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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에서 - Things Old and New
비극을 비켜간 운명의 인연 본문
비극을 비켜간 운명의 인연
우리의 서울에서의 "인연의 나선 궤적"은 블랙 홀에서 끝났다. 2007/07/02 - [일상, 단상/사랑, 운명, 인연] - 인연의 나선 궤적을 따라서
우리는 7년간 무수한 스침을 거쳤지만 만남을 피해 갔고 끝내 블랙 홀로 빠져 새로운 세계로 갔다. 그리고 아내 역시 넉달도 안되 내가 빠진 블랙홀에 빠져 같은 세계로 들어 가 신천지에서 만나게 된다. 그 블랙홀은 태평양이라는 긴 턴넬이었고 그 너머의 신천지는 바로 미국이었다.
1960년 미국엘 간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우리 이전에 미국 유학을 간 선배님들은 대개 배를 타고 갔다. 나나 아내는 항공기를 타고 갔지만 직행 노선은 없을 때였다. 단번에 태평양을 건널 수 있는 큰 항공기는 나오기 전이었다. 아내가 타고간 항공기는 플로펠러 비행기였다. 하와이 아니면 알라스카에 급유를 위해 기착해야만 했던 때였다.
그런데 왜 운명의 인연은 우리 둘을 모두 그런 가기 어려운 곳으로 데리고 갔을까? 왜 그런 장난을 쳤을까
도리켜 보면 그것은 우리의 만남을 비극적 종말에서 행복한 종말로 바꿔 주기 위해 "운명의 여신"이 머리로 짜낸 절묘한 각본이었다. 만약 우리가 혜화동에서 만났다면 그것은 비극으로 막을 내렸을 터이니까 말이다.
우리가 미국에서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결혼했는가는 이미 "운명의 인연"에서 이야기 했다. 그러나 그 결혼에 얽힌 사연은 이야기 하지 않았다.
아내는 서울의 명문 여대를 나온 유복한 집 맏딸이었고 나는 연로한 홀어머니와 함께 출가한 누님집에 얹혀 살다 온 가난한 고학생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결혼을 결정하고 양가 부모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펄펄 뛴 것은 아내의 부모들이었다. 아내의 집에서는 나에게 온갖 모욕 을 퍼 부으며 결혼을 반대했고 심지어 내 어머니에게 까지 가서 반대를 종용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여이 결혼을 했다. 그것은 1961년의 이역 만리 떨어진 땅이었기에 가능하였다.
내 어머니는 단지 아내의 집에서 반대를 종용하니까 따라서 반대한다는 입장이었지 심한 반대를 하지도 않았고 할 입장도 못되었다. 나는 이미 장성해서 나 스스로 결혼을 결정할 만한 나이도 되었고 또 학교에서 받는 조교 수당으로 경제적으로도 독립한 상태니 강력한 반대는 할 입장이 아니었다.
따라서 우리의 결혼 반대는 결국 아내의 집에서만 강력하게 제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내 역시 그런 정도의 반대에 뜻을 굽힐 사람이 아니었다. 아내가 이역 만리에 여학생의 몸으로 단신 유학을 왔을 땐 이미 그만한 각오가 되어 있었다. 집의 간섭 따위는 받지 않고 결혼을 포함해서 독립해서 살 생각이었다.
그런데 결정적인 반대의 구실엔 더 심각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양가 모두에게 해당되고 우리들 자신에게도 미치는 심각한 결혼 장애 요인이었다. 우리는 동성 동본이었다. 우리는 모두 전주 이씨였다. 그러나 우리 모두 족보를 보면 나는 세종대왕의 23대 직계 후손이고 아내는 태조가 추존한 태조의 할아버지 때에서 갈라져 온 후손으로 27대에서 갈라진 동성동본이다.
1960년 한국의 민법에는 동성동본 금혼이 규정되어 있었고 사회통념상으로도 결혼은 불가였다. 그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아내는 집안에서는 다른 이유를 더 대어 봐야 먹혀 들지 않으므로 동성동본을 들먹거리면서 한국에 오면 결혼신고도 할 수 없다고 위협을 하였다.
민법의 동성동본 금혼조항은 여성에게는 엄청난 불평등 조항이었다. 결혼은 하되 결혼신고가 되지 않으면 아내는 단순히 내연의 처가 될 뿐이다. 내가 맘을 달리 먹고 다른 여자와 다시 결혼한다 하여도 아무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다. 아이를 낳아도 내 호적에 입적시키면 "모"가 등재되지 않은 호적에선 자기 자식에 대한 친권을 주장할 아무 법적 근거가 없다. 삐뚤어진 문화와 몽매한 인습으로 한국에서 태어 난 여성들이 받는 갖가지 고통중의 하나였다.
이 조항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동성동본 결혼부부가 고통을 받았겠는가. 끝내 결혼을 반대하여 남자가 결혼을 무효화하는 순간 아내는 그냥 쫓겨 나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남자는 다른 여자와 버젓이 결혼해도 아내는 아무 주장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 한국의 민법 실정이었다.
우리의 경우에 비추어 보면 우린 고려시대의 친척이었던 사람들의 후손인데도 한 왕조(조선조)가 서고 망한 20세기에서까지 결혼을 금하고 있는 민법이었던 셈이었다.
우리가 결혼을 결정했을 땐 우리는 미국에 영주할 생각이었지만 그 누가 사람의 미래를 알랴. 우리는 결국 귀국하지 않았던가.
아내는 부모뿐 아니라 부모가 동원한 친척에게서 까지 결혼을 반대하는 편지를 받았다. 아내는 "우리는 여기서 결혼하고 여기서 아이를 낳고 여기서 영주할 생각"이니 동성동본 문제는 아무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되받았고 더 이상 결혼 반대 편지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혼 날자를 잡자 우리가 만든 청첩장을 결혼 통지서로 우송하는 것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1961년 한국과는 상용 국제전화도 없을 때였기 때문에 편지에 답장을 안하면 아내의 집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만났고 결혼하였다. 내 집에서는 우리 결혼에 도와 줄 능력도 없었지만 아내의 집에서도 아무 도움을 받지 않았다.
우리는 미국 목사님을 주례로 모시고 한 미국인 집 뜰에서 친구와 친지 몇을 초청하여 한국식으로 보자면 초라하기 그지 없는 결혼식을 올렸다. 싸구려 결혼 반지와 목사님 사례비 10불이 결혼비용의 전부였다.
미국 친지들이 웨딩샤워와 선물로 준 중고 가재 도구를 가지고 풀다운 침대가 있는 원룸에서 신혼여행도 없이 신혼을 차렸다. 아내는 나를 사랑하는 일념으로 이 모든 것을 감수하였다. 우리는 참으로 행복하였다.
연애 시절같이 갈 데가 없어 밤새워 길거리를 헤맬 필요도 없었다. 가난하지만 항상 함께 있 을 수 있었다. 그래서 공부도 잘 할 수 있었고 모든 일이 잘 풀렸다.
그러나 상상해 보라 우리가 혜화동에서 만났다면 과연 우리는 백년 해로의 맺음에까지 이어졌겠는가. 그것은 비극의 인연으로 끝나 버렸을 것은 불 보듯 훤한 일이다. 설혹 어찌어찌 맺어졌다 하여도 우리들이 겪었을 고통과 시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맺어지기 보다도 못한 비극이었을 것이다.
며칠전 혜화동엘 가서 우리의 인연의 자리길을 답사하고 와서 아내는 아직 생존해 계신 장모님에게 그 이야기를 하였다. 장모님의 첫 반응은 "그렇게 맨날 짤짤거리고 쏴 다녔으면서 왜 그때 ooo를 못 만났다냐?"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50년 가까이 다 산 다음이니까 나온 말씀이었다. 아내가 "어머니 그때 ooo를 만났다면 결혼 허락하셨을거유?" 하자 "아마 안그랬겠지"였단다.
역시 "운명의여신"은 비극을 예견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렇게 무수히 많이 스쳐가게만 하고 만남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비슬라바 쉼보르스카가"첫눈에 반한 사랑"에서 한 말
그들은 놀라게 되리라.
우연이 그토록 여러 해 동안이나
그들을 데리고 장난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면.
그들의 만남이 운명이 되기에는
아직 준비를 갖추지 못해
우연은 그들을 가까이 끌어당기기도 하고, 떨어뜨리기도 했다.
그들의 길을 가로막기도 하고
웃음을 참으며
훨씬 더 멀어지게도 만들었다.
라는 구절이 절실히 와 닿는다. 우리의 인연은 운명이 되기에는 때와 곳이 아니어서 자칫 비극으로 끝날 것을 행복한 종말로 이끌어 주기 위해 혜화동에서 미국의 시애틀로 우리 둘 모두를 날려 보내 주었던 것이다.
우리가 미국 시애틀에서 1961년 6월 16일날 서명한 결혼증서
에피로그
내가 박사학위를 받고 박사후과정까지 마치고 1970년 미국 영주권도 포기하고 영구 귀국하였다. 1967년에 낳은 큰 아들은 미국 여권을 갖고 외국인지위로 입국하였다. 그런데 내 어머니는 어떻게 든지 우리 둘의 결혼을 한국식으로 인정하고 싶으셨다. 그래서 어머니는 비록 신식 교육은 받지 못한 19세기 태어난 분이지만 잘 나신 분이었다. 편법을 쓰더라도 결혼신고를 성립시키기로 마음을 굳히셨다.
편법이란 호적서기가 실수로 동성동본간의 혼인신고를 받아 들였을 때 그 혼인은 호적법상 인정한다는 법원의 법률해석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귀국한 이듬해 1971년 어머니는 잘 아는 대서방 아저씨를 대행시켜 우리의 결혼신고를 마쳤고 호적등본을 떼어다 주셨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큰 아들도 입적시켜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떼어다 주신 호적 등본에는 호적서기가 실수로 마치 우리둘의 본관이 틀린 양 하나는 "전주"라고 한글로 쓰고 다른 하나는 "全州" 라고 한자로 적어 넣었다.
우리가 영구 귀국한 1970년 이듬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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