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지구별에서 - Things Old and New

익헌공(翼獻公)이창의(李昌誼) 할아버지 본문

일상, 단상/나의 가족, 가족사

익헌공(翼獻公)이창의(李昌誼) 할아버지

샛솔 2022. 10. 26. 12:53

내가 언젠가 내 가계에 대해 쓴 일이 있다.(세종대왕의 Y-염색체)

   

내가 세종대왕의 19대손이고 우리 가계의 시조인 세종대왕의 17남인 영해군 당(寧海君 瑭)의 18대손이다.    그래서 우리 가계는  전주 이 씨의 영해군파로 영해군이 우리 가계의 시조가 된다.    

 

영해군의 어머니는 그 유명한 신빈 김 씨다.   그 할머니에 대해서 짧은 글을 쓴 일이 있다. ( https://boris-satsol.tistory.com/1992 [지구별에서 - Things Old and New:티스토리])

요즘은 조선시대 왕가를 다룬 사극이 많이 나와 이런 선조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사극들의 장면이 떠 올라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은 우리 조상중에서도 내게는 7대조가 되는 익헌공 할아버지에 대해서 쓰려고 한다.   

이 할아버지는 영해군파에서는 가장 지위가 높은 종신(宗臣)(왕가의 후손으로 신하가 된 이)이기 때문에 영해군파에서는 자주 언급이 되는 분이다. 

 



 

대수 부계  모계   순위 비고
  세종대왕
世宗大王
신빈김씨    
0 영해군 당
   寧海君
평산 신씨 17남 서9남, 신빈김씨소생 5남
1 영춘군 인  永春君 진주류씨 종손  
2 강녕군 기   江寧君 祺    2남  
3   주진수 원  朱陳守 瑗    종손  
4 덕양德良    종손(계)  무신(우상대장)
5 기명耆命    종손  
6 양휴揚休    종손  
7 시만時萬    종손 정언
8 백린伯麟    종손  
9 언강彦綱    2남 조선통신사부사(1682), 동지사 정사(1698) 시호 정효
10 태제泰蹄    종손  
11 창의昌誼    종손 좌의정, 시호는 익헌
12 양정養鼎    종손  대사간
13 원묵元默    종손  
14 교영敎英    종손  대사간
15 만기晩器    종손  
16 재수在壽    종손(계)  
17 석효錫孝    종손(계)  
18 구철      龜澈(나)    2남  

영해군의 11대손으로 좌의정을 지낸 익헌공은 영해군파에서는 가장 높은 관직에 오른 종신이다. 

 

출처: https://boris-satsol.tistory.com/397 [지구별에서 - Things Old and New:티스토리]

 

이 분의 영정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익헌공 내 7대조 할아버지의 초상

 

위의 가계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 집은 9대 조인 정효공(貞孝公) 할아버지가 그 윗대의 종가에서 갈라져 나오셨기 때문에 정효공의 종가라 할 수 있고 내 어머니는 이 집 종부로 시집을 오신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10살 전에 작고하셨기 때문에 내 가문에 대해서 들려 줄 기회가 없었고 어머니만 우리 가문과 일제 강점기에 우리 집안이 어떻게 망했는지 이야기 해 주셨을 뿐이다.

나는 뵈운 일이 없지만 내겐 조부 되시는 할아버지에게서 종부로서의 도리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셨고 또 이 종가가 정승 대감을 배출한 조선 갑반의 종가라고 어머니는 긍지가 대단하셨다. 

1970년대의 어머니. 정승대감을 배출한 조선 갑반의 종부로 긍지가 대단하셨던 어머니

 

어머니의 유필(遺筆) 중에서 

그래서 지금은 미국에 이민간 장조카가 서울에 있을 땐 한식이나 추석 때 민통선이 개방될 때 열심히 이 장조카를 철원에 데려가 선조들의 묘소에 참배를 시켰는데  얼마 전 가족을 모두 데리고  여행차 귀국한 장조카를 보니 장조카의 장성한 아이들은 한국말을 거의 못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니 이젠 한국에 남아 있는 내가 익헌공 할아버지의 유일한 후손이 된 셈이다.

내가 굳이 이 할아버지에 대해 뭔가 써서 남기려 한 것은 3,40년 전에 겪은 사건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종가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정효공(貞孝公) 할아버지에 대해서도 글을 쓴 일이 있다.    (조선통신사 정효공(貞孝公) 이언강 할아버지)   

이 분 또한 다채로운 삶을 사신 분이다.   시조도 한 수 남기셨다. 

 

***********************************

이 사실은 최근 발굴된 

국내 최고(最古)급 시조집 「고금명작가」 에서도 발견되었다.  (문학기행)

 "한나 둘 세 기러기 서남북(西南北)난화나라

주야(晝夜)로 우러네니 무리일흔 소리로다

언제나 상림추풍(上林秋風)에 일행귀(一行歸)를 하리오"

이언강(李彦綱)

출처: https://boris-satsol.tistory.com/48 [지구별에서 - Things Old and New:티스토리]

 

***********************************

3,40년 전에 겪은 익헌공 할아버지에 대한 사건은 민통선 안에 있던 이 할아버지의 묘소의 도굴 사건이다.

당시 민통선은 엄격한 통제 아래에 있었고 한식이나 추석에 잠깐 묘소 참배를 위해 민간인에게 개방되던 때이다.    그런 민통선안에 묘소가 있었으니 어머니 안전하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 생전에 이 사건이 터진 것이다.   거기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을 감시하는 보안사인지 기무사인지 의 파견대의  우두머리인 육군 상사가 주도했다는 도굴 사건이다.   모두 입을 다물고 보안사건 기무사건 힘깨나 쓰는 무리이니 그 누구도 그런 도굴범에 대해 자세히 알려 주지 않는다.

우리 선조의 묘소 석물이 트럭으로 6대분이 실려 나갔다는 사실만 안다.    묘소의 흔한 석물인 동자상 여러 점은 이미 딴 곳으로 실려 갔고 일설에는 일본으로도 밀수를 한다고 들었다.

어떻든 익헌공 할아버지의 묘소에 있던 석물에 관해서는 당시 처제가 잘 아는 골동 브러커에 말에 의하면 골동 딜러에서는  다 알고 있다고 들었다.    그중에서 가장 값나가는 정승 대감 묘소의 석물은 이름만 들으면 다 알만한 유명인사의 정원 장식품으로 예정되었으나 연천에 사시는 한 종친의 끈질긴 추적으로 들통이 나자 당시 내가 살던 대치동 집에서 아주 가까운 양재천 둑에다 몰래 버리고 갔다.

내가 찍은 사진인지  경찰이 준 사진인지 그때 광경이 남아 있다. 

양재천 둑에 버려진 익헌공 할아버지의 묘소에서 도굴해 온 석물들

 

당시는 어머니가 생존해 계실 때라 이 석물들이 익헌공 정승 대감 묘소의 것이라고 증언해 주셨다.  1982년에 인화된 것을 보면 이 석물들이 도굴된 것은 82년 10월에서 11월 사이일 것이다.

 

이 석물들이 버려진 양재천 둑은 우리 집에서 직선거리로 1 km가 조금 넘으니 우리 집이 익헌공 종가의 종부인 어머니가 사시는 것을 도굴범들은 알고 있었다고 추측된다. 

대로에서 떨어진 아직 개발 전인 양재천 둑이 이런 석물을 버리기에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였을 것이다. 

당시 우리는 단독 주택을 짓고 살고 있을 때였다.   친구의 도움으로 크레인과 트럭을 빌려 우리집 정원까지 옮기는 데에 하루가 걸렸다.   

어머니 생각엔 통일이 되어 민통선이 풀리면 원상 복구했으면 했던 것인데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런데 90년대가 되자 우리 집 근처가 모두 상가로 개축이 되면서 우리 혼자 단독 주택에 사는 셈이 되었다.   그 정원에는 키가 3층이 되는 후박나무와 대추나무가 뻗대고 서 있으니 주변의 압력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도 개축을 결정하고 5층 주상 건물로 다시 지을 생각을 했다.    문제는 정원에 있던 이 3점의 석물이었다.   

어머니 생전에 민통선이 풀릴 일은 아예 없을 것이고 지금 같은 정부가 들어 선 이상 종전은 아득한 일로 밀려났다. 

그러니 그 당시로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도굴을 한 기무사가 원상 복구를 해 주지 않는 한 석물을 제자리에 갔다 놓을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그래도 안전한 곳은 당시 내가 근무하고 있던 서울 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하는 것이었다.    내가 모든 비용을 부담하여 석물을 옮길 것이니 박물관에서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당시에도 서울대학교 박물관 후원에는 몇 점의 석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래 서 석물들은 지금 서울대학교 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서 있다.  

서울대 박물관 후원에 서 있는 익헌공 묘소에서 도굴해 간 석물들

 

석물 내역 설명 패말

 

이 석물들이 처음 서 있을 당시 박물관 후원은 넓은 후원이었다.  

그러나 서울대학이 팽창하면서 건물을 자꾸 새로 짓기 시작하자 이 후원을 탐을 냈다.   박물관측에서 연락이 왔다.   이 석물들을 박물관 앞으로 옮겨도 되느냐고 한다.    뒤에 새로 지은 경영대학의 새 건물의 주차장으로 쓰겠다고 한다.

아무리 조심을 해도 이런 무거운 석물을 옮기면 꼭 파손이 된다.

양재천 둑에서 대치동 정원에 옮길 때에도 장명등 한 조각이 깨어졌다.    박물관 후원에 옮길 때도 조금 파손되었다. 

후손이 조심조심해도 그럴 진대 주차장을 짓겠다는 사람들이 옮기면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런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옮기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자 이 번에는 후원을 반쪽으로 쪼개어 보기 흉한 양철 벽으로 막아 놨다.

당시 박물관장은 그래도 나를 존중해서 매우 정중하게 다루어 주었는데 이젠 양철 조각으로 그 배경을 흉물스럽게 만들어 버렸다.

내가 떠나면 언제 이 석물들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내가 이 석물들을 기증할 때 받은 감사패

 

당시 박물관장을 지낸 이는 고고미술학과의 최몽룡 교수였다.     

1982년 늦가을에 도굴이 일어났고 그때부터 15년간 대치동 우리 집 정원에 있다가 1997년 6월경 서울대 박물관에 왔다.   흉물스러운 양철 벽에 있어도 안전하게 오래 있기를 기원하다.

끝으로 국립박물관에 있는 영정에는 우의정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 석물의 설명 표지판을 보면 좌의정으로 그 관직 바뀌어 있다.  

그래서 그 연유를 알기 위해 조선 실록을 검색했다. 이창의 할아버지의 항목이 총 72건이 나온다.  그중에 그 관직이 임명된 날자나 졸한 날자까지 나온다.  

13. 영조실록 110권, 영조 44년 6월 14일 경오 1번째 기사 / 영의정 서지수가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니 중도 부처를 명하다
하고, 판부사 김치인을 다시 영의정에 제수하고 호조 판서 이창의(李昌誼)를 우의정에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이 기사에  따르면 우의정에 임명된 날은 영조 44년(서기 1768)에 우의정에 임명되었고 

영조실록 119권, 영조 48년 10월 5일 병인 3번째 기사 1772년 청 건륭(乾隆) 37년 삼상의 면직을 명하고 한익모·이창의·이사관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원본 보기
삼상(三相)의 면직을 명하고, 한익모를 영의정으로, 이창의를 좌의정으로, 이사관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이 기사에 따르면 영조 48년(서기 1772년)에 좌의정에 임명된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의 좌의정 근무연한은 단 17일이다. 

184. 영조실록 119권, 영조 48년 10월 23일 갑신 2번째 기사 / 판부사 이창의의 졸기
판부사 이창의(李昌誼)가 졸하였다.

이 기사에 따르면 1772년 10월 23일에 작고하신 것으로 나온다. 

이들 실록 기사에 따르면 좌의정은 임명된 날자가 1772년 10월 5일이고 작고하신 날자가 10월 23일이니  좌의정직은 18일간 하신 것이다.   

영정에 우의정이라 쓰인 것은 우의정은 최대 4년은 하셨을 터이니 영정을 그릴 만한 시간이라고 볼 수 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