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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땐 나도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오늘 박완서님의 <그 남자네 집>을 끝냈다.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침대 머리에 달린 아이패드로 나머지를 다 읽었다.   이 책의 뒷부분은 그 소설에 대한 어느 평론가의 평론이었기 때문에 소설은 상당한 페이지를 남기고 생각 보단 빨리 끝났다.

 

소설 배경이 50년대 625 전쟁직후의 서울이라 읽는 내내 50년대 나를 회상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서울에서도 바로 내가 살던 곳이 혜화동 이화동 원남동이라 소설에 나오는 대학천, 이화동, 동대문, 청계천등은 내 뇌리에 새겨진 지난날들과 중복되었다.

 

여러가지로 박완서님은 내 인생역정과도 비슷하다.  그 분도 늦깎이로 40이 되던 1970년 소설가로 등단한다.  내가 서울대 물리학과에 부임하여 본격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해가 바로 1970 년이다.   ( 2013/12/16 - [일상, 단상] - 응답하라 1970 - 내 생애의 전환기 )

    

그 분이 문리대 국문학과에 입학하자마자 625가 나 학교를 졸업하진 못했으나 실질적으로 내 문리대 선배가 된다.    625 전쟁에서 받은 쓰라린 가족사는 내 가족사와 거의 비슷하다.   아니 어쩌면 그 때 생존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가족사일 수도 있겠다.

 

나도 원래 물리학자의 꿈을 꾸기전엔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625 직전에 한 때 이화동의 셋방에 살았다.  그때 종로에서 이화동으로 꺾어 들어 가는 왼쪽 길 가에 세(貰)책집이 있었다.  어머니가 소설을 좋아 하기 때문에 학교에서 돌아 오는 길에 그 세책집에서 책 빌려오는 심부름을 하곤 했다.  난 어머니가 빌린 책도 읽었지만 나만의 취향인 추리소설들을 읽곤 했다.    김래성 방인근의 소설들을 어머니 심부름인양 하고 빌려서 열심히 읽었다.

 

소설을 좋아하다 보니 나도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중에서도 탐정소설이 좋아서 탐정소설작가를 꿈꾸었다.     월북 소설가 <이 태준>이 쓴 <소설작법>인지 <소설창작법>인지 그런 책도 헌 책방에서 사서 공부하기도 했었다.  

 

사실 이 꿈은 그 후에도 탐정소설(지금은 미스테리 소설이라고 많이 들 하지만)을 많이 읽으면서 계속해서 속에 품고 있었다.    그래서 은퇴해서 그 꿈을 실현해 보고 싶다는 말을 아내에게도 한 일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은퇴후엔 소설 쓰기 보단 프로그램 하는 것에 더 매료되어 소설 써본다는 생각은 잊어 버렸다.    그 대신 플래시를 배워서  주사위를 그렸다 .  

2014/03/05 - [일상, 단상/잡문] - 내 끈질김 - 내 플래시의 첫 작품 주사위

 

윗글 마지막 부분에 쓴 멘트

 

"Donald Knuth 교수는 프로그래밍은 시를 쓰거나 작곡을 하는 것과 같은 심미적 체험을 안겨 준다고 말했다."

 

가 소설을 쓰고 싶어 했던 욕구를 만족시켜 준 것 같다.

 

내 프로그래밍은 실용적 프로그래밍이기라 보단 무모하달 만큼 비실용적이다.   그래서 그게 어쩌면 시나 소설을 쓰는 산고(産苦)를 주고 만족감을 주었는지 모른다.   

 

그래도 역시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는 계속 이런 잡문이라도 쓰면서 충족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본다. 

 

 

**********박완서의 <그남자네집> 엔 아래와 같은 사진의 이미지가 많이 등장한다.*********

이 사진들은 소설에 있는 사진이 아니라 google 이미지 검색에서 찾아 낸 것들이다.

주로 미국 소스다.   당시에 이런 사진이나마 남길 사진 작가가 얼마 없었을 것이다.

몇년전에 "서울 타임캡슬을 열다" 란 사진전에서 이런 비슷한 사진 몇점을 본 것 같다.

 2009/01/11 - [뚜벅이 기행] - 종로내기의 종로 나들이

 


 

 

 

  전쟁직후의 청계천

 

 

 

 1950년대의 건어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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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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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skim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4.04.01 00:10 신고

    청계천 사진은 충격이네요..@.@ 지금 우리는 옛날 임금이 누렸던 사치보다 더 한 사치를 누리고 있는데도 그 욕심이란게 한이없는것 같습니다.
    소설가....아직 늦지않았습니다~~^^

    • 샛솔  댓글주소 수정/삭제 2014.04.01 10:33 신고

      청계천은 그랬습니다. 땅 높이의 하꼬방은 점포였고 그 위에 일어 설 수 없는 높이의 다락방은 살림집이었습니다. 개울물가의 하꼬방(판자집)밑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은 넝마주의나 거렁뱅이의 잠자리였고 살림터였습니다.
      소설쓰기는 이 블로그 쓰기로 충분합니다.

  2. sierrabird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4.04.01 05:44 신고

    60년대 중반 저희가 대학 다닐때만해도 동대문 북쪽 청계천은 저 모양이었습니다
    소설가는 직업상 거짓말을 많이 해야되겠죠 ?

    • 샛솔  댓글주소 수정/삭제 2014.04.01 10:26 신고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거짓말을 좋게 이야기해서 fiction 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박완서님의 데뷰작 <나목>도 박수근 화가를 회고하는 글을 쓰다고 너무 쓸 분량이 적어서 살을 붙여 fiction으로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그 남자네 집>도 자기의 첫사랑의 회고담인데 살을 많이 붙였겠지요. 그련에 사람의 기억은 굉장히 부정확해서 기억에 바탕둔 회고록도 fiction 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일부러 거짓말을 안한다 해도 미화하는 쪽으로 기억이 남이 있을 것 같네요.

  3. 경천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4.04.01 09:55 신고

    요즘에 저보다 약간 선배들이 은퇴하신 후에 수필(or 자서전?)을 써서 책만들어 돌리시곤 합니다.
    선생님은 블로그의 글 량 만으로도 책 몇권 쓰셨습니다. 소설아닌 수필로..
    고정 독자도 꽤 많으실테니 소설가의 꿈을 이루셨습니다. ㅋ

  4. 샛솔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4.04.07 19:05 신고

    감사합니다. 옛날 이야기에 관삼같는 사람이 몇사람이나 되겠습니까? 이것 저것 많이 써 댓더니 하루 방문객이 꽤 늘었습니다. 최근의 방문객 증가는 잶은 친구 한분에 태그를 많이 달아 보라고해서 그렇게 했더니 그 효과인것 같고 특히 블루링크에 관심이 많아서 찾아 온 것 같습니다.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도 충족되고 제 메모리 리프레셔 역할도 하고 이렇게 하루에 방문하는 3,4 백 명 독자도 있고 해서 만족하고 있습니다.

  5. Jellyb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5.01.19 18:49 신고

    저희 어머니가 청계천 이야기를 늘 해주시곤 하셨어요. 하꼬방이란 단어랑.. 늘 물이 들어찼다고.
    저런데였군요 청계천이. 저런 모습이었군요.
    거기서 천진난만하게 수영을 하던 사진도 있어요.
    엄마도 애였죠. 그걸 잊어요. 눈에 당장 보이지 않으니까.
    더 훌륭한 자식이 되고 싶어요.
    엄마의 인생을 보상해줄 수는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어요. 인생은 각자의 것이니까요. 하지만 부모 자식을 넘어 한 인간으로서 그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준다면. 그들도 아이였다는 것을 기억해드린다면. 가끔 아이로 돌아가도 좋다고 알려준다면. 그것보다도 큰 효도가 있을까 저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도요, 아무리 그래도 제가 부모가 될 순 없어요. 그게 안타까워요.
    대신에 나의 아이를 낳게 되면 최선을 다해 키워야겠죠... 내 부모를 대하듯이.
    그래서 내리사랑이라고 하는가보죠.
    저는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로부터 내려온 자손이니까. 그분들이 살아서 저를 보신다면 또 얼마나 예쁘겠어요.
    친척 아이들만 봐도 내 자식같고 귀여운데. 자기 자식은 얼마나 예쁘겠어요. 자기 손주는 얼마나 예쁘겠어요. 그 분들의 노고와 인생과 사랑에 힘입어 제가 이만큼 살 수 있게 되어 정말 감사합니다.
    샛솔님의 연륜과 살아오신 세월에 존중하는 마음이 들고, 이렇게 사진을 올려주셔서 잠깐 되짚어 볼 수 있는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6. 샛솔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5.01.20 22:18 신고

    긴 댓글 감사합니다. 어머님을 생각하는 마음 감동적이었습니다. 저와 똑 같은 생각을 갖고 계시군요. http://boris-satsol.tistory.com/84
    모든 사람은 자기의 업을 갖고 살아 갑니다. 우리 세대는 우리세대대로 그런 시대에 태어나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억울한 것도 아쉬운 것도 없습니다. 청계천은 새로 단장하면서 조금 복원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 관광자원용으로 사실보다 고급스럽게 판자집을 지어 놓았습니다. 청계천 문화관 앞입니다. http://boris-satsol.tistory.com/235

"참 좋은 시절"  이란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이른 시간의 KBS 의 주말 드라마는 보통은 늘 본다.    그런데 내 취향에 맞지 않거나 내가 별로로 생각하는 텔런트가 출연하는 경우에는 보다 말다 한다.  
 
"내 딸 서영"이라는 드라마도 조금 보다 말았다.  "최고다 이순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다.   "아이유"를 좋아 하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에 "왕가네 식구"들이란 드라마는 몇번 보다 그만 두었다.  혐오스러운 드라마였다.
 
 
그 다음으로 나온 "참 좋은 시절"은 김희선이 좋아서 보기 시작했는데 아직은 계속 보고 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생겼다.    참 좋은 시절은 지금 진행되고 있는 에피소드의 시절을 뜻하는지 아니면 15년전 김희선이 고등학교 시절을 말하는 지 궁금해 졌다.     김희선이 분한 차해원은 고등학교 시절엔 부자 였지만 좋아 하던 애인 강동석(이서진)에  버림 받았고 현재의 차해원은 가난하지만 강동석의 사랑을 받게 되기 시작한다.      언제를  "참 좋은 시절" 이라 부르고 있는 걸까!
 

아내는 책을 읽으면 끝내지 않으면 못 견디는 스타일이라 엄청 많은 책을 읽는다.     최근에  Amazon Kindle 에서 산 책만 해도 수십권이다.   내가 산 책도 서너권 되지만 다 읽지 못하고 있다.   난 지금  자기전에  머리위에 매어 달린 아이패드로 박완서의 "그 남자의 집" 을 읽고 있다.   몇페이지 읽다가 잠 들기 때문에 한 반달은 더 지내야 끝날 것 같다.
 

"그 남자의 집" 시절은 현대(한 10년전 , 20년전?)와 내가 대학생시절이었던 박완서씨의 신혼시절이 교차하면서 오간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나 또한 50년대 초와 현재를 오가게 된다.   그래서 지금이 참 좋은 시절인지 그 때가 참 좋은 시절이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그 땐 거의 모두가 가난했다.   그러나 난 젊었다.    지금은 수입 맥주를 마실 만큼 세상이 좋아 졌고 나도 수입맥주를 사먹을 정도는 되었다.   그러나 그 땐 젊어서 꿈이 있었다   전개될 미래에 대해 기대와 설레임이 있었다.  내 운명의 여자는 누구일까?   이성에 대한 그리움도 있었다. 
 

그 당시 아내는 내가 살고 있던 혜화동집에서 몇10 미터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 잠시 함께 산 내 재당질녀(7촌 조카)와 여고 한반이었다.      그 조카는 한 때 가정교사로 지금 처제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런데도 나와 아내와 서로 몰랐다. 
 

박완서씨의 "그 남자의 집"에 그 시절의 종로, 동대문, 청계천이 나온다.    그 남자의 작은 누나는 <여의전(여자의과전문학교)>을 나왔다.  <여의전>은 명륜동에 있었다.    혜화동 로타리에서 명륜동으로 가려면 바로 전차길에 정문이 나 있었다.   당시의 많은 여의사들은 여의전 출신이었다.   왠지 그 시절이 "참 좋은 시절"  같이 느껴지는 것은 시간이 빨리 흘러 가기를 고대했던 꿈 많은 시절이었기 때문일까?
 

그 때(내 대학 3년쯤 시절) 내가 가정교사로 번 돈으로 욕심것 사 모았던 양서중에서 Stratton 이 쓴 전자기학 책이 있었다.      MIT 교수가 쓴 책이다.    물리학과나 전기공학과(당시(1941)엔 전자공학과란 없을 때였다.)의 대학원에서나 가르치는 내용이었다.    
 

많은 책을 버렸는데도 그 책이 아직도 서가에  꽂혀 있다. 
 

무심히 꺼내 보니 그 시절 그 책을 독습하려고 읽기 시작한 처음 몇 페이지가 눈에  들어 온다.    이 책은   쿠롱의 법칙으로 시작하는 전자기학 책과는 달리  막스웰 방정식으로부터 연역하는 색다른 접근법을 썼다.   학부 2,3 학년에게는 읽기 어려운 책이다.    어려운 책이라 한탄했었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래서 책을 버리지 못한 것 같다.
      

당시의 내 깨알 같은 노트가 적혀 있다.   한자 투성이다.    한자를 넘 좋아했었다.
 

아 그리운 그 시절이여! 
 
 

 

 

 

책 마진에는 깨알 같은 노트고 적혀 있다.

 

 

 

자세히 보면 한자 투성이다.

 
 
------------------
 
이 글은 Evernote 에서 쓴 글을 tistory 로 불러 올 수 있는 pluggin 을 새로 오픈했다기에  시험하기 위해서 썼다.  Evernote 에 끄적끄적 단상을 적었던 것을 여기에 옮겨 보려고 시도했다.    사진도 함께 온다기에 여행지에서 블로깅하는데 도움이 될까 생각해서 시험한 것이다.    그런데 티스토리에서 에버노트의 글의 목록까지는  보이는데 불러 오려고 그 목록중에 하나를 클릭하면 글이 에디터에 올라 오지 않고 아래와 같은 팝업창이 뜨고 아무 진전이 없다.  
 
 

 

 

Everenote 에서는 plugin 이 성공적이라고 이메일이 왔다.

 

 

 

시험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에버 노트를 만들었다.

Tistory 태그만 붙이면 위와 갈은 list 가 올라 온다.

그러나 이 중 하나를 클릭하면 아래와 같은 빈창만 뜨고 멎어 버린다.

 


 

에버노트에 쓴 글을 클릭하면 빈 pop-up 창이 뜨고 아무 메시지도 없다.

 

 


Tistory 의 plugin 이 아직은 불완전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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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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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기억, 역사 -  1990 연변 물리학 대회

 

기억과 역사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모두 저장된 기록의 편린을 모아 이야기를 창작한다는 점이다.

 

창작을 한다는 말은 지어 낸다는 말이다.   사진을 찍어둔다든가 비디오를 찍어 두는 것과는 다르다.   조각조각을 모아 이야기를 지어 낸다는 말이다.

 

그래도 최근에는 사진이라는 것이 있어 기억의 편린을 좀더 사실적으로 기술하거나 이야기하게 해 준다.

 

언젠가는 해야겠다는 일을 오늘 조금 해 봤다.   1990년 7월 15일 부터 4일간 연변에서 현대 물리학 국제회의라는 것을 개최했다.    Brown 대학 교수였던 내 동기 동창인 고 강경식교수가 일을  주로 추진했다. 

 

1979년 닉슨이 이니시에트해서 미중 수교가 이루어졌고 미국은 중국을 인정하고 교류하기 시작했다.    등소평의 개혁정책으로 중국이 세상에 문호를 열자 중국은 비록 한국과는 수교전이었지만 간접적인 교류가 이미 시작된 때였다.

 

1990년은  1992년 한중수교가 성사되기 2년전이라  우린 중국에 들어 갈 수 있는 비자를 서울에서는 받을 수 없었다.   그 학회에 참석한 서울측 참가자 22명은 모두 홍콩을 거쳐 홍콩에서 중국입국 허가를 단체로 받아서 베이징 행 항공기를 탈 수 있었다.  북한측에서는 5명이 참가하였다.

 

미국측 참가자 16명 연변측 참가자 33명 모두 76명의 물리학자가 참가한 대회였다.    북한측 물리학자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이 학회를 연 큰 기대중의 하나였다.   분단 40년 가까이 되었는데 우린 아무 교류도 없었다.  북한 학자들은 거의 세계와는 교류가 없었고 그러니까 연변에 나올 수 있다는 것은 아주 큰 이벤트였던 셈이다.

 

동유럽 소비엣 위성국가들이 하나 둘 붕궤되고 있을 때였지만 소비엣 연방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을 때였다.    그래서 북한학자와 함께 하는 학회를 한다는 것엔 우리에겐 큰 기대를 가져다 주었다.

 

학회가 끝나고 돌아 오는 길에 두만강,  백두산, 베이징등을 관광했다.    연변에는 이미 한국의 영향이 많이 들어 가 있었다.  노래방에는 주현미의 노래가 나왔고 여기저기 한국 상품도 상륙해 있었던 거로 기억된다.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건 내 창작인가?

 

언젠가 남북이 통일이 되어 한국 물리학사를 쓴다면 이것도 하나의 역사적 사료가 될지 모른다.   여기에다라도 남겨 두면 그 것이 자료로 쓰이기에 손 쉬울 것 갈아서 늘 해 두려고 했던 작업이었다.  이 사진들이 내 앨범에 종이로 남아 있으면 결코 그 누구도 볼 수 없을 것이다.

 

 

 

  

 

 

 

이 학회가 끝난 다음 proceeding 이 나왔고 내 논문도 들어 있 이 프로시딩은 내가 은퇴하면서 연구실 도서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사라졌다.  물리천문학부 도서실에는 있을 것이다.

이 문서는 <한미과학기술교류 100년과
재미과기협의 역할>이라는 문서중에서 연변학회에 관한 부분만 클립한 것.

여기엔 이어서 2년마다 연변대학에서 이 학회를 열기로 합의했지만

그 이후 학회는 열리지 못했다.

1990년 학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것이다.

 

 

 

 

연변학회측에서 나온 마중인원

표말 든 이 왼편 반소매차림이 필자

 

 

 

 

 

어디엔가 단체 사진이 있을 지 모르지만

여긴 11명이 찍혔다.

왼쪽 부터

(이름 기억미상,  권오석박사,  북한학자1(?),  북한 학자 조병래씨,  북한 학자(이름 기억미상),  북한측 단장 여철기씨,

 김두철, 송희성,김정욱(Co-organizer),이구철(나), 강경식교수(Organizer))

 

 

 

 

왼쪽이 안창림박사(현 이대교수), 당시에 가장 젊은 병아리 Ph.D.  미국측인지 한국측으로 참가했는지 기억이 안남.

가운데가 나

제일 오른쪽이 조병래 북한 학자

이분과 내가 학회 내내 친하게 지냈는데 전공 분야가 같았고 내가 친절했기 때문인지 나를 좋아해서

나와 학회 내내 식사 테이블에서는 내 옆에 앉아서 이야기도 많이 했다.

이분 또한 고향이 남한의 진주라고 했던 것다.

625 때인지 625 전인지 월북했다고 한다. 

 

 

 

 

조병래 박사의 발표 같다.

 

 

 

 

만찬테이블에서

왼쪽부터 조병래 북한 학자, 나, 그리고 오른쪽이 연변측 참가자중 시니어 멤버(단장이 아니었나 싶다) 였던 것 같다.

 

 

 

 

내 발표 장면을 찍어 준 것 같다.

 

 

 

 

왼쪽이 한양대의 이철희(?) 교수(상대론),  조병래 북한 학자,  나

뒷줄엔 서울대 김제완교수 

 

 

 

두만강 가는 길가에서

북한 학자와는 관광을 함께 하지 못했다.

미국측에서 북한 학자의 체재비를 모두 지원해 주었는데

관광비까지는 대 주지 못했다.

대 주었다 해도 함께 갈 수 있었을런지는 알 수 없다.

 

 

 

 

용정시의 <용정> 이름의 유래를 적은 우물옆 비석아래에서

용정하면 내가 좋아 하는 시인 <윤동주>님이 떠 오른다.  

 

 

 

 

두만강 중국측 국경공원에서

 

 

 

 

두만강 국경 공원에서

 브라운대 강경식 교수와 함께

대학 동기 동창으로 이 학회를 조직하고

진행하는데 애를 많이 썼다.

아쉽게도 고인이 되었다.

 

 

 

 

두만강변에서 싸가지고 온 점심을 먹었다.

당시엔 관광지에도 식당이 많지 않아 이런 곳에 올 때엔 점심을 싸가지고 와서

나눠주었다.

 

 

 

 

두만강

강폭도 좁고 갈수기엔 그냥 건너 다닐 수 있을 것 같다.

 

 

 

 

백두산 초입

 

 

 

 

백두산 중턱

 

 

 

 

백두산 오르는 길

 

 

 

 

등산로의 일부는 돌밭이었다.

 

 

 

 

마침내 천지에 닿았다.

날이 흐려서 천지의 전경은 볼 수 없었다.

연변 조선족 부인들 한 그룹이 이미 올라와 있어

함께 사진을 찍었던 같다.

 

 

 

 

가운데는 연변교포같은데 누군지 모른다.

서울에서 참가한 한양대(?) 교수

 

 

 

 

 노란 우비를 입은 한양대(?) 교수가 천지에 올라 감격해서 애국가를 부르자고 제안했던 것 같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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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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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천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3.07.01 10:28 신고

    한중 수교 이전에 연변 물리학 대회가 개최되었었군요.
    참 소중한 자료입니다.

  2. 샛솔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3.07.01 12:26 신고

    네. 한중 수교 전이라 북한 학자가 연변에 나올 수 있었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 이후 북한이 더 닫아 버린 것 같습니다.

  3. 탈북자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3.08.11 13:03 신고

    어릴 적에 려철기박사님 쓴 물리교과서로 공부했는데, 실제모습은 처음보네요~~

역사란 무엇인가 - 한일 문제를 생각하며

 

한 때 운동권이 후배학생의 소위 <의식화교육>의 첫단계로 E.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란 책을 읽게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도 궁금해서 조금 읽어봤는데 책은 매우 중립적인 한 역사학관(historiography)이었다.   역사, 사실(史實), 사학자의 편견, 과학, 도덕관, 개인과 사회, 역사의 도덕적 판단등을 논한 것이다.  종이책을 버리고 정리할 때 그 책도 사라졌기 때문에 다시 열어 볼 수 없지만 대강 그런 것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루비콘 강>을 건넜지만 시저가 <루비콘 강>을 건넌 것만을 역사적 사실로 선택하고 있다" 는 것이 바로 역사학자의 선택이란 것만 기억에 남는다.   

 

Carr의 말대로 역사는 역사를 기술하는 사가의 이미 정해진 틀에 맞추어 사실이 선택되고 자기와 같은 역사관을 가진 사람들의 문헌을 포장해서 많은 사람들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자연과학과 달리 문헌연구(docmentary research)란 그런 의미에서 객관성이 없다.  

 

MB의 독도 방문과 그 후유증에 대해 굼굼해 이것 저것 검색하다 우연히 한 일본인의 블로그를 보게 되었다. 

 

제목은 <일본인이 본 한국인의 역사 인식의 문제점> 이었다. 

 

대강을 훒어 보건데 역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역사학자같지는 않고 취미로 문헌 연구를 하는 아마춰 역사가 같았다.  아마춰라고 낮추어 보는 것이 아니라 historiography 에 기본 연구를 토대로 뭘 쓰는지 하는 의구심으로 하는 말이다.

 

한글로 쓴 것으로 미루어 한글을 아는 분 같은데 그 머릿말이 재미가 있다.

 

<이 페이지는 한 늙은 일본인과 젊은 한국인의 대화로부터 태어났다. 그 과정에서 일본인이 느낀 것은 기본적인 부분에서 역사인식의 차이가 크고 일본측 논리를 설명하기에 예상외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미리 일본측 논리를 제시해 두면 한국인들이 그에 대한 반론을 준비하는 것부터 출발할 수 있어 낮은 차원의 논의를 생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아래는 늙은 일본인이 모은 한국인을 논파하기 위한 논거와 자료를 정리한 것이다. 일본인을 논파하려고 하는 한국인은 여기서부터 출발하기를 바란다.>

 

자못 도전적인 말투다.     그런데 그 블로거가 주장하는 <한국인의 역사인식>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지 또 <일본인의 역사인식> 무엇을 말하는지 매우 건방진 발상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내가 설정한 한국인의 역사인식>과 <내가 설정한 일본인의 역사인식>라고 말해야 맞는 말이다.   <한국인> <일본인>하는 말은 쉽게 쓸 수 있는 단어들이 아니다.  그런 포괄적 지칭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런데 난 그런 논쟁따위엔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내 역사관은 환원주의 역사관 (reductionism)이기 때문이다.   환원주의 역사관에서는 역사 논쟁은 부질없는 짓이다.     

 

더 포괄적인 환원주의 세계관이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고 하나의 역사철학적 명제였는데 더 근대에 와서는 Vienna Cicrlce 이란 과학철학에서 크게 부각되었었다.       언젠가 내가 내 블로그에서 언급한 Reihenbach 같은 이는 Hegel 의 역사철학을 비판하기 위해 제시했지만 최근의 뇌과학 성과로 미루어 보면 점차 그 설득력이 더 해진다.

 

구체적으로 언급은 안했지만 최근의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의 저서 <위대한 설계(Grand Design)>도 환원주의 세계관을 암시하고 있다.     세계의 변화는 결국 모두 물리와 화학의 법칙에 따라 일어나고 물리와 화학의 법칙은 인과율(causality) 을 따른다.     즉 역사는 우주의 대폭발(big bang)시 이미 정해진 것이라는 관점이다.

 

한 때 이런 기계론적 우주관을 생각한 사람들은(대표적으로는 Pierre Simon de Laplace )  초기조건(intial condition)만 알면 역사를 예언할 수 있다는 극단적 주장도 했지만 고전 역학의 chaos 가 이해되고는 그것은 한계가 있다고 언젠가 내 블로그에 쓴 일이 있다.

 

고전역학의 chaos는 무한 정밀도의 초기조건을 제시하지 않는하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한 정밀도란 인간의 인식한계를 넘어서기 때문에 단순한 기계론적 세계관은 그 한계에 부닥치게 된다.

 

거기에 더하여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 는 물리법칙 자체가 확률적 해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전 Chaos와 마찬가지로 결정론적이기 보다는 확률적이란 관점이 함축되어 있다.    그렇다고 causality 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확률과정 자체가 causality 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면  causality 라고 해서 미래가 예측된다는 것은 아니다.    환원주의란 세계의 변화는 궁극적으로는 물리와 화학의 법칙(laws of physics and chemistry) 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이지 미래가 예측가능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고전 chaos 가 말해 주듯 원리적으로는 무한 정밀도의 초기조건을 알면 뉴턴의 법칙에 따라 세상이 움직인다는 것이지 오히려 무한 정밀도란 인간의 인식한계를 넘어서기 때문에 이 관점은 미래는 근원적으로(intrinsically)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런데 이런 환원주의적 관점으로 보면 역사에 도덕적 판단을 내릴 근거가 없어지게 된다.  

 

지난 815는 일본 홋카이도 여행중에 맞았다.     일본은 815를 종전이라 부른다.     우연혀 보게된 일본방송은 왜 일본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비극을 맞기전에 전쟁을 끝낼 수 없었던가를 여러 문헌과 그와 관련된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해설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그 당시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는 시점이 되었지만  <무조건항복>이란 말을  천황 앞 어전회의서 입밖에 낼 수 없었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실 조금만 일찍 일본이 항복했더라면 소련의 참전이 성사되지 않았고 한국의 남북 분단도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625전쟁도 없었을 것이고 그 결과로 분단 한국이 받았고 받고 있는 고통도 없었을 것이다.  

 

어전회의에서 한줌의 일본 사람들이 좀더 일찍 항복선언을 제안하고 성사시켰다면 히로시마의 비극도 한국 분단의 고통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환원주의 역사관으로 보면 그 한줌의 일본사람들의 의식구조와 그들의 뇌에서 분비되는 호르몬과 그 호르몬의 지배를 받은 뉴론들은 역사를 그 반대방향으로  움직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 역사에 대한 도덕적 평가(moral judgement)를 할 수 없는 것이 환원주의 역사관이다.   이미 그렇게 역사는 움직에게 되어 있었고 그들의 자유의지에 의해 움직인 것이 아니라  우주의 빅뱅시 이미 정해진 코스였기 때문이다.

 

환원주의적 역사관은 우리의 모든 존재와 행태는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자연현상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없듯이 역사에 대해서 역사를 만들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도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도죠히데키도 히틀러도 그저 하나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환원주의 주장을 하면 내 견해와 반대하는 사람들은 난리를 칠 것이다.  그것도 하나의 현상이다.     대개 그 정도는 예측 가능하다.   

 

그런데 내 역사관중의 하나의 믿음은 현상이던 인과율이던 역사는 진화한다는 것이다. 

 

세계는 항상 공동선(共同善)의 방향으로 움직여 왔기 때문에 그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란 믿음이다.    도죠도 처벌을 받았고 히틀러도 매도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아마춰 사가도 그래도 한 일본 청년의 Free Hugs for Korea-Japan Peace

 

를 자기 같은 사람보다 이 청년의 용감한 행동이 한일 평화에 기여한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난 언젠가 내 글  passport 가 없는 세상을 꿈꾸며에서 말한것과 같이 한일간에도 시모노세키와 부산간에 해저 터닐이 뚫리고 자동차와 기차로 패스포트 없이 오갈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란 기대를 해 본다.    그것이 역사의 순방향 흐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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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천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2.09.12 10:00 신고

    저도 선생님처럼 세계는 항상 공동선의 방향으로 움직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만 그 속도가 느리다고 가끔 아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이미 정해진 것이라 어쩔수 없겠군요...

  2. 샛솔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2.09.12 17:25 신고

    맞습니다. Martin Luther King 이 1963년 "I have a dream that my four little children will one day live in a nation where they will not be judged by the color of their skin but by the content of their character. " 의 연설을 할 때 그 누가 반세기후에 미국에 흑인 대통령이백악관에 앉아 있으리라고 상상했겠습니까?

  3. sierrabird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2.09.13 04:42 신고

    선배님의 글에서 이제까지 몰랐던 역사를 알게되었습니다
    말씀에 동감이 됩니다

은원을 넘어서야  - 우린 아직 고작 숫캐의 수준인가

 

 

홋카이도를 다녀오고도 뭔가 떨떠름해서 여행기를 쓰고 싶은 생각이 없다. 오사카 여행기도 다 끝내지 못했는데...

 

한일 문제는 은원을 넘어서야 모든 것이 풀린다.    

 

사람사이거나 나라사이거나 은원을 넘어서야 모든 것이 풀린다.   

 

알본 작가 키쿠치칸의 <은수의 넘어> 이야기를 쓴 일이 있다.  (<은원(恩怨)의 그 넘어> - 야바케이 자전거길)

 

 예수도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다.

 

패스포트가 없이 다닐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독도가 울릉도에 속하던 시마네켄에 속하던 그 무슨 대수인가      누구던 가고 싶을 때  자유롭게 갈 수 있다면  그 이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은원을 넘어서려면 50년이 걸릴지 100년이 걸릴지 모른다.   사람들이 지금 독도를 가지고 하는 짓거리는 숫캐가 한쪽다리를 들고 전주에 오줌을 깔기는 것과 뭐가 다른가?

 

숫캐가 전주에 한쪽다라를 들고 오줌을 깔기는 것은 늑대시절의 영역을 표시하기 위해 하던 Marking 의 잔재라고 한다.      가르쳐 주지 않아도 유전자에 각인된 버릇을 그냥 행하는 짓이란다.

 

거의 쓸모 없는 바위섬에  죽도라는 팻말을 박는 짓이나 그 팻말을 뽑아내고 독도라는 표지석을 세우는 행위가 숫캐의 Marking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고도 인지가 발달한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은원을 넘어서지 않고는 한일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Marking 만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충돌이 일어나고 인명이 다치는 일도 일어 날지 모른다.   왜 깨닫지 못할까!

 

우린 아직 고작 숫캐의 수준인가

 

 

 

 

 

숫캐는 영역을 mark 하기 위해 한 쪽다리를 들고 오줌을 깔긴다.

될 수 있으면 높이 들어 냄새가 멀리 가도록 한다.

Marking 의 장소는 다른 숫캐가 marking 을 한  다른 장소를 선호한다고 한다.  다른 숫캐의 냄새를 지우지 위해.

 

 

 

1952 년경 일본은 독도에 자기네 영역이란 말뚝을 박고 갔다.

그 이듬해 한국의 산악대원이 해군의 도움을 받아 이 말 뚝을  뽑아 냈다

 

 

 

지난 19일 (2012년 8월)

MB 는 자기의 흔적을 독도에 남겼다.

우리의 의식수준은 고작 숫캐의 Marking 수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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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ierrabird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2.08.22 08:02 신고

    맞습니다 숫개수준.....

Passport 가 없는 세상을 꿈꾸며

 

이번 일본 여행은 MB의 엉뚱한 돌출행동 때문에 마지막 마무리가 우울하게 끝났다.      20세기의 잔재인 영토문제를 아직도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는 정치모리배들 때문에 역사의 발전을 후퇴시키고 있다.

 

과연 여권이 필요없는 세상은 요원한 일인가?

 

작년 북유럽을 여행하며 참으로 성숙한 북유럽나라들과 국민들을 보며 우리와 우리 주변국은 언제 이런 세상을 만들 수 있을가 생각하게 한다.

 

작년 6월 우리의 결혼50주년을 기녕하기 위해 오랜 소원이었던 북유럽 여러나라를 여행했다.   그런데 이번  홋카이도 여행의 끝자락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북유럽 나라들의 성숙성이 더욱 강열하게 어필하여 온다.

 

제일 처음 북유럽 땅을 밟은 곳은 핀랜드 헬싱키였다.    그리고는 덴마크 노르웨이 그리고 스웨덴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헬싱키로 돌아와 서울에 귀환했다.

 

그런데 헬싱키 도착이후 다시 헬싱키를 떠날 때까지 한번도 여권을 꺼낸 일이 없었다.   북유럽 나라들은 비자는 말할 것 없이 여권도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 헬싱키 공항을 떠날 때 출입국 관리 게이트를 지나가며 패스포트를 보여야 하는 당연한 출국 수속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북유럽 여러나라도 서로 싸우고 땅을 차지하고 빼앗고 지배하고 지배당한 역사를 안고 있다.    핀랜드도 오래동안 스웨덴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고 최근에는 러시아가 상당 부분 핀랜드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핀랜드에서 동상하나를 보았는데 그 동상은 러시아가 지배하던 옛 핀랜드 땅을 2차대전후 되돌려 주어 핀랜드가 감사하게 생각해서 핀-러 우호관계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공원이고 동상이었다.

 

러시아가 땅을 이웃나라에 돌려 주었다니 참으로 기이하게 들렸다.    그런데 그 보다 핀랜드엔 스웨덴 지배의 흔적이 더 역역히 남아 있었다.      반타공항의 힐톤 호텔에 숙소를 잡은 우린 공항에서 헬싱키 가는 직행열차가 없어 항상 자전거 아니면 버스를 타고 반타공항에서 가장 가까운 Tikkurila 역에서 열차를 타고 헬싱키에 갔었다.

 

그런데 Tikkurila 역은 Dickursby 라는 이름과 병기되어 있었다.    처음엔 러시아에 가까워 러시아 이름인가 했는데 그게 아니라 스웨덴 이름이었다.    Helsinki 도 전대의 지배국인 스웨덴이름 Helsingfors 와 병기하고 있다.   가까운 이웃 관공객용이 아니라 아직도 소수민족으로 사는 스웨덴후손들을 위한 이름인 것 같았다. 

 

헬싱키 공항에 묵었기 때문에 저녁을 먹고는 헬싱키 공항을 산보할 때가 많았다.   그런데 출국하는 터미널이 우리가 접근할 수 있어 이상히 생각했는데 스캔디나비아 각나라로 떠나는 항공기는 아무 출국 수속 없이 마치 핀랜드내 국내선과 같은 터미널에서 들락 날락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오거나 한국으로 떠날 때 지나갔던 터미널이 정식 국제 터미널이었던 것이었다.

 

덴마크에서도 코펜하겐의 국제공항인 Kastrup 공항의 힐톤 호텔에 묵었는데 여기엔 열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 공항은 스웨덴의 말뫼가 아주 가까웠다. 

 

Oresund 해협에 놓인 물만 건너면 말뫼였다.   그래서 우린 Denmark 의 Kastrup 공항에 머므는 동안 말뫼에 갔다 왔다.    계획도 없이 스웨덴의 한 도시를 덴마크에 머믈 때 갔다 온 것이다.    그냥 일요일 오후에 Kastrup 공항 철도역에 Brompton 자전거를 가지고 내려가 Malmoe 가는 열차를 타고 즉흥적으로 갔다 온 것이다.   스웨덴의 스톡홀름에 머믈땐 기차로 가기엔 너무 먼 곳이었기에 덴마크에 있을 때 갔다 온 것이다.

 

 

 

덴마크의 Kastrup 공항과 Malmoe 는 Oresund 해협하나를 사이에 두고 갈라 서 있는

아주 가까운 도시였다.

비자도 패스포트도 없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다.

 

 

기차가 국경을 지난다는 기분은 전혀 나지 않았다.   항공여행과 달리 보안 검색게이트도 없으니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에 간다는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았다.     

 

Malmoe 는 코펜하겐과 다른 것은 화폐가 다른 것 뿐이었다.  북유럽 4 나라 모두 유럽 연합이지만 핀랜드만 유로화를 쓸 뿐 다른 3나라는  아직은 각자의 화폐를 쓰고 있다.

 

그런데 Malmoe 는 원래 Denmark 땅이었다.   스웨덴과 덴마크가 전쟁을 해서 덴마크가 빼앗긴 땅이다.   덴마크도 한 때 전쟁을 해서 유럽의 큰 땅을 차지한 대 제국일 때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서로 싸우고 땅을 빼앗고 빼앗긴 역사가 있어도 지금은 국경이란 개념도 없이 자유로이 왕래하고 있는 것이다.

 

Oresund 해협을 헤엄쳐 건너서 Malmoe 는 Denmark 땅이라고 외치는 젊은이도 없다.  

 

물론 유럽에도 인종주위자 우익들이 있긴 하다.  우리가 여행을 마친 후에 일어 났던 노르웨이의 인종주위의 우익청년의 총기 난사사건이 있듯이 우익이 있지만 난동을 피기 때문에 언론의 조명을 받는 것 뿐 그 세력은 소수중의 소수일 뿐이다.

 

유레일패스나 스캔디네이비안 레일패스만 있으면 여권없이 이 북유럽 나라들을 자유롭게 들락거릴 수 있다.   

 

이처럼 자유로운 왕래가 보장된다면 영토라는 개념이 의미가 없다.    그 옛날 전쟁을 해서 땅을 빼앗고 빼앗기고  했어도 이젠 그 찌거기가 다 가신거 같다.   

 

역사는 이렇게 진화해 간다.    동아시아도 언젠가는 패스포트가 없이 국경을 넘나들 수 있는 나라들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이 올 바른 역사의 진행방향이기 때문이다.  

 

그 땐 MB 같은 지도자가 뭘 가지고 인기 몰이를 할까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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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천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2.08.20 15:04 신고

    아, 생각보다 매우 자유롭군요. 잘 배웠습니다.
    선생님이 귀국하시니 그 무섭던 폭염이 덜한 것 같습니다. ^^

  2. 안태효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5.08.11 16:28 신고

    멋진 생각이십니다^^
    좀더 쉽게 교류하고, 화합해서 얻을 수있는것들이 너무 많은데, 말입니다.--;;
    더구나, 교통과 통신이 취약했던, 그 옛날의 국경은 지금과는 매우 다른 의미였다고 봅니다.
    뎃글을.....3년이 지난 후에 달았네요 ^^

    • 샛솔  댓글주소 수정/삭제 2015.08.12 00:29 신고

      감사합니다. 오래 된 글이지만 그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어제도 네델란드의 국경도시 Maastricht 에 갔었는데 Serway tour guide 하는 사람이 독일 Achen 에 살면스 네델란드 Maastricht 에서 SegeMotion 이란 tour shop 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tour 는 segway 를 타고 국경을 넘나 들며 벨기에 아이스큼 숍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쉬었다 다시 어디가 국경인지 모른 선을 넘어 다시 네델란드에 돌아 왔습니다.

반세기만에 찾은 모교와 옛동네

나의 고향은/저 산(山) 너머 또 저 구름 밖/아라사의 소문이 자주 들리는 곳.

나는 문득/가로수(街路樹) 스치는 저녁 바람 소리 속에서/여엄―염 송아지 부르는 소리를 듣고 멈춰 선다.

김기림 시인이 지은 <향수(鄕愁)>라는 이짧은 시는 내가 기억하는 몇 개의 시중의  하나다.

향수란 옛 것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그 그리움이 자아 내는 수심(愁心)을 말한다.  옛것은 고향이 으뜸이지만 고향만큼 향수를 자아내는 것이 초등학교시절의 모교가 아닌가 싶다.   유소년시절의 절반을 학교에서 보냈으니 학교와 얼킨 어린 시절의 추억이 향수를 불러 일으킴은 너무나 당연한 일.

나는 어제 반세기가 넘어 내 옛 초등 모교를 찾아 봤다.  그리고 내가 학교 다닐 때 살던 곳을 둘러 보고 왔다.

정지용시인의 <고향>이라는 시에도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라는 구절이 있다.   정시인은 고향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바뀌었기 때문에 옛고향이 아니라고 한탄하지만 나에겐 너무나 바뀌어 버린 고향 마을이기에 너무 낯설었다.

가래울 양짓말이라는 초가집 작은 동네가 이젠 수십층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우리가 흔히 <신작로>로 불으던 파석들만 깔린 비포장도로가 어엿한 4차선 간선도로로 바뀌어 있었다.

수없이 건너 다녔던 신곡교는 이젠 차도와 인도가 가드레일로 분리 되어 있었다.   인도옆 다리 난간 위는 예뿐 꽃으로 단장해 놨다.  거기서 내려다 보이는 중랑천 양쪽 둔치에 자전거 도로가 상큼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여름철이면 발가벗고 미역 감던 중랑천,  이젠 잘 다듬어진 하천 공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바뀐다는데 강산이 다섯번 바뀌는 반세기가 지났으니 오죽하랴.

동심으로 돌아 가랴도 갈 수 없는 나이지만 강산도 바뀌어 버려 반세기의 세월의 자국은 무겁고 깊게 패여 있었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라다 조국의 땅에서 처음 살기 시작한 곳이 의정부이니 의정부는 내 고향과 같다.

오사카 대공습을 피해 부모와 떨어져 의정부에 사는 누님집에 맡겨지게 된 것이 내가 의정부읍 신곡리 455번지에 살 게 된 내력이다.   

오사카와 같은 대도시에 살다 시골에 오게 된 내게는 문화적 충격이 너무 컸다.

의정부역에서 내려 처음 신곡교를 건널 때쯤이었다.  나를 데리고 가던 매형에게 난 물었다.

"니짱 덴샤 노루?"  (매형 전차 타?(안타요?))

매형은 이 꼬마처남의 황당한 질문에 난감했을 것이다.  

어쩨서 그렇게 많은 것을 까맣게 잊었는데 이 대화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지 ?   10실 짜리 꼬마에겐 의정부역에서 신곡리가 너무 멀었나 보다.  

어제는 신곡리에서 의정부 역까지 걸어서 돌아 왔다.  동오리엔 대장깐이 하나 있어 학교를 오가며 불에 달궈 시뻘겋게 된 쇠붙이를 망치질하는 것을 신기하게 여기며 쳐다 보곤 했다.   거기서 낫이니 호미니 하는 농기구가 생산되었었다.

여기쯤이었을까 저기쯤이었을까 전혀 가늠이 가지 않는다.   아아 무상한 세월이여 .....

 

 

내가 다닐 때 학교 이름은 양주공립국민학교였다.

정문은 남쪽으로 나 있었다.  지금은 옛 정문(남쪽)쪽으로 경기도 교육청사가  자리잡고 있었다.

 

교사 전경

교사가 놓인 위치는 옛 단층교사의 위치와 같은 것 같았다.

 

교육박물관에는 625전 본관 건물 사진이 걸려 있었다.

낯익은 교사입구다. 여기로 들어가 신발을 벗고 교실에 들어 갔었다.

 

1964년에 양주국민학교에서 중앙국민학교로 바뀌었다.

내가 미국 유학시절이다. 

그동안 나는 양주 국민학교는 서울의 많은 초등학교처럼 도시개발과 인구변동으로 사라진줄 알고 있었다.

지난 토요일 어느 결혼식장에서 생질을 만나 처음 들었다.

 

학교건물 2층에 총동창회 사무실이 있었다.

사무국장을 맡고 계신 이철홍님의 안내로 교육박물관을 관람하였다.

 

가래울 양짓말 초가집 동네가 고층 아파트 단지로 바뀌어 있었다.

 

그래도 바뀌지 않은 것이 두어개 있었으니 그중에 하나가

아파트단지 뒤의 밤나무 숲이었다. 

 

송산가는 <신작로>라 부르던 파석만 깔렸던 비포장도로가

어엿한 4차선 간선도로로 바뀌어 있었다.   

 

여름이면 벌거 벗고 물장구치던 개울

둔치엔 자전거도로가 새로 포장되고 도시공원이 조성되고 있었다.

 

무수히 건너 다녔던 <신곡교>

난간엔 화사한 꽃단장이 날 봐달란 듯 한창이었다.

 

의정부역사

한가한 목조 역사가 어수선한 광장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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