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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란 무엇인가 - 625 전쟁의 생존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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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란 무엇인가 - 625 전쟁의 생존기

샛솔 2010. 6. 25. 11:26

전쟁이란 무엇인가  -  625 전쟁의 생존기

 

오늘은 625 전쟁 발발 60돌이 되는 날이다.  내 삶을 되돌아 보면 난 항상 전쟁의 한 가운데가 아니면 전쟁의 위협속에서 살아 왔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전쟁이야말로 가장 야만적이고 처절한 인간 비극인데 여전히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과연 전쟁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숙명인가?

 

이라크 전쟁 전야 침묵으로 일관하는 동료 의원들을 질타하며 상원에서 행한 버드 상원의원의 명연설중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전쟁을 생각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처절한 경험을 안겨 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To contemplate war is to think about the most horrible of human experiences"

 

그리고 버드 상원 의원은 이어서 말했다.

 

"무고한 이라크 시민이 당하게 될 무시무시한 죽음과 파괴가 임박했는데 어째서 여러분은 침묵으로 일관합니까!   그리고 무고한 살상자의 절반 이상이 15살 미만의 어린이 들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요."

 

 

"On what is possibly the eve of horrific infliction of death and destruction on the population of the nation of Iraq-a population, might add, of which over 50 percent is under age 15- this chamber is silent," 

 

 그러나 동료의원들은 버드의 말에 찬동을 하지 않았고 부시의 전쟁을 승인하고 말았다.  전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고 무고한 이라크시민은 매일 죽어 나가고 있다.

 

여기나 미국이나 병역의무는 쥐새끼처럼 빠져 나간 인간들이 가장 먼저 전쟁을 하겠단다.   

 

그러나 그들이 전쟁이란 무엇인가를 알리가 없다.  전쟁이 가져 오는 비참한 경험을 알리 없다.  그져 한낱 게임정도로 알고 전쟁을 하려고 한다.  

 

서울시가 초등생을 포함한 어린이와 일반인에게  전쟁의 시나리오를 써 오라는 공고를 냈다 한다.  한심한 인간이들이다.  전쟁이 무언지 모르는 인간들이니 전쟁을 한낱 게임정도의 인식한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 15 살 생일을 지내기전에 625전쟁이 일어 났고 휴전이 되기 전까지 사춘기를 전쟁과 함께 보냈다.

 

 

 

 

 네이팜 탄에 화상을 입고 폭격을 피해 울며 달아나는 9살 난 베트남 소녀.

AP 기자가 찍은 이 유명한 퓨리쳐 상 수상 사진은 전쟁의 참혹상을 전 세계에 일깨워 줬다.

전신에 화상을 입은 이 소녀는 용케 살아 남아 17번의 수술을 받고 정상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전쟁의 희생자는 절 반 이상이 어린이 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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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대를 산 사람들 중에서도  유독 나처럼 전쟁의 큰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도 많지 않으리라.  1935년 태어 나서 얼마 안돼 내가 태어났던 일본은 중일 전쟁(1937) 을 시작했다.   어려서 일찍 불렀던 노래는 일본 군가였다.

 

꼬꼬와 오쿠니노 남뱌꾸리 하나레떼 또오오키 만슈노.. (여기는 고국에서 수천리 떨어진 만주땅...)이란 애조띈 군가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일본 병사들도 나라의 부름을 받아 출정했다하나 고국에서 멀리 떠나 타국에서 전쟁을 하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그래서 그 군가는 애조를 띈 노래였었나 보다.

 

그것이 급기야 태평양 전쟁으로 번지면서 나는 초등학교 2년 되던 해 오사카의 부모를 떠나 의정부에 출가해 사는 누님댁에 보내졌다.  일년 반이나 어머니와 아버지를 떠나 낯선 조선 땅에 시집살이 하는 사돈집에 맡겨 졌던 것이다.   요슈코꾸민각꼬(양주 국민학교)에 들어 가 아직도 전쟁의 와중에서 우린 공부하는대신 광솔을  캐러 다니고 피마자를 따러 다녔다.  광솔은 무엇에 썼는지 모르지만 피마주기름은 일본 전투기의 윤활유로 쓰였다 한다.

 

오사카의 대공습으로 우리가 살던 집은 몽땅 다 타 버렸고 부모님과 바로 손윗 누나가 살아 남은 것은 기적이었다.   난 일찍암치 전쟁고아가 될 번 했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난 전쟁고아나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끝나 30년 가까이 재일 동포를 사셨던 부모님은 몸만 살아 귀국했고 아무 연고도 없는 해방 직후의 조선땅에 돌아 왔으나 살아가는 길이 막막했었다.  

 

어쩠던 아버지는 귀국한지 일년도 안돼 원인도 모르는 급병으로 자리에 누운지 1주일만에 이세상을 뜨셨다.   난 그 때 10번째 생일을 넘긴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학병으로 일본군으로 끌려 갔다 돌아 온 형이 아버지를 이어 가장이 되었으나 좌익사상에 물들었던 형의 해방직후의 생활은 궁핍하기 말할 수 없었다.  난 출가한 누님집을 전전하며 내 사춘기를 보냈다.  

 

중학교 3학년에 진급하여 얼마 되지 않아 625 전쟁이 터졌다.  키가 작았던 난 의용군에 끌려가는 곤욕은 면했으나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서 928 수복까지 원남동 로타리 한 모퉁이 가게에서 빙수장수를 하면서 지냈다.    

 

효제동 어름가게에서 어름덩이를 사다가 빙수기계로 갈아서 팔았다.  미국폭격기의 공습싸이렌이 나면 나는 뚝뚝 녹아 내리는 새끼줄에 묶인 어름덩이를 든 채 길가 남의 집 처마 밑에서 공습해제 싸이렌을 기다렸다.   원남동 네거리는 서울의대 부속 병원이 바로 코앞이라 전선에서 부상당해 실려온 인민군 병사들이 눈에 자주 띄는 곳이었다.  

 

 

그들의 숫자와 부상의 강도가 점점 심해 지는 것을 보고 전세는 역전되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9월 말에 가까워지자 인천방향에서 함포소리가 들리고 마침내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서울이 수복되었다.   

 

그 와중에 태평양 전쟁에서도 살아 남았던 우리의 가족은 또 한번 시련을 겪는다.   6남매중에 둘이 헤어지게 된 것이다.  

 

서울 상대에 출강하고 있던 명목상 가장이었던 형이 형수와 조카 둘을 남기고 납북인지 월북인지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이 북으로 간 것이다.   또  6남매중에서 일본에서 태어난 남매인 내 바로 손윗 누나가 행불이 된 것이다.     북으로 간 것일까?   그 사정을 아직도 알 수 없다.  

 

625 전쟁중 난 외톨이가 되었다.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UN군을 밀고 남하할 때 서울은 텅텅 비었다.  1950년 겨울 난 빙수장수하던 원남동 로타리에서 이번에는 소주와 오징어를 팔았다.  

 

14후퇴에 나도 피난을 간다고 남으로 내려가 시흥에 사는 먼 친척집에 들어 갔으나 결국은 중공군에 추월당하고 말았다.

 

인해 전술이라고 하나 중공군의 후방에서는 중공군을 한 사람도 본 일이 없다.   유난히 눈이 많이 온 1950-51 년 겨울 제공권이 없는 중공군은 야간에만 행동을 했기 때문이었으리라.   

 

난 연료를 구하기 위해 야산에 솔방을 따러 갔다 쌕쌕이라 불리는 미군 전폭기의 기총소사를 맞고 구사일생 살아 남기도 했다.    목표를 찾아 순회하던 전폭기에 발견되어 기총소사의 목표물이 되었던 것이다.

 

내가 엎드렸던 눈 덮인 무덤옆 2, 3 미터옆을 기관포의 탄환이 줄 이어 지나 갔다.  타타타타타타타 굉음을내며..   아 그 공포의 순간들이 50년이 지금도 생생이 남아 있다.

 

평택 아산까지 밀고 내려 갔던 중공군은 보급로가 너무 길어 지자 결국 후퇴를  시작했고 지금의 휴전선 근방에서 양쪽 군대는 대치하게 되고 지루한 휴전 협상이 진행하는 동안 한치의 땅이라도 더 빼앗으려 빼앗기지 않으려는 공방전이 지속된다.  

이 기간에 국군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군도 엄청난 사상자를 낸다.

 

난 다시 수복된 영등포에서 방한칸을 빌려 사는 셋째누님집에서 누님 내외 조카 셋과 모두 여섯이 지냈다.  

 

한강 이북 서울은 아직도 작전상 이유로 도강을 금지하고 있었다.   난 훈육소라는 모든 학교의 중고생을 모아 가르치는 임시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듣고 밤에는 영등포 미군 보급창 기지에 가서 노동을 했다.

 

일이 길어 지면 새하얗게 밤을 새는 경우도 있어 훈육소에 가서는 수업시간에 양지바른 담벼락에 기대 졸기가 일수였다.

미군 보급창은 영등포의 한 맥주공장까지 화물차로 실려온 미군 보급품을 하역하는 일이었다.  밤은 하역을 하고 낮은 다시 추럭에 옮겨 싣고 일선 미군 부대에 보내는 일종의 군수 물류기지였다.  

 

난 낮에 훈육소에 가기 위해 밤 노동을 했다.   100 파운드짜리 감자괘짝은 왜소한 중3생에겐 너무 무거웠다. 난 간간히 열차의 바퀴 뒤에 숨어 땡땡이를 쳤지만 이런 땡땡이를 잡으러 막대를 들고 휘집고 다니는 악질 십장(미군)을 만나면 간이 콩알만해 졌다.   감자괘짝만 아니면 견딜만 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가벼운 상자의 찻칸에 가서 짐을 날랐다.  일이 끝나면 임금으로 쌀을 받았다.  혹시나 훔쳐가지고 나가는 것이 없나 몸을 샅샅이 뒤지고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쌀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늦봄에 난 영등포 시장에서 잡혀서 영국군 트럭에 실려 파주 근방의 영국군 공병대의 노무자로 끌려 갔었다.  

 

전쟁의 혼란한 시절 길거리에 잡혀 강제로 끌려 가도 그 누구도 말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끌려 가기전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가 있었고 그 때 파주 근방 전선을 맡았던 영국군 1개 여단이 중공군 3개 사단에 포위되어 엄청난 희생을 치른 전투가 있었다.  2차대전때 용맹을 떨쳤던 그라체스터 연대는 1개 분대만 생환하고 전멸하는 참혹한 전투를 치른 곳이었다.   

 

우리는 이 초토가 된 영국군 기지를 건설하는 노동에 동원되었었다.  임진강 남쪽의 영국군 여단 본부가 있었고 그 주위에는 불에 타 싯뻘겋게 녹난 영국군 장갑자와 트럭의 잔해들이 뒤둘글고 있어 바로 얼마전의 전투의 처참함을 말해 주고 있었다.  

난 이 때 내 어머니나 누님들과 헤어지는 이산 가족이 될 뻔 했다.  어떻게 살아 남아 나중에 <1951 년 4 월쯤 영등포에서 헤어진 어머니를 찾습니다. > 라는 패말을 들고   테레비젼에 방영되는 사건이 생길 번 했다.    

 

다행히 얼마후에 영국군 부대에서 탈출하여 서울에 돌아 왔다.  다시 훈육소에 다니면서 고3을 맞았다.   고3이던 1953년 7월 그 지루한 휴전회담이 우여 곡절 끝에 성공하여 협정이 조인되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난 장래 물리학자가 되려는 꿈을 키우며 청계천변 헌 책방에서 산 일본어 수학이나 물리책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물리학과  이 아무개라고 써 넣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고3이 되자 내 장래를 내가 결정해야 할 상황에서 일반대학에 들어가 대학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자신감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해군사관학교에 가자는 것이었다.  그 땐 3군 사관학교가 모두 4년제 정규사관학교로 정착되어 졸업후 이학사 아니면 공학사 학위까지 주도록 되어 있었다.

 

혼자 떠돌이로 살던 때라 공짜로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재워주고 거기에다 공부까지 시켜 주는 사관학교는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해군 사관학교를 선택하게 된 계기는 미국 해군사관학교(Annapolice) 출신의 노벨 물리학자  마이켈슨에  고무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미국 해군사관학교 졸업생이지만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을 실험적으로 증명하여 명성을 날리며 노벨상까지 받은 대 학자였다.

 

해군사관학교에 가도 공부를 더 하면 물리학자가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한국의 해군사관학교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일년가까이 고민 고민 끝에 해사를 자퇴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당시 자퇴라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은 과실점을 충분히 받아 학교에서 퇴교 당하는 방법을 택했다.  미련한 짓이었다.  그러나 결국은 당시 해사 교장 이 이용운 준장의 분노를 사고 룰 대로 일을 처리하지 않았다.

 

난 해병 영창에 갇히고 고등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우여 곡절 끝에 퇴교 명령을 받고 다시 제2국민병에 편입되고 이듬해 다시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물리학과에 응시하여 내가 중학생때부터 꿈꾸었던 물리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나는 둘째 누님댁에 기거하며 주변의 초등학교 6년생을 가르치며 학비와 유학비를 벌었다.  그러는 중에 난 혜화동 일대에서는 소문난 A급 가정교사가 되어 있었다.  

 

5학년에 반에서 중간 정도의 아이들을 받아서 6학년에 오르면 반에서 1,2등을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등록비도 책값도 유학 준비금도 모아 둘 수 있었다.   그 대신 난 대학생으로 누릴 수 있는 낭만은 맛 볼 수 없었다.  그런 시간이 없었다.   물리와 수학을 공부할 시간도 모자라는데 매일 저녁이면 아이들을 서너시간 가르쳐야 하고 문제지를 만들어야 했다.   

 

사실 내가 A급 가정교사가 된 데에는 그만한 노력이 있었다.  수시로 입시 모의시험을 볼 때 나는 예상문제를 만들었다.   대개 80 - 90  퍼센트를 맞췄다.   그야말로 쪽집게라고 소문날 만했다.

 

그러니 내 대학생활은 연애 한번 못해보고 흘러가 버린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군대에 들어 갔다.  유학을 가기 위해서는 군필이 필수였다.

 

물론 약삭 바른 녀석들은 교묘하게 군대를 피해 유학을 갔지만 나 같이 룰 대로 사는 것밖에 모르는 고지식한 범생은 군대에 갔다 와야만 미국유학을 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해사의 지옥의 특별 훈련과 최하위 생도 인 Bottom 생활을 일년가까이 하고 해병 훈련까지 받았건만 퇴교와 동시에 제2 국민병에 편입되어  현역으로 입대하여 훈련을 받아야 했다.  논산 훈련소에서 보병 후반기 훈련까지 받았다.

 

대학 졸업생은 보병 후반기 훈련에서 81 밀리 박격포 와 155 밀리 무반동총의 사수 훈련을 받는다.  그런 무거운 무기를 분해하여 나눠 갖고 행군하는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제대해서 군복을 사복으로 가라 입지도 못하고 있을 때 419가 났다. 이승만 정권은 물러가고 허정 외무 장관이 임시 행정 수반을 맡을 때 나는 고국을 떠났다.

 

내 유청년 시절은 그야말로 고난의 길이었다.

 

그러니 내가 한국을 좋아 할리가 없었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던 때 난 결심하였다.  다시는 한국에 발을 드려 놓지 않겠노라고.    가난하고 핍박받고 룰 대로밖에 살 줄 모른 범생에게 미국은 천국이었다.  실력만 있으면 성공할 수 있는 나라였다.

 

그러나 그 결심은 10년이 못 간다.  60년대 말 Seattle의 Pay'nSave 라는 싸구려 잡화점에서 한국에서 만든 싸구려 와이셧츠를 보게 된다.  Made in Korea 의 제품을 미국에서 처음 본 것이다.  내가 그것을 보고 펑펑 울었다는 이야기를 블로그에 쓴 일이 있다.   2005/11/16 - [일상, 단상/잡문] - 오 대한민국

 

 

세종대왕의 직계후손이요, 어머니가 그렇게 자랑하던 조선 갑반의 후예에게는 부정할 수 없는 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귀국을 결심하게 되고 1969년 영구 귀국하였다.

 

내가 귀국해서 제일 첫 번쪄 석사학위논문을 지도한 학생은 학위를 받고 미국의 유명대학에 박사과정으로 추천해 주었다 .

 

졸업후 한 동안 IBM 회사의 연구 팀장으로 일하다 삼성의 스카우트를 받고 귀국했다.  지금은 삼성의 한 계열사의 사장이다.   

서울대 물리학과 현직 교수일 때 한 두 번 기흥의 삼성 반도체 공장에 초청 받아 견학을 갔다.   도처에서 제자들의 인사를 받았다.  수십명 아니 수백명 제자들이 일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삼성 반도체뿐만 아니라 도처에 연구개발에 종사하는 제자들이 있다.   난 그들을 가르쳤고 그들은 경제개발의 일선에서 한국의 경제 부흥을 위해 일했다.

 

신문지로 밑을 씻던 시절에 귀국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도 나름 오늘의 한국을 만드는데 열심히 일했다.  지하철을 무료로 타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이 나라에 이바지했다.

 

 625 전쟁의 가장 큰 희생자는 어린이와 부녀자와 노약자들이다.   그들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 별로 기록되지도 않고 거론되지도 않는다.   

 

가까운 가족중에도 그런 희생자들이 많이 있다.

 

둘째 누님은 미군 포탄의 폭발로 화상을 크게 입어 아직도 얼굴에는 그 화상터가 남아 있다. 큰 형수는 미군기 기총소사에 발 뒤굼치를 다쳐 한 동안 걷지를 못했다.

 

치안대라 불리는 일선 후방에서 활동하는 사이비 테러 단체는 인민군 치하에서 뭘 좀 했다 하면 불법으로 잡아다 폭행을 하고 죽이곤 했다.  큰 매형은 이런 사람들에 의해 살해돼었다.  시신도 찾지 못했다.   어디에다 암매장했으리라 추측할 뿐이다.

 

어린이들은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기 일쑤였고 노약자들은 방치되어 죽어 갔다.  부녀자들은 흔히 점령하는 군대의 병사들의 전리품이 되곤 했다.  

 

625전쟁중에 터키군과 흑인부대가 악명이 높았다.  미쳐 피난 가지 못한 부녀자들은 총칼이 지배하는 점령군의 전리품이었다.  부녀자들은 그들에게 당하고도 쉬쉬 감췄기 때문에 정확히 얼마나 피해를 보았는지 기록도 없고 알 수도 없다.  그저 덮고 덮었고 입소문으로만 퍼질 뿐이었다.

 

양주국민학교시절 내 사돈집의 친척 여자아이 하나가 있었다. 나 하고 같은 학년이라 어렸을 땐 허물없이 지냈다.   그런데 전쟁의 와중에서 그녀는 흑인 병사 몇 명에게 윤간을 당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가슴 아픈 일이었다.   

 

나하고 같은 학년이었지만 한 살 어렸으니 열 다섯이 채 안 된 소녀였다.     나이 든 부녀자들은 얼굴에 검정칠을 하거나 남장을 해서 병사들의 관심을 따 돌리며 숨어 다니졌지만 이 소녀는 아마도 그렇게 하라 가르쳐 주는 사람도 그렇게 해야 하는 줄도 모르고 병사들에게 끌려가 당했는지 모른다.   부모가 죽고 전쟁고아나 다름 없었던 터였다.   

 

그녀는 평생을 결혼을 하지 않고 살았는데 어쩌면 그 때의 정신적 충격이거나 알 사람은 다 알아 버린 치욕의 상처가 결혼의 장애가 되었는지 모른다.  전쟁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어린이는 전쟁고아가 되고 가족은 다치고 죽고 헤어지고 소녀는 병사들에게 강간을 당한다.   노인은 방치되고 굶어 죽는다.   군인으로 끌려가 죽음을 당하면 그래도 영웅으로 추앙되고 가족은 연금이래도 탄다.  그런데 수십배의 희생자를 내는 어린이와 민간인들은 그 누구도 알아 주고 관심을 가져 주지 않는다.   아픈 대로 상처 받은 대로 살아 간다. 

 

휴전 협정이 조인된 이후 매우 불안한 평화가 유지되었지만 군대도 안 갔다온 쥐새끼같은 정치모리배들은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선거때가 되면 안보니 전쟁이니를 들먹이며 국민을 불안하게 만든다. 

 

"전쟁을 생각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처절한 경험을 안겨 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To contemplate war is to think about the most horrible of human experi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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