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별에서 - Things Old and New :: 일본 역사 드라마 "공명의 갈림길(功名が辻)" 중요 등장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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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역사 드라마 "공명의 갈림길(功名が辻)" 중요 등장 인물

 

장장 49회의 일본 역사 대하 드라마 "공명의 갈림길(功名が辻)"을 보자면 등장 인물이 엄청 많고 또 일본 역사 인물도 우리에겐 낯설어 중요 등장 인물에 대한 요약이나 해설이 있었으면 좋겠 생각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TV.co.kr 인 곳에 완전하지는 않지만 등장인물 해설이 있었다.  그런데 그곳엔 중요 등장인물의 사진과 이름 그리고 배역만 적어 넣고 해설은 회원 각자가 붙이게 되어 있었다.  미흡한 것도 있고 아예 빠진 것도 있어 그런 것들을 보완하여 여기에 올린다.  

미흡하고 빠진 것은 일본측 위키피다아 功名が辻 (NHK大河ドラマ) 에 의거해 그곳에 링크된 페이지를 찾아가며 보완했다.

이 역사드라마를 시청하는 이들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얼굴

이름

배우

설명

야마우치 카즈토요 [山内一豊] 카미카와 타카야 1545~1605. 전국시대의 무장. 토사번의 번주. 아버지인 모리토요(盛豊)는 오와리국 岩倉 織田家의 가로였는데, 오다가와 오다 노부나가와의 대립이 원인이 되었다. 岩倉城이 오다 노부나가에 의하여 멸망되고, 그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고 방랑의 몸이 되었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원수인 오다 노부나가와 우연히 만나고, 노부나가를 주군으로 삼겠다고 결심하였다. 히데요시에게 신임을 얻고, 그 후 히데요시와 함께 많은 전쟁에 참전한다. 오다 노부나가의 사후에도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계속 활약하여 1583년 시즈가타케의 전투, 1590년 오다와라의 전투 등지에서 공을 세운다.
창술 한 가지로 마음을 기울이고 일처리가 서투른 편이지만 정직한 생활태도로 일관한다. 정쟁에는 능하지 못하였지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치요의 기지로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신임을 얻어, 그 후 토사의 24만석을 얻고 1601년 영주가 되고, 코치성을 축성한다.
이토록 히데요시의 총애를 입던 토요토미가의 직신이었지만 히데요시 사후 토쿠가와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 전투로 토요토미가의 중신들에게 압박을 가할때 선두에 서서 이에야스의 편에 섰던, 처세에 아주 능숙한 인물이었다.

치요 [千代] 나카마 유키에 (仲間由紀恵 )

야마우치 치요의동상(高知(고치)県高知市高知城 소재)

미노(美濃)의 郡上八幡城(구죠하치만죠)엔토모리가즈의 딸

야마우치가즈토요(山内一豊)의 아내가 되어 시집 올 때 가지고 온 지참금으로 남편 가즈토요가 탐내는 명마를 사 주어 주군 오다노부나가의 말퍼레이드에서 남편을 돋보이게 해주는 등 남편의 출세에 내조의공이 큰 아내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드라마의 원저자 시마료타로는 "치요가 없었다면 야마우치가즈토요가 일국의 영지를 다스리는 다이묘(大名)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라고 치요의내조를 칭찬하고 "공명의 갈림길(원제 功名が辻)"도 바로 치요로 인해 가즈토요가 공명을 이룰 수 있었다는 뜻으로 쓴 것이라 한다.

야마우치 야스토요(山内康豊 玉木宏

가즈토요의 동생

노부나가를 섬기는 형에 반발하여 집을 나가나 나중에는 화해하고 형을 따르게 된다.

고린(小りん) 나가사와 마사미(長澤まさみ) 고가의 닌자  카즈토요와 하루 밤을 같이 자고 가즈토요를 쫓아 다니나 결국카즈토요에게 거절당한다.

 

 후와 이치노죠 (不破市之丞)

 츠가와마사히코(津川雅彦 )

 치요의 양아버지로 이모부에 해당한다. 전란으로 부모를 잃은 치요를 기르고 승마를 가르쳤다. 미노의 4인방 중 한 사람으로서, 노부나가가 미노를 공격할 때에 불타는 성에서 치요와 야마우치가즈또요의 혼인을 허락한다.

 

 호슈니(法秀尼)

 사쿠마 요시코 (佐久間良子 )

 야마우치 카즈토요의 어머니. 남편 모리토요가 노부나가의 군사에 의하여 살해당한 이래로, 지인(知人)의 대저택 구석에 연결된 암자에서 한거(閑居)하였다. 카즈토요 선친의 아내로서, 말하자면 야마우치 가문을 통솔하는 상징적인 존재이다. 아직 어리고 부모를 잃은 치요가 미노로 피신하기 전에 카즈토요가 데리고 온 것을 며칠동안 맡아 주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였고, 치요의 천성이 명랑한 것을 보배와 같이 여겼다. 치요와 카즈토요의 결혼을 누구보다도 기뻐하며, 이후에도 치요를 계속 지원하여 야마우치 가문의 부활을 위하여 음으로 노력한다.

 

 

키누(きぬ)

 타키가와유미(多岐川裕美)

 치요의 이모(치요의 어머니 토모의 언니)로 치요가 미노로 피신할 때부터 길러 준 양어머니.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남편 후와 이치노죠와 함께 치요를 사랑으로 길러준다. 키누의 입장에서는, 치요가 밝게 자란 것이 기쁜 일이지만, 치요가 말을 타고 돌아 다니는 것이 말괄량이의 모습으로 보여서, 시집갈 곳이 있을까하는 것이 걱정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치요가 카즈토요와 결혼한 이후, 치요의 상담상대가 된다.

 

 고도 키치베에(五藤吉兵衛)

 타케다 테츠야 (武田鉄矢 )

 야마우치 카즈토요의 부하로, 아버지인 모리토요 때부터 야마다가에서 가신으로 일했다. 카즈토요가 어릴 때부터 그의 뒤를 보살펴 주었고, 카즈토요가 아버지를 잃고 방랑할 때에도 따라 다녔다. 카즈토요가 노부나가를 섬기고 나서 카즈토요와 함께 많은 전투에 참가한다. 치요가 시집오고 나서 문장의 의미를 설명해 주기도 하였다.

 

 소후에신우에몬(祖父江新一郎)

 마에다 긴(前田吟 )

 야마우치 카즈토요의 가신. 아버지를 잃은 카즈토요를 고도 키치베에와 함께 키웠다는 자부심이 있다. 카즈토요의 진솔한 면모를 좋아하여, 카즈토요에게 주군으로서 해야할 행동을 가르쳤다. 고령으로 팔이 둔해져서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제일선에서 물러나기로 결의한다. 이후 카즈토요와 치요의 상담상대가 되어 마에다 가문을 받들고 있다.

 

 소후에신이치로(

 하마다 마나부(浜田学 )

 소후에 신우에몬의 장남. 아버지가 전투의 제일선에서 물러난 후에, 그 뒤를 이어받아 카즈토요의 오른팔이 된다. 토사입국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여 야마다 가문을 융성시켜서, 자신의 입지를 부동의 것으로 만든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타치 히로시(舘ひろし )

 선경지명이 있는 장수이지만 잔인한 면도 있었다.   미츠히데, 히데요시 등과 함께 노부나가 군단을 조직한다. 기존의 권위를 허용하지 않고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였다. 이는 야마우치 카즈토요를 등용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온화한 성격의 미츠히데와 자주 대립했다. 마침내 혼노지(本能寺)에서 아케치 미쓰히데의 모반으로 습격을 받고 자살하였다. 키노시타 토키치로에게 히데요시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노우()

 와쿠이에미(和久井映見 )

 오다 노부나가의 아내로, 미노(美濃)에 있는 사이토 도산(齊藤道三)의 딸. 본명은 키쵸(歸蝶)라고도 한다. 노부나가의 고독감을 유일하게 이해하고 있다. 아케치 미츠히데와는 사촌의 관계로, 어렸을 때부터 교분을 가졌다. 그런 미츠히데가 노부나가에게 신하로서 따르고자 머리를 숙이는 모습을 보고 약간 충격을 받는다. 혼노사의 변이 일어나서 미츠히데의 군대에게 공격을 받을 때에 노부나가의 앞에서 장도를 손에 들고 나타나서, 미츠히데 군과 싸워 노부나가의 아내로서 자랑스러운 일을 다하였다.

 

 이치()

 다이치 마오(大地真央 )

 오다 노부나가의 여동생. 上洛(주, 죠라쿠, 지방에서 교토로 올라가는 것)을 목표로 하는 노부나가의 뜻을 받고, 얼굴도 모르는 近江, 오다니성주인 아자이 나가마사(에노키 타카아키 맡음)에게 시집가기로 하는데... 시집가기 전 치요가 네네를 위하여 만든 옷을 가져간 것을 계기로 치요와 친해지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결혼하는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아자이 가문이 노부나가의 공격으로 멸망하고 시아버지와 남편이 자결하자 자신의 자녀들을 데리고 성에서 내려온다. 그러나 아들인 만부쿠마루가 노부나가의 명과 히데요시의 배신으로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분노한다.
혼노지(本能寺)의 변 이후 시바타 카츠이에와 결혼하고, 히데요시가 시바타 카츠이에와 전투를 벌이고 성을 함락할 때에 자녀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남편과 같이 자결하였다. 전국시대 여성의 운명을 꿋꿋이 견디고 살아간 가인(佳人)이었다.

시바타카츠이에(柴田勝家) 카츠노 히로시 (勝野洋)

오다(織田)의 가신 노부나가의 아비 노부히데가 죽자 하야시 미치카츠 (林通勝)와 함께 노부나가의 아우 노부가츠(信勝)를 옹립하려다 노부나가와 싸워 패하자 삭발하고 노부나가에게 항복한다.  노부나가의 명에 따라 노부까츠의 아들은 가츠이에가 양육하기로 한다.

 

 

 하야시 미치카츠 (林通勝)

카리야 슌스케(苅谷俊介 )

 오다(織田)의 중신 - 노부나가의 아비 노부히데가 죽자 노부나가의 아우 노부가츠를 옹립하려다 노부나가와 싸워 패하지만 다시 용서 받고 가노(家老 원로중신)이 된다.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信盛)

 타와라기 토타 (俵木藤汰 )

 오다가의 중신 노부나가의 아비가 죽어 상속문제가 대두될 때 노부나가의 편을 들어 모반하는 세력과 싸워 승리 노부나가의 신임을 얻어 노부나가 가신단의 우두머리격이 된다.

그러나 나중에 노부나가의 변덕에 의해 추방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니와나가히데(丹羽長秀)

 나다카 타츠오 (名高達男 )

 비교적 다재다능했던 인재로 전투 · 정치 · 조략 등 모든 면에서 활약, 오다가에 있어서 빠뜨릴 수가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 의미로「미고로 자(米五郞左)」이라고 불려 노부나가의 성공을 그늘에서 지탱했다. 「귀신 고로 사에몬(鬼米五郞左衛門)」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용맹하고 날카로운 대장을 맡은 적도 있지만, 보통 온화하고 성실한 성격으로 다른 사람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배후자의 일을 묵묵히 처리해, 반드시 약속한 기한 시간에 늦지 않게 했다고 한다. 노부나가를 섬기어 15년째에 그의 양녀에 장가갔고, 적자 · 나가노리(長重) 또한 노부나가의 4녀와 결혼이 약속되었다. 2대에 걸쳐서 노부나가가 딸을 준 예는 없었고, 이에 그가 노부나가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는지를 엿볼 수 있다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

 반도 미츠고로 (坂東三津五郎 )

 아사쿠라가를 섬기고 있을 때, 마침 도움을 청해 온 아시카가 요시아키에게 접근 해,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藤孝)와 함께 요시아키의 상경을 획책. 그 후 노부나가가 요시아키를 받들어 상경하자 노부나가에게 발탁, 에찌젠, 가가 공략전 등에 참가. 1571년에는 오미 시가군(滋賀郡) 5만석을 받아, 노부나가의 가신으로서는 처음 성을 소유한 영주가 되어 사카모토 성에 들어갔으며, 무로마치 막부 멸망 후는 단바(丹波) 공략의 총대장을 맡는다..
단바 평정 후는 동국을 증가해서 카메야마(龜山) 성주가 되었으며, 1582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상경 시에는 그 접대역을 맡았지만, 그 도중에서 쥬고쿠 공략의 응원 명령을 받아 군을 인솔해 쥬고쿠로 향했으나 그 도중인 6월 2일, 진로를 변경해 쿄토 혼노지(本能寺)에 숙박중의 노부나가를 급습한다. 노부나가는 전투에 진후 자결하는데 이 모반을 혼노지의 변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 역시 히데요시의 「쥬고쿠대반환」에 이은 13일의 야마사키 전투에서의 대패, 미쓰히데는 자신의 거성 · 사카모토성으로 도망치던 중에 쿄토에서 토착주민에게 살해된다.

학문이나 와카(和歌)를 통해 옛 식전례에도 능통한 것으로 알려진, 그야 말로 오다가 안에서도 가장 교양이 높은 사람 중의 하나라고 전해진다.

 

 가라샤(타마)

 하세가와 쿄코 (長谷川京子)

 아케치 미츠히데의 세째 딸로 태어났다. 이 드라마에서는 어렸을 때에 기후성 아래에서 치요와 만난다라고 설정되어 있다. 장성한 후에는 아버지와 친분이 있었던 호소카와 후지타카(콘도 마사오미 맡음)의 적자(嫡子)인 타다오키(이노 마나부 맡음)의 부인이 된다. 혼노사에서 노부나가를 타도한 미츠히데는, 호소카와 가문에 대하여, 아군으로 가세하여 줄 것을 의뢰하였다. 그러나 호소카와 부자는 이를 거부하고, 타마를 역적의 딸로 취급하여 유폐시킨다. 그런 고난을 당하던 중에 타마는 카톨릭에 귀의하고, 예수회 신부에게 세례를 받아, ガラシャ(Gratia, 라틴어로 신의 은혜라는 의미임)라는 이름을 받는다. 그 후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에, 오자카에서 군사를 일으킨 이시다 미츠나리는 토쿠가와 이에야스에 복종하는 무장의 처자식에게 오자카성에 들어 오라고 명령한다. 그 때에 타마는 인질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이 기거하던 저택(屋敷)에서 죽음을 선택한다.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그의 삶의 모습은, 치요를 비롯한 동군(東軍)의 아내들에게 용기를 주게 되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에모토 아키라(柄本明 )

 키노시타 토오키치로(木下藤吉郞),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노부나가 집안에서 그 밝음으로 인기가 있는 한편, 적도 많다. 아내 네네를 사랑하는 한편 비길 데 없이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 창술에 약해 카즈토요의 창술에 반해, 그 곧은 마음을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카즈토요에 있어서는 수수께끼가 많아 가끔 벽이 되는「상사」. 타고난「사람을 달래는」재주로 적을 조략하여 두각을 나타내, 마침내 관백(關白)·태합(太閤, 타이코우)에. 요도에 대한 총애, 한국 출병, 아들 히데요리(秀賴)에 대한 총애 등, 권력에 대한 맹신과 집착은 보통 사람의 상상을 초월해 수많은 드라마를 낳는다.

 

 네네(寧々)

 아사노유우코(浅野ゆう子)

 히데요시의 정실이다.

노우(오다 노부나가의 처) 와 마찬가지로 남편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성격의 인물이다.

히데요시의 조강지처 의 공적으로 발언권이 커지고 정치력을 발휘한다.  자신은 개종하지 않았지만 예수회선교사들에게 여러 가지 편의를 봐 주기도 했다.

히데요시가 관백취임후에는 여러 다이묘 앞에서 히데요시와 오와리(尾張)사투리로 입씨름을 할 정도로 기가 센 여자로 전해진다.

 

 요도(淀)

 나가사쿠 히로미 (永作博美 )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 이다

본명은 키쿠꼬(菊子)로 차차(茶々)로고도 불린다.

아사이나가마사(浅井長政)와 오다노부나가의여동생 이치()와의 사이에 태어난 노부나가의 조카딸인 셈이다.

히데요시가 57세 때 아들 히데요리(秀頼)를 낳고 히데요시 사후엔 히데요리의 후견인이 된다,

 

 아사히(旭)

 마츠모토 아키코 (松本明子 )

 히데요시의 누이동생(일설에는 애비가 다른).

오와리의 농부에 시집가나 히데요시에게 온후 전쟁에서 죽고 다시 소에다 요시나리(副田 吉成 ,일명 진베에(甚兵衛))와 재혼한다.  그러나 도꾸가와가와 화친하기 위해 다시 강제이혼시키고 도꾸고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후처(정실)로 시집보낸다.

 

 토요토미 히데츠구(豊臣秀次)

 나리미야 히로키 (成宮寛貴)

 히데요시의 누이 도모의 아들로 히도요시의 생질.

나중에 히도요시는 양자로 들여 후계자로 삼아 관백직까지 넘겨 준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전권을 넘겨 준 것이 아니라 조선전쟁을 관리하느라 내치만 맡겼다.

아들 히데요리가 태어나자 괄시를 받고 마침내 히데요시에게서 추방된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나카무라 하시노스케 (中村橋之助)

 아즈치 모모야마 (安土 桃山) 시대의 무장(1560 - 1600. 11. 06)
오오미국(近江國 坂田郡 石田村) 출신, 현재의 시가현 나가하마(長浜)시 이시다쵸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의 부장이었을 때 나가하마에 갔는데. 어느 절에서 심부름을 하는 어린 이시다가 차를 마음에 들게 끓여줘서 데리고 왔다. 장성하여 문관으로 임용되어 풍신수길의 측근에서 총애를 받았다. 1572년 13세의 나이로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섬기기 시작하여 그에게 중용되면서 1590년 사와야마(佐和山) 성(시가현 히코네시 도리이모토) 성주가 되었다. 이무(吏務)에 능했던 그는 조일전쟁 직전에 선봉행에 임명되어 히젠 나고야성(肥前 名護屋:사가현 카라츠시 친제이쵸)에 머무르면서 도항하는 부대를 수송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1592년 침략이 시작되자 6월에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吉継), 미스다 나가모리(増田長盛 ) 등과 함께 조선으로 건너가서 봉행으로서 총수인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를 보좌하면서 제장(諸將)을 독려하기도 하였다.벽제관 싸움에서는 고바야가와 다카카게와 함께 역전하여 대승을 거두었으나, 1593년 행주산성 전투에서는 권율 장군에게 대패하였고 이후,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명나라 군대와의 사이에 화평 교섭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고 말았다.정유재란이 일어난 뒤 1598년에 히데요시가 죽자 아사노 나가마사 (浅野長政)와 함께 하카타(현 후쿠오카)에 나아가 조선으로부터의 일본군의 철수를 주도하였다.2년 후인 1600년, 문치파와 무단파로 나뉘어진 세키가하라(関ヶ原:기후현 후와군 세키가하라쵸) 전투에서 패한 미츠나리는 전장에서 탈출했다 동년 10월 21일 사로잡혀 그 해 쿄토 로크죠가와라(六条河原)에서 도쿠카와 이에야스( 德川家康)에게 41살의 나이로 처형되었다.
묘는 쿄토 대덕사의 산겐인(京都 大德寺 三玄院) 에 있다.

 

 타케나카 한베에(竹中半兵衛)

 츠츠이 미치타카(筒井道隆)

 1544~1579. 성명은 타케나카 시게하루(竹中 重治). 전국시대의 무장이자 천재적인 군사(軍師, 작전참모에 해당(?)). 노부나가의 군대가 미노를 공격할 때, 미노측에서 그 지략을 발휘하여 노부나가 측을 괴롭힌다. 후와 이치노죠와 안면이 있었기 때문에 결혼전 치요와도 교분이 있었다. 아직 노부나가 측과 대립하고 있을 때에 카즈토요와 히데요시가 찾아오지만 미노 측을 배신할 수 없다며 히데요시의 제의를 거절하기도 하였다. 결국, 히데요시를 천하의 그릇이라 생각하고 그의 참모가 된다. 미키성(三木城, 현재 효고현 미키시에 있음.)공격의 무렵에 자신의 뜻을 이루는 도중 지병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난다.

 

 호리오 요시하루(堀尾吉晴)

 나마세 카츠히사(生瀬勝久 )

토요토미 정권의 삼중노(산쭈로(三中老))중의 하나.

처음 오다노부나가를 섬겼으나 나중에 히데요시 밑으로 들어 온다. 빗츄고꾸 다까마츠죠(高松城) 공략시 공을 세운다.

나중에 다이묘의 지위에 오른다.

 

 이토

 미하라 준코(三原じゅん子)

 호리오 요시하루의 아내. 나카무라 카즈우지의 아내와 함께 치요와 친분을 갖는다. 네네에게서 남편의 출세에 관한 정보를 알아보느라 여념이 없다. 낭비벽이 심한 편이고, 생활이 어려운데도 좋은 옷을 사는 습관이 있으나, 남편의 장래를 생각하는 심정은 치요와 다를 바 없다

 

 나까무라 카즈우지

 타무라 아츠시(田村淳)

 토요토미 정권의 삼중노(산쭈로(三中老))중의 하나

야마자자끼 전투(山崎) 시즈가타케의 전투(賤ヶ岳) 등에서 공울 세웠다.

 

 토시

 오토하(乙葉)

나카무라 카즈우지의 아내. 이토와 더불어 치요와 가까이 지내고 이토와 마찬가지로 네네를 통하여 남편의 소식을 알아보고 있다. 호기심이 왕성한 편이며 성안의 소문을 거의 다 퍼뜨리고 다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마에노쇼우에몬 (前野将右衛門)

 이시쿠라 사부로(石倉三郎 )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 하치스가 코로쿠와 함께 木曽川의 수운 등을 주름잡는 카와나미슈(川並衆)로서 활약하여, 히데요시와 친교를 맺고 이전부터 그의 신하가 되었다. 카즈토요의 입장에서는 '선배'인 셈이다. 토요토미의 군대에서는 항상 그가 모습을 보이고, 자주 히데요시를 보좌하였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관백(関白)인 秀次의 배척을 꾀하는 가운데, 아들이 秀次에게 忠誠을 서약하기로 하고 연판장에 서명한 사실이 발각되었다. 연좌(連座)의 죄를 추궁당한 마에노는 나카무라 카즈우지의 지배하에 맡겨져{元へ預けられ}, 카즈토요 등이 해명하라고 권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책임을 느끼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하치스카 코로쿠 (蜂須賀小六)

 타카야마 요시히로(高山善廣)

 본명은 하치스카 마사카츠(蜂須賀正勝)

하치츠카가는 오와리근방의 작은 나라 영주였는데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낭인시절 야하기가와(矢作川)에서 하치스카 마사카츠를 만났다 한다. 오다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에 가기전에 하치스카가에 들어 갔다고 하는 설도 있다.  히데요시의 젊은시절 상사였던 셈이다.

 

 토쿠가와 이에야스 (徳川家康)

  니시다 토시유키(西田敏行)

 미카와(三河)의 오카자키(岡崎) 성주 마쓰다이라 히로타다(松平廣忠)의 장남. 잘 알려진 대로 전국시대의 최후 권력자이자 토쿠가와 막부의 초대 쇼군. 젊었을 때부터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고 전쟁에 함께 참가한다. 혼노사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한 후에, 관백이 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上洛 요청을 묵살하고 신하로서 따를 것을 거부하였다. 小牧.長久手의 전투에서 히데요시군과 국지전을 벌여 승리하여 강화를 맺고, 히데요시의 누이인 아사히(旭)를 정실로 맞이하고, 히데요시의 어머니 大政所를 인질로 하고 나서야 비로소 신하로서 따른다. 그 사이에 치요나 카즈토요 부부와는 인간관계를 맺는다. 히데요시의 사후에는, 이시다 미츠나리와 대립한다.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

 미타니 코키(三谷幸喜)

 무로마치바쿠후(室町幕府)의 15대 쇼군(将軍)

1573년 오다노부나가에게 교토에서 추방되고 무로마치 막부시대의 종연을 고한다.  추방되었다고는 하나 1588년 관백 히데요시밑에 들어가 충성을 맹세할 때 까지는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 직위는 유지했다고 한다.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

 에모리 토오루(江守徹 )

 1519년 이마가와 우지치카의 5남으로 태어나다. 일본 명문호족의후예로 본성은 겐지(源氏)

스루가(駿河)의 이마가와(今川)가의 9대 당주.

2만 5천의 군사를 끌고 노부나가의 오와리에 쳐 들어 가나 오께하지마(桶狭間)전투에서 오다노부나가에 크게 패하고 패망의 길로 들어 선다.

 

 


Posted by Satsol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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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8.12.03 11:52

    비밀댓글입니다

    • Satsol 샛솔  댓글주소 수정/삭제 2018.12.03 21:28 신고

      댓글 감사합니다. 블로그 포스팅 날자를 보니까 거의 10년전 이야기네요. 지금 생각하면 그 때만해도 꽤 정열도 있고 기운도 팔팔했었나 봅니다. 링크 걸어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