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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유필(遺筆) 본문
아버지의 유필(遺筆)
내 아버지는 내가 10번째 생일을 지내고 다섯달이 채 안 된 1946년 3월에 돌아 가셨다. 그나마 마지막 2년 가까이는 전쟁으로 헤어져 살아야 했기 때문에 8년 남짓만 난 아버지와 함께 산 셈이다.
아주 어렸을 땐 흐릿하지만 나를 무척 귀여워 하신 것 같은 느낌이 남아 있다.
조금 더 커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내가 국민학교에 들어가서 얼마 안되어 어머니가 돌아가신 할머니의 유골을 모시고 철원 선산에 가셨을 때였다.
오사카 집엔 아버지와 바로윗 누나 셋이 남았다. 누나는 나보다 3년 위라 학교가 늦게 파해 내가 혼자 집에 있을 때가 많았다. 난 심심해서 집에 있는 설합에서 몰래 돈을 꺼내다 문방구에서 낚시대를 사서 집에서 가까운 아지가와에서 낚시질을 한 일이 있다.
허락 없이 멋대로 돈을 꺼내 갔으니 잘못한 짓이지만 아버지는 내가 낚시하는 곳 까지 오셔서 집으로 데리고 가셨다. 어미니 같으면 벼락같은 호령이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별로 꾸중도 하지 않으신 것 같다. 할머니 고연이 모신 집에 혼자 들어 가는 것이 무서워서 학교가 파해도 집에 들어 가지 않고 밖에서 나돌았던 것이다. 그것을 가엾게 여기셨던 같다.
얼마 안 있어 난 소까이(피난)이란 명목으로 오사카를 떠나야 했다. 미군의 오사카 공습이 임박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의정부시가 된 양주에 시집가 사는 첫째 누나집에 보내졌다. 그래서 난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바로 위의 누나와 헤어져 살아야 했다.
전쟁이 끝나고 우리 집은 귀국하여 다시 합쳤지만 아버지와 함께 산 기간은 불과 반년 남짓했다.
대전에 터를 잡아 다시 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나를 대전의 국민학교에 전학을 시키기 위해 가까운 거리의 국민학교에 전학 수속을 하기 위해 날 데리고 다니셨다.
그러나 그런지 며칠 안되 아버지는 원인모를 병에 걸려 자리에 누우셨고 1주일 남짓만에 세상을 떴다. 46세의 생일을 맞기 전이었다. .
그것이 내가 아버지와 함께 산 전부다.
지난 4월 우린 우리가 사는 5층 집을 수리하기 위해 모든 가구와 짐을 싸서 이사짐 센터의 보관창고에 맡기고 4층의 원룸에서 20여일 지냈다. 그 때 우린 또 다시 많은 짐을 버렸다.
그중에 하나가 아주 헌 책이나 문서따위였다. 이사짐을 나르던 일꾼이 버리라고 분류했던 짐에서 고문서 한 뭉치를 가지고 내려와 귀중한 옛 문서같은데 확인해 보라고 남기고 갔다.
20여년전 어머니가 돌아 가셨을 때 어머니의 유물 가운데 아버지의 유물이 있었던 같다. 그 땐 아버지의 유물이라고 남겨 놨던 것인데 그 존재조차 잊고 있었다.
그냥 버렸다 해도 기억 못하는 물건들이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경성고등보통학교(京城高等普通學校 -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에 다닐 때 썼던 습자와 작문 유필이었다.
옛날에는 집에서 한문을 배우다 늦게 신식학교에 가기 일수였다. 아버지역시 늦게 학교에 들어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의 고등보통학교에 들어 간 것이 지금의 고등학생의 나이였던 같다. 따라서 현재체재로 보면 중학교에 해당하는 학교를 고등학생 나이에 다녔던 것이다.
남겨 진 일어 작문 청서장(노트)는 1917~8년 고등보통학교 1~2학년 때의 것이다.
대정 6년은 1917년이다.
경성고등 보통학교 1~2학년 때
일어 작문 노트 표지
북한산에 오르다.라는 제목의 일어작문
당시의 필기도구는 붓으로 쓴 것 같다.
わらじ(草鞋)는 짚신을 말한다.
당시엔 아직 구두가 일반화되기 전이었던 같다.
이 노트책은 경성보통고등학교 생도용 전용으로 만든 노트 같다.
2장을 접어서 전통적인 한지책자식으로 만들었다.
한 페이지가운데를 펴서 보면
경성고등보통학교생도용지라고 인쇄되어 있다.
<북한산에 오르다> 라는 일어 작문의 한 페이지
아래에 번역해 봤다. 한자 투성이로 요지음 잘 안쓰는 일본 낱말들이 많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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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에 오르다.
짚신(わらじ(草鞋))을 꽉 동여 매어 신고 <벤토(도시락)>을 들고 창의문을 나선 것은 우리 1,2년생 400명의 생도들이었다. 4면을 보면 초목은 노랗거나 빨갛게 물들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과시하고 있고 밭에 심어 놓은 작물들은 추수를 재촉하고 있는 듯 하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모두가 가을의 풍경이다.
마을 몇개를 지나 한 십리쯤 가니 북한산 자락에 이르렀다. 이제부터 올라가는 것이다.
산 꼭대기를 올려 보면 푸른 솔나무와 붉게 단풍든 잎새들이 햇빛에 반짝이고 있고 산정은 웃으면서 유람객을 손짓하며 반긴다.
바위는 뾰죽하여 날 선 칼과 같고 길은 험준해서 걷기가 위험해 보였다.
산 허리에 이를 때까지는 별로 어렵지 않았지만 산 중턱 부터는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혼자 그냥 앉아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목이 말라 산간에 흐르는 계곡물에 입을 적시고 다시 오른다. 오르고 또 오른다.
마침내 북한산성 남문에 도달했다. 여기에서 일단 쉬어 가기로 했다.
남쪽을 보면 경성(서울)의 한 구석에서 밥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올라 푸른 하늘을 덮는다.
한강은 마치 은실같이 보이고 평야는 노란 돗 자리를 깐 것 같아 한편의 활동사진(무비)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 부터 하산이다.
내려오는 길은 오를 때같이 어렵지 않다. 계곡사이를 이리 저리 돌아 목적지에 닿았다.
맑은 물은 좔좔 흐로고 산영루(山暎樓)는 홀로 쓸쓸이 남아 옛 영화를 뽑내고 있는 듯했지만 마루판은 누군가가 떼어가서 서글픈 모양세였다.
이를 본 우리들은 어떨 생각을 했을까! 공덕심(공중도덕)이 모자라는 사람이 너무 많구나 였다.
옛날 관리들의 선정비가 여기저기 공허하게 서 있다.
문득 뒤를 돌아 보면 산정의 바위들은 삼각형을 이루고 제법 험한 모양으로 찌를 듯 서 있다. 많은 봉우리중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가 백운대가 아닌가 싶다. 여기에 올라 보면 백리 넘게 보인다고 한다.
강화도와 인천도 일의대수(一衣帶水)의 간격으로 눈앞에 보이고 보통은 꽤 높다고 생각했던 남산이나 북악산도 여기서는 한낱 흙더미(土塊)로 보인다고 한다.
산 밑에는 옛날 행궁의 집터가 남아 있어 고적으로도 명성이 높다.
한 시간 정도 휴식한다기에 우린 뿔뿔이 헤어져 보자기에 싸가지고 온 도시락을 만나게 먹었다. (舌鼓(したつづみ)を打つ)
재미 있는 놀이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느새 오후 1시가 넘었다.
선생의 구령에 따라 귀로에 나섰다. 산을 넘어 창의문 밖에 와서 해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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