 땐 집엘 들어 가지 못했다.    할머니가 널 얼마나 귀여워 하셨는데 무엇이 무서우냐고 어머니는 말씀하셨지만 난 유골이 무서웠다.   석달인가 궤연을 모시고는 마침내 어머니는 할머니 유골을 안고 강원도 철원의 할아버지 산소에 가서 합장을 해 드렸다.   물론 궤연도 모두 치웠다.

 

유골이 떠니고 난 다음에야 학교에서 돌아와서 혼자라도 집에 들어 갈 수 있었다.

 

할머니가 내게 들려 주신 구전동화는 몇개 기억하고 있었지만 다 잊어 버렸고 두개정도 기억에 남아 있다.  그중 하나는 일부만 기억하고 있어 여기 남길 수는 없고 단 하나 짧은 이야기는 완전하게 기억한다.

 

할머니의 이야기솜씨는 그냥 말이 아니고 운율어 더해서 이야기 하기 때문에 장난감도 많지 않은 옛날 갈은 이야기를 또 듣고 또 듣곤 했다.     그것은 마치 노래를 듣는 것 깉았다.

 

이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방천 말뚝은 본 일도 없고 뭔지도 몰랐지만 할머니의 설명으로 상상만 했다.    일본에서는 두번째로 큰 도시 오사카에서 태어나 오사카에서만 살았으니 방천말뚝을 본 일이 없다.   할마니가 돌아 가신 이듬해 쯤 오사카 대공습에 대비해 난 양주에 출가해서 사는 큰 누님집으로 소까이(소개 -> 피난)로 보내졌다.   어머니와 케이죠(경성 서울)까지 와서 큰 매형이 양주 신곡리에  데리고 갔다.

 

경부선을 타고 서울에 올 때 방천 말뚝 같은 것을 봤다고 한다.   난 기억나지 않는데 어머니가 그런 말씀을 하셨다.  그걸 처음 보고 저게 할머니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방천말뚝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방천말뚝은 개울 뚝에 소를 묶어 두기 위에 박아 놓은 말뚝을 말하는 것 같다.   지금은 농가에서 일소를 기르는 일이 없으니 방천말뚝도 사라졌을 것이다.

 

구전 동화는 말로 말로 전해 지는 것이다.   책으로 쓰면 말의 운율이 사라진다.   글이 되면 재미가 없어 진다.   또 듣고 듣고 할 만한 이야기가 안된다.   내가 이 이야기를 "또 해줘"  한 것은 할머니의 그 운율을 듣고 싶어서 였을 것이다.

 

 

  

MyRecording.caf

iOS 용 녹음파일


 

세 귀머거리 할멈 이야기

할머니가 들려 주신 한국 구전 동화

내가 할머니에게서 듣고 외운 운율로 녹음을 해 봤다.

구전동화라기 보단

구전 한국판 Nonsense Rhymes 가 더 맞는 이름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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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ierrabird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4.04.09 06:29 신고

    하하 재미있습니다 선배님 이야기를 들으니
    저도 어릴적에 할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장화홍련뎐등 ... 비올때 천둥이치면 왜그렇게 무서웠는지...
    담배피면 괜챤다고해서 곰방
    대 갖다드린 기억이....ㅎㅎ

    • Satsol 샛솔  댓글주소 수정/삭제 2014.04.09 10:17 신고

      요즘은 핵가족이 되어서 조손이 함께 지내는 경우도 많지 않지만 너무나 장난감이 많아서 이런 옛날 이야기로 아이들의 관심을 끌지도 못합니다. 모든 것은 수요가 없어지면 사라지는거 겠지요. 새로운 것이 나오니 그것을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하겠지요.

  2. 경천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4.04.09 09:01 신고

    70 여년 전의 녹음기를 트셨나 했더니 선생님 기억속의 녹음기군요...대단하십니다. ㅋ

    • Satsol 샛솔  댓글주소 수정/삭제 2014.04.09 10:21 신고

      감사합니다. 이 구전 동화가 인테넷에 있나 검색해 봐도 나오지 않아서 그냥 아이패드에 녹음해 봤습니다. 할머니의 운율을 시늉내서 해 봤습니다. 요즘은 식당같은데서 아이들을 보면 (우리집 손녀를 포함해서) 엄마의 스마트폰으로 놉니다. 아이들 용 어플이 무진장이깐요.

  3. 체리베리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4.08.09 02:29 신고

    할머님께서 43년에 돌아가셨는데 글쓴님과 8년을 사셨다고 했으니 글쓴님은 35년생이신가요? 맞으시다면 현재 30대인 저의 조부모님뻘인데 아이패드로 녹음까지 하시다니 정말 대단하시네요! 빨리 다운받아서 들어보고 싶어지네요^^

내 학문의 맥을 이어 준 큰 아들

 

어제는 큰 아들 내외와  고딩 손녀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큰 아들 생일과 큰 손녀의 생일이 하루차이다.  그래서 몰아서 생일 축하 회식을 한 것이다.  

 

큰 아들네가 돌아 갈 때 현관에서 며느리가 아내에게 남편 자랑을 한다.   제 남편이 뉴스에 났다고 한다.   최근에 한 연구 논문이 물리학계의 최고권위지인 Physical Review Letters 에 게재된다는 것이다.  그 사실이 뉴스로 나왔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전문적인 연구 성과가 뉴스로 나오기는 흔하지 않다.    아마도 큰 아들이 재직하고 있는 숭실대학에서 뉴스거리로 매체에 제공해 준 것이 여러 뉴스매체로 퍼져 간 것 같다.

 

아들이 같은 대학 같은 학과 31년 후배이고 아들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 같은 학문을 한다는 것도 흔하지 않지만 같은 분야를 연구하고 내가 하던 분야의 연구를 이어 받아 연구 논문을 쓴다는 것은 더더욱 흔한 일이 아니다.  

 

"분배함수의 영점"은 50년대에 중국계 미국 노벨 물리학자인 CN Yang 과 TD Lee 가 처음 제기한 문제로 50여년간 난제로 풀리지 못했던 상전이와 "분배함수의 영점" 의 관계다.   내가 물리 문제 해결에 전산기법을 도입해서 이 문제를 풀었다.   그 때 그 해답을 얻었을 때 희열이 20 년이 지난 지금에도 생생하다.  

 

그 "분배함수의 영점" 의 방법을 큰 아들이 자신의 전공분야인 담백질 접힘문제에 적용하여 그 상전이의 기제를 밝히는데 성공한 것이다.    아버지로서뿐만 아니라 내 학문의 맥을 이어 주었다는 점이 더 자랑스럽고 기쁘다.

 

 

 

 

 

 

    

20년전에 내가 Physical Review Letters 에 발표한 "분배함수의 영점"에 관한 논문

그 논문도 내 단독 논문이다.

 

 

 

 

큰 아들이 분배함수의 영점(Zeros) 기법을 담백질 폴딩에 적용하여 상전이의 기제를 밝힌 논문이

Physical Review Letters 에 실리기 되었다는 뉴스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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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illez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3.06.23 19:50 신고

    멋지고, 부럽습니다. 저도 제 아들이 제 연구 이어서 하게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2. 경천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3.06.24 09:02 신고

    축하드립니다. 아드님께도요..^^

뿌리깊은 나무

 

얼마전 방영이 끝난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를 케이블에서 보고 있다.    여행을 자주 다니다 보면 TV 드라마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아니 거의 놓친다.   지난 가을 미국 여행에서 돌아와 보기 시작한 "천일의 약속"(2011/11/17 - [일상, 단상] - 천일의 약속)도 실제로 실방영시간에 본 경우는 마지막 몇회뿐이다.   

 

방영중에 서울에 있다 해도 방영시간이 우리의 취침시간과 겹치기 때문에 다음날 적당한 시간에 유료 VOD 로 보는 경우가 많다.     종영된 드라마를 한데 묶어 보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런 드라마는 방영후 드라마 평을 읽거나 또는 주위 사람들에게  괜찮은 것이란 이야기를 듣고 골라 볼 수 있어서 좋다.

 

뿌리깊은 나무는 시청율도 높고 평도 좋아서 언젠가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또 한석규씨는 내가 좋아하는 배우인데 이 드라마에서 열연을 했다고 해서 꼭 보고 싶었다.

 

며칠사이에 거의 반을 봤다.    조금은 황당하고 풍부한 액션이 여느 사극과 다르다는 점(요즘 트랜드인것 같기도 하고)을 빼고는 정말 드라마틱하게 만든 TV 드라마다.   세종대왕은 내 직계 할아버지이니까(2009/02/25 - [일상, 단상] - 세종대왕의 Y-염색체) 더 관심도 간다.  

 

그런데 이 드라마들 보다 생각이 난 것은 요즘에 와서야 깨닫게 된 우리집의 일종의 가보인 한글 고서가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우리집에서 내려오는 많은 서책이 대부분 일본 오사카에서 태평양전쟁때 공습으로 불타버리고 어찌어찌해서 남은 얼마간의 서책도 또 여러 사유로 망실되고 어머니가 내게 남기신 유일한 조상에게서 물려 받은 서책을 내가 또 잃어 버린 것이다.

 

2년전 리모델링할 때  집안세간을 한 한달 가량 이삿짐센터에 맡긴 일이 있다.   이 때에 잃어 버린 것 같다.  이사를 갈 때 마다 귀중품을 포함 물건을 한 두개를 잃어 버리곤 했는데 이 번엔 이 고서다.     책이라기 보다 고문서라고 봐야 맞을 것 같다.

 

한동안 잃어버린 것 조차 모르다가 생각이 나서 찾게되면 사라진 것을 알게 된다.  이 책자도 한 일년후에야 사라진 것을 알았다.  어쩌면 다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조금은 있다.  

 

물론 이 고서가 다른 사람에게 그 값어치가 얼마가 되는지 모르지만 자기 조상의 유물이 아니라면 골동품의 가치밖에 없다.   하도 낡아서 십여전에 표구까지 한 책이다.  조상 할머니 중에 어떤 분이 육필로 쓴 책자이다.  40페이지가 안되는 작은 고문서다.   

 

내게 9대조가 되는 조선 통신사 부사 이언강(1648 - 1716) 할아버지(2007/12/27 - [일상, 단상] - 조선통신사 이언강 할아버지)의 부인 9대조 할머니 안동 권씨가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너무 슬퍼하여 병이 나 돌아 가셨기에 임금(영조)이 정표(표창) 를 했다는 이야기가 조선실록에도 나오는데 누군가 그 후손이 그 경위(시말)를 적은 책자다.

 

다행한 것은  이 책을 스캔해 둔 것이 외장 하드에 백업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책이 고문이라 읽기 힘들어 옛 우리글을 다시 공부해서 풀어 볼 요량으로 스캔해 두었다.  2008년에 Scan 한 것으로 되 있으니 리모델링 (2010) 2년전이다.    

 

옛글,  서체,  문체 등 연구하는데 자료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여기에 그 복사본을 zip 파일로 올려 놓는다.   누구던지 필요하면 가져가서 열어서 보시기 바랍니다.   파일 크기가 10 MB가 넘어 둘로 나누어 올린다.

 

 

 

 

 

 

 

이 정표 시말 첫페이지에 나오는 시독관 유건기가 임금께 아뢨다는 이야기는

아래의 조선실록에 나오는 항목고 일치한다.

 

 

 

조선실록 영조편에 나오는 이언강 아내 이야기

이언강 할아버지가 1716년에 돌아 가셨으니

할머니도 그 즈음으로 추측되고

<정표시말>이 그러 멀지 않은 후에 쓰여졌다면

1716년 조금 후일 것이라 추정된다.

한 300 년전 <한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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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오래된 편지 하나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신기한 일이다. 

 

1938년에 쓴 거라 추정되는 셋째 누나의 편지에 누나의 일기장 일부가 옮겨 적혀 있었다.  거기에 네살 난 동생의 이야기가 적혀 있다.  

 

조선 갑반의 종가집 며느리로 시집 온 어미니는 손이 귀한 집에서 6남매를 두셨는데 위의 4남매는 강원도 철원의 종가집이 아직 무너지기 전에 두셨다.

 

어머니와 자식들을 남기고 일본으로 건너간 아버지가 일본에 터를 잡고 어머니와 아이들을 다시 일본으로 데려간 다음 또 두 남매를 두었는데 그 막내가 나다.   그래서 위의 4남매와 마지막 두 남매는 나이차이가 많다.  

 

셋째 누님은 그러니까 선4남매의 막내지만 나와는 13살 차이가 난다.  

 

그래서 그런지 난 큰 누님들의 귀염둥이었던 같다.  

 


 

‥………

1938년 5월 29일(일)

임시 시험이 어제로 끝났다.   점수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지만 홀가분한다. 

(남)동생의 말소리도 많이 자랐다. 작년에 <신군노우따>부를 때와는 영 다르다.  요지음 부르는 노래의 가사는 대체로 또렷하게 발음한다. <미요 토오까이노 소라아께떼>하고 노래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너무 귀여워 죽겠어서 레코드래도 취입해서 영구히 남겨 놓고 싶은 기분이 들 지경이다.  동생이 나중에 어른이 되어 4살쯤 되었을 때 자기의 목소리였다는 것을 알고 듣게 된다면 얼마나 좋아 할까 생각해 본다. 

‥………

 

70여년전의 내 이야기가 누나의 일기장을 통해서 읽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사라져 가는 옛것들에 대하여....

 


 



 

1938(?) 5월 29일 일기


이 일기는 셋째 누나가 의정부에 시집 가 있는 제일 큰 누나에게 쓴 편지에 

적어 보낸 것이다.

어머니의 유품에서 나온 것 같은데

어머니는 어떻게 셋째 딸이 맏딸에게 쓴 편지를 갖게 되었을까 궁금하다.

난 이 편지의 존재도 몰랐고 작년(2010이 작년이 되었다) 5월에 집을 리모델링할 때

세간을 정리하다 발견해 나중에 보려고 챙겨 두었던 것이다.

이 편지의 마지막 페이지엔 내가 살 던 오사카 집의 도면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 때문에 나중에 보려고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사카 여행을 준비하다 어렸을 때 살 던 집 생각이 나서 그 옛편지를 꺼내  읽게 되었고

거기에 내가 등장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 이야기를 오늘 처음 읽은 셈이다. 


 

 

얼마후에(1942년?) 셋째 누나는 토쿄에 사는 매형과 결혼했고

난 국민학교에 들어 간 다음 첫 여름방학에 바로 위의 누나와 함께 토쿄 누님댁에 놀러 갔었다.

1943년(?) 여름 토쿄에서.


Posted by Satsol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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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유필(遺筆)

 

내 아버지는 내가 10번째 생일을 지내고 다섯달이 채 안 된 1946년 3월에 돌아 가셨다.  그나마 마지막 2년 가까이는 전쟁으로 헤어져 살아야 했기 때문에 8년 남짓만 난 아버지와 함께 산 셈이다.  

 

아주 어렸을 땐 흐릿하지만 나를 무척 귀여워 하신 것 같은 느낌이 남아 있다.

 

조금 더 커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내가 국민학교에 들어가서 얼마 안되어 어머니가 돌아가신 할머니의 유골을 모시고 철원 선산에 가셨을 때였다. 

 

오사카 집엔 아버지와 바로윗 누나 셋이 남았다.  누나는 나보다 3년 위라 학교가 늦게 파해 내가 혼자 집에 있을 때가 많았다.    난 심심해서 집에 있는 설합에서 몰래 돈을 꺼내다 문방구에서 낚시대를 사서 집에서 가까운 아지가와에서 낚시질을 한 일이 있다. 

 

허락 없이 멋대로 돈을 꺼내 갔으니 잘못한 짓이지만 아버지는 내가 낚시하는 곳 까지 오셔서 집으로 데리고 가셨다.  어미니 같으면 벼락같은 호령이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별로 꾸중도 하지 않으신 것 같다.   할머니 고연이 모신 집에 혼자 들어 가는 것이 무서워서 학교가 파해도 집에 들어 가지 않고 밖에서 나돌았던 것이다.   그것을 가엾게 여기셨던 같다.

 

얼마 안 있어 난 소까이(피난)이란 명목으로 오사카를 떠나야 했다.  미군의 오사카 공습이 임박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의정부시가 된 양주에 시집가 사는 첫째 누나집에 보내졌다.  그래서 난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바로 위의 누나와 헤어져 살아야 했다.

 

전쟁이 끝나고 우리 집은 귀국하여 다시 합쳤지만 아버지와 함께 산 기간은 불과 반년 남짓했다.

 

대전에 터를 잡아 다시 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나를 대전의 국민학교에 전학을 시키기 위해 가까운 거리의 국민학교에 전학 수속을 하기 위해 날 데리고 다니셨다. 

 

그러나 그런지 며칠 안되 아버지는 원인모를 병에 걸려 자리에 누우셨고  1주일 남짓만에 세상을 떴다.  46세의 생일을 맞기 전이었다.  . 

 

그것이 내가 아버지와 함께 산 전부다.

 

지난 4월 우린 우리가 사는 5층 집을 수리하기 위해 모든 가구와 짐을 싸서 이사짐 센터의 보관창고에 맡기고 4층의 원룸에서 20여일 지냈다.   그 때 우린 또 다시 많은 짐을 버렸다.  

 

그중에 하나가 아주 헌 책이나 문서따위였다.   이사짐을 나르던 일꾼이 버리라고 분류했던 짐에서 고문서 한 뭉치를 가지고 내려와 귀중한 옛 문서같은데 확인해 보라고 남기고 갔다.

 

20여년전 어머니가 돌아 가셨을 때 어머니의 유물 가운데 아버지의 유물이 있었던 같다.   그 땐 아버지의 유물이라고 남겨 놨던 것인데 그 존재조차 잊고 있었다.   

 

그냥 버렸다 해도 기억 못하는 물건들이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경성고등보통학교(京城高等普通學校 -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에 다닐 때 썼던 습자와 작문 유필이었다.

 

옛날에는 집에서 한문을 배우다 늦게 신식학교에 가기 일수였다.   아버지역시 늦게 학교에 들어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의 고등보통학교에 들어 간 것이 지금의 고등학생의 나이였던 같다.   따라서 현재체재로 보면 중학교에 해당하는 학교를 고등학생 나이에 다녔던 것이다.

 

남겨 진 일어 작문 청서장(노트)는 1917~8년 고등보통학교 1~2학년 때의 것이다.

 

 

 

대정 6년은 1917년이다.

경성고등 보통학교 1~2학년 때

일어 작문 노트 표지

 

 

 

북한산에 오르다.라는 제목의 일어작문 

당시의 필기도구는 붓으로 쓴 것 같다.

わらじ(草鞋)는 짚신을 말한다.

당시엔 아직 구두가 일반화되기 전이었던 같다.


 

 

  

 

이 노트책은 경성보통고등학교 생도용 전용으로 만든 노트 같다.

2장을 접어서 전통적인 한지책자식으로 만들었다.

한 페이지가운데를 펴서 보면

경성고등보통학교생도용지라고 인쇄되어 있다.

 

 


 

 


<북한산에 오르다> 라는 일어 작문의 한 페이지

 

 

 아래에 번역해 봤다.  한자 투성이로 요지음 잘 안쓰는 일본 낱말들이 많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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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산에 오르다.

짚신(わらじ(草鞋))을 꽉 동여 매어 신고 <벤토(도시락)>을 들고 창의문을 나선 것은 우리 1,2년생 400명의 생도들이었다.   4면을 보면 초목은 노랗거나 빨갛게 물들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과시하고 있고 밭에 심어 놓은 작물들은 추수를 재촉하고  있는 듯 하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모두가 가을의 풍경이다.

마을 몇개를 지나 한 십리쯤 가니 북한산 자락에 이르렀다.  이제부터 올라가는 것이다. 

산 꼭대기를 올려 보면 푸른 솔나무와 붉게 단풍든 잎새들이 햇빛에 반짝이고 있고  산정은 웃으면서 유람객을 손짓하며 반긴다.

바위는 뾰죽하여 날 선 칼과 같고 길은 험준해서 걷기가 위험해 보였다.

산 허리에 이를 때까지는 별로 어렵지 않았지만 산 중턱 부터는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혼자 그냥 앉아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목이 말라 산간에 흐르는 계곡물에 입을 적시고 다시 오른다.  오르고 또 오른다. 

마침내 북한산성 남문에 도달했다.  여기에서 일단 쉬어 가기로 했다.

남쪽을 보면  경성(서울)의 한 구석에서 밥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올라 푸른 하늘을 덮는다.

한강은 마치 은실같이 보이고 평야는 노란 돗 자리를 깐 것 같아 한편의 활동사진(무비)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 부터 하산이다.

내려오는 길은  오를 때같이 어렵지 않다.  계곡사이를 이리 저리 돌아 목적지에 닿았다.

맑은 물은 좔좔 흐로고 산영루(山暎樓)는 홀로 쓸쓸이 남아 옛 영화를 뽑내고 있는 듯했지만 마루판은 누군가가 떼어가서 서글픈 모양세였다.

이를 본 우리들은 어떨 생각을 했을까!  공덕심(공중도덕)이 모자라는 사람이 너무 많구나 였다.

옛날 관리들의 선정비가 여기저기 공허하게 서 있다.    

문득 뒤를 돌아 보면 산정의 바위들은 삼각형을 이루고 제법 험한 모양으로 찌를 듯 서 있다.   많은 봉우리중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가 백운대가 아닌가 싶다.  여기에 올라 보면 백리 넘게 보인다고 한다.

강화도와 인천도 일의대수(一衣帶水)의 간격으로 눈앞에 보이고 보통은 꽤 높다고 생각했던 남산이나 북악산도 여기서는 한낱 흙더미(土塊)로 보인다고 한다. 

산 밑에는 옛날 행궁의 집터가 남아 있어 고적으로도 명성이 높다. 

한 시간 정도 휴식한다기에 우린 뿔뿔이 헤어져 보자기에 싸가지고 온 도시락을 만나게 먹었다.   (舌鼓(したつづみ)を打つ)

재미 있는 놀이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느새 오후 1시가 넘었다. 

선생의 구령에 따라 귀로에 나섰다.   산을 넘어 창의문 밖에 와서 해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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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tsol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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