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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터면 못 올 뻔했던 길을 걸어왔다. - 그 무서웠던 운명의 갈림길

 

625 전쟁은 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갈라놓은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나 역시 그중의 하나다.   

 

전에 박완서님의 "못 가 본 길이 아름답다."라는 책에 대해서 썼을 때 내 운명에 대해서 몇 줄 언급한 일이 있다.

 

*****************************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지난해 625의 60돌을 맞아 내 625 생존기를 내 블로그에 올린 일이 있다.  나도 625로 인해 가정이 와해되고 전쟁고아 같은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해사에 들어가 물리학을 하려고 했었다는 이야기를 썼었다.

 

내가 해사를 뛰쳐 나와 내 가고 싶던 길을 가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떤 길을 갔을까?    나도 역시 이 책의 저자처럼 못 가본 길에 대한 아쉬움을 간직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참으로 다행한 것은 난 가고 싶었던 길을 갔고  행복하고 후회 없이 살았다는 것이 저자와는 다른 점일 것이다.



출처: https://boris-satsol.tistory.com/640 [지구별에서 - Things Old and New]

*****************************  

 

사실 이렇게 가볍게 몇줄로 적을 만 큼 내 운명의 갈림길에서 쉽게 선택한 길은 아니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난 그때 내가 겪었던 처절했던 내 "투쟁"에 대해 기록해 두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내 625 생존기  에도 간략히 언급했지만 태평양 전쟁으로 지리멸멸되었던 우리 가족은 625 전쟁으로 완전히 와해되었다.    

**********************************

그런 와중에서도 난 장래 물리학자가 되려는 꿈을 키우며 청계천변 헌 책방에서 산 일본어 수학이나 물리 책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물리학과  이 아무개라고 써넣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고3이 되자 내 장래를 내가 결정해야 할 상황에서 일반대학에 들어가 대학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자신감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해군사관학교에 가자는 것이었다.  그땐 3군 사관학교가 모두 4년제 정규 사관학교로 정착되어 졸업 후 이학사 아니면 공학사 학위까지 주도록 되어 있었다.

 

혼자 떠돌이로 살던 때라 공짜로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재워주고 거기에다 공부까지 시켜 주는 사관학교는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해군 사관학교를 선택하게 된 계기는 미국 해군사관학교(Annapolice) 출신의 노벨 물리학자  마이켈슨에  고무되었기 때문이었다.



출처: https://boris-satsol.tistory.com/561 [지구별에서 - Things Old and New]

**********************************

 

미국의 해군 사관학교를 그대로 흉내 내어 만들었다지만 한국 해사는 전혀 다르게 운영되고 있었다.    

 

긴 고민 끝에 다시 내 새 운명을 개척할 것을 결심한다.    내가 해사를 뛰쳐나올 만한 용기가 있으면 사회에 나가 일반 대학에 진학하여 고학을 해서 물리학을 공부할 수 있을 것이란 자신이 생긴 것이다.   

 

이 "용기와 자신감"에만 의존해 어마 어마한 일을 벌인 것이다. 

 

사실 사관학교 교칙에는 자퇴를 할 수 있게 되어 있었지만 교칙은 교칙일 뿐 실제 자퇴를 받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과실점을 충분이 받아서 퇴교 처분을 받아 낼 생각을 한 것이다.   탈영은 퇴교에 해당하는 과실점을 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돌이켜 생각하면 미련한 짓이었다.

 

1954년 11월 어느날  아침 난 몰래 사관학교 뒷산으로 올라가 탈영을 했다. 음주 흡연도 거의 퇴교에 가까운 과실점을 매긴다.  난 저녁에 진해 시내에 들어가 막걸리를 사서 마시고 필 줄도 모르는 담배를 사서 몸에 지니고 교문을 통해 사관학교에 들어왔다.

 

그러나 내 계획은 교칙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교장이었던 이용운 준장의 교장실에 불려 가 회유를 받은 것이다.    내가 12기 수석으로 들어왔는데 내가 퇴교를 하면 동기생들이 동요가 있을 것 같다는 예상을 한 것이다.

 

그래서 교장은 내가 퇴교 의사를 철회한다면 탈영 기타 교칙 위반은 가벼운 과실점으로 처리하고 내가 졸업하면 유학을 보내 물리학을 공부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거의 두 달 고민을 하고 그 엄청난 모험을 감행한 것인데 이제 교장의 회유를 수용한다면 무슨 꼴인가.   더욱이 교장이 무슨 수로 내 졸업 후의 진로에 대해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그건 그냥 당장 내 퇴교를 막으려는 감언이설일 뿐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교장은 내가 자기의 회유를 거부하자 격분하고 휴전은 휴전일뿐 아직도 전시라는 것이다.  그리고 전시의 탈영을 최고 총살형까지 받을 수 있는 중죄라고 위협하고 사관생도는 준사관이니 고등 군법 회의에 회부하겠다고 해병대 영창에 수감시켜 버린 것이다.

 

1954 11월 중순에 나는 해병대 영창에 수감되어 고등 군법회의를 기다리는 몸이 된 것이다.

 

그때 난 겨우 19번 째 생일 지난 지 며칠 안된 아직도 청소년일 때였다.  난 이 모든 사단을 어머니나 누님 가족에 알리지 않았고 나 홀로 맞섰다.   내 인생의 최대 위기를 내 홀로 맞아 싸웠다.  

 

사람이 불안해지는 것은 미래가 가장 불확실할 때다.   영창에 갇힌 후 한 두 번 해군 법무관이 나를 방문했던 것 같다.  그 중 하나는 서울 법대를 나와 해사 교관으로 사회과학 관련 교양과목을 가르쳤던 분 같다.   

 

내 변호인 격으로 방문한 법무관은 이 모든 과정은 교장의 독단으로 적법하지 않은 절차인데 사관학교 겨울 휴가를 보내고 나면 귀교하지 않는 생도가 생길 것을 우려해서 일종의 시범으로 군법회의를 연다는 것이다.   생도들의 휴가 전날 강당에서 전교생을 앉혀 놓고 열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날 군법회의가 열리면 어쩔 수 없이 휴가 가는 생도들에게 경고를 주기 위해서라도 중형을 내리게 될 것이란 예상이었다.

 

그것은 위로가 되지 않고 불안만 가중시켰다.

 

나는 기도 이외에 무슨 다른 할 일이 없었다.   그 때도 예비신자로 진해 성당에 다닐 때였다.   대림절에 부르는 성가를 입속으로 되뇌면 기도만 했다.

 

가톨릭 성가는 대부분 기도문이다.

 

구세주 빨리 오사 어둠을 없이 하사.. , 성조에게 허락하신 메시아를 보내소서 어지러운 세상에 방황하는 우리들의 간구함을 들으사… , 우리를 괴롭히니 이 어려움 이기게 도와 주옵소서…

  

 

어두움을 없이 하사..

 

내게서 이 불안을 없애주소서

 

 

사관학교에 응시하고 나서는 합격시켜 달라고 기도를 했고 이젠 내 인생의 가장 캄캄한 암혹을 없애달라고 기도를 하는 아이로닉 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군법회의를 기다리던 진해 해병대 영창에서의 20여 일간은 내 생애에서 가장 캄캄했던 불안, 절망의 암혹기였다.

 

사람이 종교적이 되는 때는 바로 이런 암혹기다.  이성적으로 생각을 하고 해도 벗어 날 길이 보이지 않는 그 절박함이 절대자에게 구원을 빌게 되는 것이다.

그때 내 변호인 격인 법무관이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어떻게든 전교생 앞에서 군법회의를 여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탈영 직전 한 두 달간 거의 묵언으로 보냈다.   내 고민이 깊기도 했지만 내가 퇴교의 계획이 혹시라도 새어 나가지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대신 일기만 열심히 썼다.  이 사실이 득이 되기도 했고 해가 되기도 했다.  

 

그는 내가 거의 두 달 묵언으로 지낸 사실을 지적해 내가 저지른 탈영은 정신상태가 온전하지 않아서 발생한 것일 수 있다고 주장해 정신 감정을 받게 하고 재판을 열 것을 주장했다.   배심관 대부분은 사관학교 교관(교수)들이었고 교장과 몇 골통 훈육관을 빼고는 이 군법회의는 적법한 절차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배심관들이 모두 동의하였기 때문에 난 전교생이 모인 강당에서의 재판을 모면할 수 있었다.    정신 감정을 받기 위해 난 영창에 재수감되는 대신 환자로서 위병 하나의 감시를 받으며 사관학교 의무실에서 입원환자 대우를 받으며 다음 군법회의를 기다렸다.  

 

정신감정 결과는 정상으로 판정이 나왔고 생도들이 다 떠난 빈 강당에서 2차 재판이 속개되었다.    이 재판의 판결은 근신 1개월이었고 이어 퇴교라는 행정처분이 내려졌기 때문에 판결 결과는 무의미한 것으로 끝난 것이다.   나는 그렇게 갈망했던 퇴교처분을 받고 서울행 기차를 탔다.

 

 

이 운명을 가른 한 장의 종이 쪽은 내 생애의 가장 처절했던 암흑기를 이겨 낸 훈장이다.  그래서 난 아직도 이 종이쪽을 간직하고 있다. 난 그 이듬해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하여 지금의 길을 걸어 왔다.

 

 

1954년 겨울 내가 용기를 내지 않고 머뭇거렸다면 나는 결국 딴 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쯤 그 길의 종착점 근방을 서성이며  "그때 난 물리학자가 꿈이었는데.."  하고 못내 아쉬워하며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라는 블로그 포스팅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Posted by Satsol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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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천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6.29 09:51

    어쩌면 해사에 계셨어도 결국 이 길로 오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 Satsol 샛솔  댓글주소 수정/삭제 2019.06.29 12:14 신고

      동기중에도 사관학교 졸업하고 늦깎이로 물리학 교수가 된 사람이 두엇 있긴 있습니다. 임관후 한2년 일반근무를 하다고 사관학교 교수요원 코스로 서울대 물리학과에 학사편입하고 졸업후 유학도 가고 해서 사관학교 교수를 거쳐 퇴역후 일반 대학 교수로 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공부란 때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결국 만족스런 과정이라고 볼 수는 없지요.

  2. bruprin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7.01 01:29

    한 편의 영화와 같은 내용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

  3. 황성주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7.03 07:02

    젊은 시절 일반 사람과 달라도 뭔가 다르셨군요.

    박정희 전 대통령은 공과도 많고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지만,
    오래 전 그의 전기를 보니 젊은 시절 선생님과 비슷한 고민을 하고
    결단을 내려 자신의 길을 헤쳐나간 것 같더군요.

    문득 생각이 나네요. ㅎ

76년 전에 내가 쓴 엽서

 

오늘 나는 참으로 희귀한 문서 하나를 건졌다.      내가 76년 전 1943년 2월 18일에 쓴 엽서를 얻은 것이다. 

 

이런 문서가 있었다니 참으로 신기하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며칠전 셋째 누님의 두 째 딸인 생질녀가 우리를 찾아왔었다.   그때 제 어머니가 되는 셋째 누님 이야기를 하다가  그 누님의 옛 일기에 내 어렸을 때 이야기를 쓴 것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 생질녀는 이젠 70대의 할머니지만 끝까지 누님을 모시고 살았던 효녀다.     그래서 어머니(셋째 누님)의 유물을 가직하고 있었던 듯하다.  거기에도 내가 올렸던 사진도 있다고 했다.     그중의 하나가 내가 그 누님의 신혼초일 때 도쿄 누님 집을 갔다고 기념사진으로 찍었던 것이다.

 

    전에 그 이야기와 사진을 블로그에 쓴 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포스팅을 보여 주었었다.   

 

*****************************************

 

 

얼마 후에(1942년?) 셋째 누나는 도쿄에 사는 매형과 결혼했고

난 국민학교에 들어 간 다음 첫 여름방학에 바로 위의 누나와 함께 도쿄 누님 댁에 놀러 갔었다.

1943년(?) 여름 토쿄에서.

 

 

********************************************

 

 

오늘 그 생질녀가 다른 볼 일이 있어 다시 찾아왔다.  그 때 내 이야기를 기억했던지   제 어머니(셋째 누님)의 유물 가운데에서 발견한 것이라며 내가 매형(생질녀의 아버지)에게 쓴 엽서라고 가지고 왔다.   "일어라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지만"  외삼촌인 아저씨가 쓴 것이니까 내가 보관하라고 주고 갔다.

 

매형의 일기장 비슷한 문서도 함께 가져왔다.

 

장난감 엽서는 아주 작은 사이즈다.

 

 

 

도쿄의 형님에게  오사카의 사다미츠 이사오(내 당시의 일본 이름)

 

 

엽서 뒷 면

 

"형님은 오겐키 데스까(건강하신가요?) 보꾸와 겐끼 데스 (저는 건강합니다) 처음 오셨을 때 스모토리(일본 직업 시름꾼)인 줄 알았어요.   저는 누님이 ***  가고 싶으니까 보러 가게 해 주세요.  동경에 가게 되면 후지산도 볼 수 있으니까 가고 싶네요.  이 엽서는 스모토리가 사 주신 엽서예요.   쇼와 18년 2월 18일 사요나라(안녕) "

 

일부 글자는 판독할 수 없어 ***으로 대치했다. 

 

1943년 2월 18일이면 초등학교 1학년 때다.   1942년 4월에 고꾸민각코(국민학교, 초등학교)에 들어갔으니까 아직 2학년에 오르기 전이다.      

 

  

 

 

미나토야 고꾸민각꼬 입학생

 

 

 

그 뒷면에는 선친이 쓴 촬영 일자와 내 생년 월일이 적혀 있다.

소화 17년은 1942년이다.

지금부터 정확히 70년 전이다.

당시는 조선사람에 대한 일본 사람들의 차별과 구박이 심해서

아버지는 내게 일본 이름을 따로 지어 주신 것 같다.

어떻게든지 "조센징 아이"라고 따돌림을 당하지 않게 해 주려는 아버지의 고심 어린 배려였다.

이 학교에도 또 그전에 다닌 유치원에도

일본말이 서툰 어머니를 대신하여 아버지가 시간을 내어 데리고 다니지 않으면 

동경으로 출가한 셋째 누님이 학부모 노릇을 해 주었다.

그래서 내 일본 이름이 <사다미츠 이사오>가 되었던 것이다.



출처: https://boris-satsol.tistory.com/870 [지구별에서 - Things Old and New]

 

이 셋째 누님 역시 어머니 같은 분이다.   

 

내가 어렸을 때 무척 귀여워해 주셨는데 초등학교 1학년 전후해서 도쿄의 매형에게 시집을 갔다.

 

********************

1938년 5월 29일(일)

임시 시험이 어제로 끝났다.   점수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지만 홀가분한다. 

(남)동생의 말소리도 많이 자랐다. 작년에 <신군노우따>부를 때와는 영 다르다.  요지음 부르는 노래의 가사는 대체로 또렷하게 발음한다. <미요 토오까이노 소라아께떼>하고 노래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너무 귀여워 죽겠어서 레코드래도 취입해서 영구히 남겨 놓고 싶은 기분이 들 지경이다.  동생이 나중에 어른이 되어 4살쯤 되었을 때 자기의 목소리였다는 것을 알고 듣게 된다면 얼마나 좋아 할까 생각해 본다. 


출처: https://boris-satsol.tistory.com/630 [지구별에서 - Things Old and New]

********************

 

 

그 매형이 처음 오사카에 왔을 때 머리 모양이 일본 스모토리(프로 일본 씨름꾼) 같아서 스모토리란 애칭으로 그 매형을 불렀었다.   그 매형이 어린 처남인 나에겐 장난감 우편 국 세트를 사 주셨는데 거기엔 엽서,  우표 스탬프 등 우편국에서 취급하는 여러 용품들이 있었다.   그 걸 아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인 장난감 엽서에 이 편지를 썼던 것이다.

 

참으로 생각도 못한 내 76년 전 내 필적을 보게 될 줄이야..

 

 

 

 

 

Posted by Satsol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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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ierrabird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6.28 00:00

    소중한 메모리가되는 것들을 구하셨네요
    총명한 어린 소년의 모습이 그때부터 보입니다

  2. 황성주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6.28 10:04

    예전에 읽었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가슴이 찡합니다.
    사람 사는 근본 모습은 세월이 아무리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기원 전에 지구 곳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애환도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겠지요.

    • Satsol 샛솔  댓글주소 수정/삭제 2019.06.28 11:57 신고

      공감합니다. 이런 옛 유물들을 보면 아련한 기억들이 서글프게 다고 옵니다. 애환을 함께 나눴던 사람들이 모두 고인이 되었기 때문일까요?

착하고 순진한 세상도 있었다.

 

착하고 순진한 세상도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남아 있으리라고 믿었던 때도 있었다.

 

최근에 읽은 프로그램 기술서적에 쓰여 있던 한 구절이다. 


내가 한 때 정열을 쏟아 부어 배우고 개발하고 가르쳤던 프로그램 언어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세상이 사악해졌기 때문이다.   세상이 그렇게 착하고 순진하게 남아 있으리라는 믿음에서 "보안"에 대한 깊은 생각 없이 개발되었던 언어들이기 때문이다.   


내 정년 퇴직이 가까워지던 20세기가 저믈어 갈 때였다.


인터넷에 GUI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점점 웹브라우저에 퍼져 나갈 때 나는 이것이 물리를 가르치는 큰 도구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기대를 했다.   나는 그 때 내 생각을 한국물리학회의  "물리학과 첨단기술" 지 1999년 11월호 에 발표하기도 했다.  





이 그림은 내가 전산물리를 개발해서 가르칠 때 제작한 프로그램들의 화면 캡쳐로 만들어

"물리학과 첨단기술"지의 1999년 11월호 표지에 사용하도록 제공한 것이다. 





안 표지에 위의 겉 표지가 내가 어떻게 제작한 것이란 설명을 싣고 있다.  

20년전 일이다.

이 논문은 아래의 사이트에서 다운 받을 수 있다.

http://webzine.kps.or.kr/contents/data/webzine/webzine/15307692381.pdf

 

 

처음 전산물리를 개발하고 가르칠 때에는 그 때 한 참 "뜨던" Java 를 프로그래밍 언어로 썼다.   그리고 애플랫(applet)를 만들어 웹페이지에서 구동할 수 있게 했다.

 

"주사위만 던저도 열물리를 이해할 수 있어요"는 이 애플랫들의 모음이었다.

 

정년 퇴직을 하고 이 물리 교육재료를 좀 더 보강 확장할 생각으로 프로그래밍을 하다가 우연하게 플래시(flash)를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플래시로 주사위를  그리려다  "물리로 배우는 플래시" 강좌 시리즈를 쓰게 된 것이다.    

 

그 이야기는 강좌 시리즈 첫 페이지에 아래와 같이 썼다.

 



내가 Flash programming을 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전에 Java 로 만든 대학 일학년 일반 물리 중 열물리의 보조교재

 주사위만 던져도 열 물리의 기본을 이해할 수 있어요. 

를 업데이트할 가 하던 중 주사위의 동영상을 그릴 필요가 생긴 데에 있습니다. 주사위를 그리기 위해 정6면체를 그리다 보니 주사위보다 Flash에 더 매료되 Java를 제쳐놓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엉뚱하게 프라톤 입체 몇 개를 더 그리게 되어 Flasher 가 되었습니다. 아래 동영상은 지난 겨울에 Flash MX  Actionscript 만으로 제작한 프라톤 입체들입니다.   그림을 마우스로 클릭하면 회전합니다.  View full size를 크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플라톤 입체들

 다음회에는 에는 플래시에 감춰진 수학이라는 주제의 이야기를 올리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2003/03/03 



http://phya.snu.ac.kr/~kclee/lects/lect01/lect01.htm

에서 발췌

 

강좌의 사이트는  여기에 있다.   http://phya.snu.ac.kr/%7Ekclee/lects/contents.php

 

이 강좌에 수록되지 않은 주사위 제작과정은 아래의 사이트에 있다.       

 

https://satsol.tistory.com/

 

 

그러니까 현직에 재직할 때에는 열물리 Java applet 을 프로그래밍하는 데 내 정열을 쏟았고 퇴직하고는 한 5,6년을 플래시 프로그래밍에 내 심혈을 기울였다.

 

그런데 이제 두 제작 툴(tool)들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내가 심혈을 기울여 썼던 플래시 강좌도 볼 수 없게 될 것이고 내 정열을 쏟아 부은 열물리 Java Applet도 구동할 수 없게 된다. 

 

Java를 인수한 Oracle은 몇년전 Java 언어에서 Applet 을 중단했고 웹 사용 지원도 올해(2019) 3월까지만 할 거란다.   

 

Oracle Announces End Of Java Applet Support

Thursday, 28 January 2016

It really is the end of an era. Oracle has announced that Applets are deprecated in JDK 9 and will be removed from the JDK and JRE in the future.


이 future 라는 때가 올해(2019) 3월이란다.

 

플래시의 운명도 이와 별 차이가 없다.  

 

Adobe will finally kill Flash in 2020

 

아들 모두가 퇴출되는 가장 큰 원인은 보안때문이다.   

 

플래시를 돌리려면 flash player 를 깔아야 하고 Java 를 돌리려면 JRE(Java Runtime Environment)를 깔아야 한다.   고객의 컴퓨터에 무엇을 깐다는 것은 구멍을 내는 것과 같다.    순진하고 착한 세상에서는 구멍이 있어도 사악한 짓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세상은 순진하고 착하게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이런 구멍을 내는 기술은 퇴출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들 기술들은 그 인연을 다 한 것이다.   내 정열과 심혈을 기울인 노고의 결실물도 함께 수명을 다 한 것이다.

 

Posted by Satsol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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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기원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2.15 00:22

    여러모로 참 아쉬우시겠습니다. 참, 저는 97년 가을에 교수님의 전산물리가 처음 개설되었을 때 수강했는데, 그 해에는 Borland C++ Builder로 수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카시니 간극, 2-D ising model 등 정말 재미있게 프로그래밍하며 지냈지요. 학기 말에 몇몇 우수 예제들을 뽑으셔서 발표하게 해주셨는데, 제 것도 포함되어 정말 기뻤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해 강좌에서는 말씀하신 java로 바뀌어, 살짝 아쉬웠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교수님께서 느끼시는 감정에 비교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약간이나마 느껴지네요.

    힘내세요, 교수님의 그러한 열정과 자산이 지금의 전산물리가 되는 토대가 된 것은 영원히 남을테니까요!

    • Satsol 샛솔  댓글주소 수정/삭제 2019.02.15 11:29 신고

      기원님 위로와 응원글 고맙네요. "전산물리의 새로운 가능성"을 쓴지가 올해로 20년이 되었네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강산이 두 번 바뀌는 20년이나 버텼으니 수명이 긴 거지요. 요즘같이 지수함수적으로 발전하는 second half of chessboard 시대에 20년의 수명을 지탱했다는 데 위로를 삼아야지요.

추억의 열물리책, Reif

 

 

얼마전에 올렸던 글  2019/01/22 -  열물리학자의 국부론 "The Second Law of Economics" 의 한 페이지가 내 추억을 불러 일으켰다. 

 

그 책에는 저자가 Reif 의 열물리학 책,  "Fundamentals of Statisical and Thermal Physics"를 통해서 엔트로피를 이해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열물리 국부론의 저자는 노벨상을 두번 탄 것으로 유명한 존 바딘 밑에서 포스닥을 한 초전도이론의 전문가다.   초전도체 이론은 고체물리분야로 입자물리보단 열물리에 가까운 물리분야이지만 이 분야를 공부한 사람도 열통계물리는 잘 모른다.

 

그래서 그가 중미의 컬럼비아에 가서 새로 박사과정을 설립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할 때 그에게 열통계물리를 가르쳐 달라고  청탁을 받았다 한다.    그는 이 과목은 잘 모르는 분야라고 손사래를 치고 사양했는데 그렇다면 이 번 기회에 공부좀 하는 것이 어떠냐고 강권하는 바람에  수락했다고 한다. 


그 때 그는 처음으로  "Reif" 의 열 통계물리학 책을 소개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으로 가르치면서 처음으로 엔트로피를 이해하였다고 회고하고 있었다.

 

Reif 책 하면 내겐 노스텔지아를 불러 온다.    학부과정 열물리학을 가르칠 때엔 거의 항상 이 책을 교과서 삼아 가르첬다.   그러니 내 평생 끼고 산 책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 Reif 책 이야기가 위의 페이지에 나왔으니 그 감회가 새삼스럽지 않겠는가!     그런데 Reif 책과 내 인연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내가 환갑을 맞던 1995 년 내 생애 두 번째 안식년을 맞았다.   그 때 난 교육부에서 주는 해외 연수 지원금을 신청해서  로드 아일랜드의 브라운 대학에 갈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거기 교수로 있는 내 물리학부 동기인 지금은 고인이 된 강경식 교수에 의뢰해서 주선해 주기를 부탁했었다.  

 

그러나 교육부 해외 연수 지원금은 그 해 부터 60세 이상인 사람에겐 지원을 하지 않는 방침이 정해 졌다는 것이다.    참으로 아쉬운  소식이었다.   그래서 서울에 있으면서 전산물리 연구나 할 생각으로 마음을 달래고 있었는데  강경식 교수에게서 좋은 소식이 왔다. 

 

Brown 대학에서 한 학기 열무리를 가르치고 강사료를 받아 체류비로 쓰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Brown 대학에서도 이 Reif 의 책으로 학부 4학년 대상으로 열 통계물리를 가르쳐 왔는데 그 동안 가르치던 교수가 때 마침 안식년으로 1년을 비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거기서도 이 교과서로 가르쳐 보지 않은 사람은 이 걸 처음 읽고 가르치기엔 버거운 교과서이기 때문에 사람을 구하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강교수가 나를 추천해서 강사료를 받도록 주선 해 준 것이다.

 

그 때 교육부가 지원하는 지원금은 년 3만불이었는데 브라운 대학에서는 한 학기 강사료로 5만불을 주기로 했다.   당시로는 1년 생활비로 충분한 액수였다.

 

Reif 책이야 강의 준비 없이도 그냥 백묵하나 들고 들어 가서 한시간 강의할 수 있을 만큼 책 내용을 달 달 외우고 있었으니 부담될 것이  없었다.

 

교과서도 브라운대학 물리학과에서 새 책을 사 주었다.

 

책을 버리고 버렸어도 그 책은 죽을 때 까지 버리지 않을 것이다.    내 서재에 꽂혀 있는 그 책은 브라운대학 물리학과에서 사 준 그 책이다.  


전에 블로그에 포스팅했던 글귀 하나를 잡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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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전 노벨 상을 탄 J. Michael Kosterlitz Brown 대 교수는 내가 1995-1996년 Brown 대에 방문교수로 갔었을 때 내 host 였었다.  마침 그 교수의 옆방에 빈 연구실이 있어 그방을 1년 빌려 썼었다. 


출처: https://boris-satsol.tistory.com/1443 [지구별에서 - Things Old and 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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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연유로 의외의 곳(책)에서 Reif 의 책이 언급되었으니 내 노스텔지어르 자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며칠전 Reif 책을 ebook 으로 샀다.  종이 책이 있는데에도 ebook 으로 다시 산 것이다.

 

 

 

 

또 다시 펼쳐 볼 기회가 몇 번 있을런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 책은 내 분신과 같은 책이다.

종이책은 종이책 대로 내 서재의 책꽂이에 꽂아 두고

전자책은 어디로 가던 날 따라 올 수 있으니 얼마나 편리한가!

 

 

 

이 책의 서문에도 "엔트로피"의 깊은 뜻을 가르치기는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내가 평생 가르치고 연구한 엔트로피를 어떻게 쉽게 가르치나를 나름 새로운 방법을 개발해서 정년을 맞아 학교를 떠나던 해 현직에서는 마지막 논문을 미국의 American Journal of physics 2001년 1월호에 발표했었다.  ( https://aapt.scitation.org/doi/10.1119/1.1287719 )

논문 전체를 다운로드하려면 

http://www.physics.snu.ac.kr/~kclee/howto/doc/howto.pdf

또는

howto.pdf

 

 

이 논문의 요점은 엔트로피를 쉽게 가르치기 위해서 게임과 같은 전산 프로그램을 개발한 것을 보여 준 것이다.      그리고 열역학적 엔트로피와 통계물리적 엔트로피를 어떻게 연관지어 이해할 수 있는가를 보인 것이다.

 

 

이 논문의 한 구절

entropy의 Clausius 정의와 Boltzmann의 정의도 쉽게 이해시킬 수 있다.

내 퇴임 고별 강연도 “주사위만 던져도 열물리를 이해 할 수 있어요.”로 

내 이 마지막 논문을 해설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 논문에서도 내가 가장 익숙한 Reif 책을 참고 문헌으로 인용했다.

 

 

참고문헌 3 에 Reif 를 인용했다.

 

 

 

교과서라 ebook 으로 산 Reif 책의 값도  $76.84 이나 한다.

 

 

환전수수료등모 두 합쳐  86775원이 내 신용카드에서  빠져 나갔다.  내 노스텔지어가 유발한 비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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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ierrabird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1.31 01:07

    선배님같은 분을 옆에서 가까이 알고 지낸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2. 박기원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1.31 03:00

    아, 추억의 Reif 책이네요. 97년에 이 강의를 최무영 교수님께 들었습니다. 그 책 표지는 짙은 밤색이었던 것 같은데, 요즘 ebook의 표지색은 화려해졌네요. ^^;

    제가 95년 1월 본고사 시험을 치를 때, 교수님께서 감독관(?)으로 오셨던 기억이 납니다. 논술시험시간이었습니다. 그 해에 안식년이셨군요. 전 대학 신입생이라 즐거웠던 기억이 가득한 해였는데, 교수님께서도 특별한 의미가 있으셨다니, 웬지 기분이 좋습니다. ^^;

    • Satsol 샛솔  댓글주소 수정/삭제 2019.01.31 06:44 신고

      반갑네요. 최무영교수가 학부 때엔 물리학과 교수가 많지 않아서 내가 열통계물리를 가르쳤을 겁니다. 최무영 교수도 Reif로 가르치는 내 강의를 들었을 테니 박기영님은 내 손자벌 Reif 책 제자인 셈이네요.
      Reif 책은 192 판인가 나왔으니 표지가 여러 번 바뀐 것 같네요.

  3. 코스모스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8.11 11:04

    정보이론에서 이산확률변수 X ~ p(x) 에 대한 엔트로피 H(X)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p(x)는 probability mass function of X)
    H(X) =: - Σ p(x) log_2 p(x)
    즉, 확률변수 X를 기술하기 위해 필요한 평균적인 비트(bit) 수 로써 정의한 거죠.
    물리학에서 엔트로피가 무질서도를 뜻하는 지표인데, 어째서 그런지 이해못하고 있었습니다. 정보이론에서의 엔트로피 정의에 비추어보면, 대충 'system의 상태를 기술하는데 필요한 평균적인 무엇?' 일 것이다라는 게 현재로서 제가 내린 결론입니다.
    교수님께서 가르침을 주시면 안될까요?
    지나가던 행인이 염치없이 질문드립니다.

  4. Satsol 샛솔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8.11 13:56 신고

    Reif 책 231 페이지에 답이 있습니다. The quantity-In r, i.e., the function 2: Pr In Pr, can be used as a measure r of nonrandomness, or information, available about systems in the ensemble. This function plays a key role as a measure of information in problems of communication and general "information theory."*

83번째 생일 전후

 

오늘로 83년을 살았다.  (1935년 11월 20일 태어남)

 

 

 

 

지난 일요일 18일엔

아이들이 점심을 사 줬다.

삼성동 트레이드 타워 최상층(52층)

Top Cloud Restaurant

 

 

 

음식보단 View 값이다.

트레이드 타워 52층에서 내려다 본 한강과 영동대교

 

 

 

전날인 17일엔 국립박물관 극장 용에서

세종대왕 뮤지컬 "1446"을 봤다.

1446은 한글을 반포한 해라고 한다.

 

 

 

손녀가 그려서 만들어 준 북마크 생일 카드

 

 

 

세종대왕의 Y 염색체를 물려 받은 손자

제 누이가 학교에서 배운 명상 수련을 실습하고 있는데 따라하고 있는 손자

요즘은 이 놈과 노는 재미가 쏠쏠하다.

 

 

 

오늘 진짜 내 생일 상

동부 이촌동 일식당 "아지겐"의 "게살 옴렛"

미세먼지가 "보통" 수준이라 자전거를 타고 갔다 왔다.

 

 

 

청주 도꾸리 150 ml

 

 

 

두부튀김

 

 

 

11월 15일엔 서울대 자연대 명예교수 간담회가 있어서 갔었다.

교수 회관의 천정의 등불을 배경으로 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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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천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8.11.21 09:04

    83번째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앞으로도 늘 건강하십시요..

  2. 눈팅이지만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8.11.21 09:51

    감사히 잘 보고 있습니다. 생신 축하드립니다.
    열정 있게 사시는 모습뵈면서, 선생님 연세 절반도 못살았지만, 많이 배우게 됩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3. 수문장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8.12.20 14:15

    축하드려요..^^

82번째 생일 -2017-11-20 제주도 Vadada 카페

 

2017년 11월 20일은 내 82번째 생일이었다.   82번째 생일을 제주도에서 맞았다. 

 

여행을 자주 다니다 보면 생일을 꼭 집에서 맞게 될 수도 없다.   이 번 여행은 겨울 피한을 위한 숙박호텔 답사의 예행여행이었다.   마땅한 숙소를 찾는다는 목적이었다.  해리안 호텔은 맘에 맞는 호텔이었다. 

 

콘도형이면서도 매일 하우스키핑을 하는 일반 호텔과 같은 서비스를 해 주었고 위치도 좋았다.   대 만족이다.

 

82번째 생일날은 월요일인데 카페 "VADADA" 에서 점심을 먹기로 정했다.   이틀전 토요일에 갔을 땐 주말이라 자리가 없어 월요일에 오면 어떠냐고 종업원에 물어 보니 주중은 조금은 한가하다는 대답이었다.

 

카페는 일종의 칵테일 바와 같은 메뉴를 걸어 놓고 있었다.  우린 2식을 하니까 중식이 메인 식사다.    

 

Magarita 를 마시고 점심으로는 이 카페의 시그네쳐 메뉴인 새우 버거를 시켰다.   다 맛이 있었다.   섭섭하게도 식후주가 없었다. 

 

코니가 좋아하는 "Kiss of Fire" 나 내가 늘 마시는 Calvados 아니면 Cognac 이라도 있었으면 식후에 홀짝일 수 있었을 터인데  아쉬웠다.   옥상에 올라가 11월의 햇살을 벗 삼아 바다풍경을 바라 보는 것으로 식후주를 대신했다.  

 

 

 

 

11월 18일 토요일에 처음 갔었다.

이 카페에 대해서 들은 적은 있었지만 여기에 있는 줄 몰랐다.

주상절리에서 월드컵 보조경기장으로내려와

어느 시인인지 화가의 저택을 지나니 주차장이 나오고 차가 엄청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뭔가 하고 가 보니 유명하다는 카페였다.

특이한 것은 "No Kid Zone" 으로 어른 한 사람당 한 아이만 데리고 올 수 있고

아이는 어른을 떨어져 혼자 다니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카페는 잘 다듬어져 있었고 바깥 파다 풍경도 일품이었다.

바깥 테이블에는 히터를 키고 담요를 빌려 준다.

 

 

 

실내는 이 런 테이블 들이다.

모두 셀프 서빙인데

설프 서빙 치고는

값은 꽤 높다.

 

 

 

제대로 된 마가리타를 만들어 줬다.

 

 

 

이 카페의 대표 메뉴인 슈림프 버거

 

 

 

식후엔 제주도의 남쪽 햇살을 즐겼다.

뒤로는 한라산이 보인다.

 

 

 

올레길 마크

 

 

 

올레길 마크 리본은 제주도의 바람 때문에 가만히 있지 않는다.

사진을 찍으려면 날리고 서 있는가 싶으면 날리고 한참 걸려 조용한 마커 리본을 찍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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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메이데이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7.11.27 20:14

    '제주도'가 귀빈 두 분을 모신 데다 생신 행사까지 맡았으니 큰일을 했습니다. 식후주를 어느 고리에서 놓쳤는지 돌아보고 다음에는 꼭 챙기기를 '제주도'에 당부합니다. 선생님 생신을 맞이하여 두 분 선생님께서 만수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 경천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7.11.28 08:56

    늦었지만 82번째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늘 건강하십시요.

  3. 박강서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7.12.17 11:12

    자주 들르지는 못 합니다만, 제가 소중한 말씀들을 듣는 곳 입니다.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건강하시고 즐겁게 사시는 날들이심을 확신합니다. 감사합니다.

  4. 수문장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7.12.18 09:24

    82세 생신 축하드립니다.^^

금연주의자의 고백

 

지난 토요일 늘 보는 "불후의 명곡" 프로그램에 "이난영"씨의 "다방의 푸른 꿈" 이란 노래가 나왔다.     그런데 그 노랫말의 첫 머리에 "담배연기"란 말이 나온다.  

 

내뿜는 담배연기 끝에
희미한 옛 추억이 풀린다
고요한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며
가만히 부른다 그리운 옛날을 ....

 

담배연기 끝에 희미한 추억...

 

멋 있는 가사다.   

 

 

 

담배의 명장면은 뭐니 뭐니 해도 "제3의 사나이(The third man)"의  라스트 신이다.    

 

 

 

Joseph Cotton 주연의 1949년 영국 영화 "The Third Man"  의 마지막 장면 

Greham Greenee 원작의 이 영화는 1999년 영국 영화협회(British Film Institute)가 영국 영화 역대 최고의 작품

(greatest British film of all time.)으로 선정했다.

https://youtu.be/X7bInqjmEN4

 

 

 

옛날에는 담배는 이처럼 멋이 있었다.

 

담배 연기하면 나도 추억이 있다.    극렬한 금연주의자인 나도 한 때 담배를 피웠다.

 

2년에 한 번씩 공단 건강검진 문진표를 작성하다 보면 옛날에 내가 지은 죄를 고백하게 만든다.   담배를 언제 얼마동안 하루에 몇가치 피웠는가를 되새기게 한다.   아 2년전에도 물었는데 또 이걸 묻네....

 

이 문진표의 답을 미리 말하면 난 스물 한 두살때 부터 마흔이 되기 한, 두해 전까지 하루 반갑 (열가치) 정도의 양을 피웠다.

 

내가 담배를 배울 땐 담배의 해독에 대해서 알려진 것도 없었고 담배를 피우는 것은 멋을 부리는 것과 비슷하게 받아 들였다.

 

남자가 술 담배 못하면 뭣에 쓰노?  할 만큼 남자면 술 담배 정도는 해야 남자라 불릴 수 있다는 식이었다.

 

1956년 내가 대학 2,3 학년 무렵에 쓴 일기장엔 담배연기를 자연(紫煙 보라빛 연기)이란 낱말로  멋을 부려 표현했다.

 

 

 

1956년 3월 18일 (일요일) 에 쓴 내 일기장의 일부

Viceroy는 그 당시 한국에서 유행하던 양담배 이름이다.

 

 

내가 담배를 배우게 된 계기는 내가 대학생 때 가정교사를 하고 나서였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혜화동 일대에서는 쪽집게 A급 가정교사로 소문이 났었다.  (2007/08/04 - [일상, 단상] - 강남엄마 따라잡기 - 쪽집게 과외선생)

 

그 때 그 글에서도 내가 담배를 배우게 된 동기를 간략하게 쓴 일이 있다.     과외를 맡긴 엄마들이 과외비를 낼 때가 되면  날 찾아와선 과외비와 함께 당시로는 최고의 선물인 양담배를 한 두 보루(10갑)씩  대 주었다.  자연히 담배를 자꾸 피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1959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양담배를 대 놓고 피게 되었던 것이다.    Chesterfield 와 Philip Morris 를 좋아하는 줄 알고 그 종류를 잘 갖다 주었다.   일기장에 적힌 Viceroy 도 한 동안 그 logo 가 한국 공군 마크를 닮았다해서 "공군담배"라는 닉네임이 붙어서 뜨던 담배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갔는데 군대에서는 "화랑" 담배를 대 주었다. 화랑담배는 그냥 보통 종이 포장이라 배급을 받을 때면 담배는 바짝 마른 풀가루였다.   연기가 너무 매워서 담배를 꺼꾸러 물고 입김으로 적셔서 불을 붙이곤 했다.   훈련소에서 노는 시간에 할 일 이 없으니 담배 피우는 일이 휴식의 전부였다.  화랑 담배를 꺼꾸러 물고 입김을 불어 넣던 생각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제대하고 419 가 났고 그 해 8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 다음 해 아내와 결혼했지만 담배 피우는 습관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1960 년 초반에 담배의 유해성 공방이 처음 일었다.   미국의 담배 회사와 보건 담국이 담배의 유해성에 대해 공방을 벌였다.    담배갑에 담배 유해성 경고를 넣어야 하느니 마느니 논란이 일었던 것이다.

 

막강한 자금을 동원한 담배회사들은 로비와 광고,  사이비 연구비를 지원하는 등 반격이 만만찮았다.

 

내가 박사논문 자격시험에 합격하고 논문을 준비하고 있을 때 이론물리 전공 대학원 학생은 Annex 라고 불렀던 물리학과 뒷켠 목조 건물에 연구실을 배당 받았다.    그 연구실을 쓰던 대학원생 대부분은 담배를 피지 않았는데 내 office mate 인 Nori 만 담배를 피웠다.   그래서 자연히 우리는 담배 피는 Office mate 끼리 방하나를 나눠 쓰게 되었다.

 

우린 대부분 올빼미족이었다.   낮에는 시끄러워 공부가 제대로 되지 않으니까 저녁을 먹고 다시 연구실에 와서 밤샘 공부들을 했다.   자정을 넘기는 것은 보통이고 두시 세시에 집에 돌아 갔다.   자연 다음날은 늦잠을 자고 10시 아니면 11시에 학교에 왔다.  

 

그러다 보니 자정 쯤 되면 출출해져서 캠퍼스에서 1 마일은 떨어 진 45가의 "Rainbow" 라는 Tavern (피맥)에 가선 피자를 사 먹곤 했다.     다시 연구실에 돌아 가지 않을 땐 생맥주도 한 두잔 했다.

 

그 때 옆방의 Ed Fizet 라는 친구는 의자 팔거리에 걸친 내 오른 손 손가락사이에 끼운 담배와  왼 손으로 잡은 맥주 Pitcher의 포즈를 쳐다 보고는  멋 있는 "Classic pose" 라고 칭찬해 주곤 했다.

 

난 그저 무심히 자연스럽게 취한 포즈인데 그 친구의 "classic pose" 라는 칭찬이 아직도 귓가에 맴 돈다.

 

담배는 내겐 그런 멋이었다.

 

1964 년경 경북대학교 전자공학과 교수이던 물리학과 선배 한 분이 UW 에 연수를 오셨다.    물리학과 선배이기 때문에 같이 많이 다녔는데 사진에 일가견이 있는 분이었다.  

 

내 담배 피는 모양을 사진 찍어 준 것이 있다.   아마도 멋 있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앨범에 붙어 있었던 같아 찾아 보니 있었다.

 

캐나다 Vancouver의 UBC 에서 포닥(박사후 과정)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에도 금연을 못하고 담배를 피울 때였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양담배를 금지하였고 공무원이 양담배를 피우다 들키면 엄중한 처벌을 내렸다.    그 땐 전매청에서 팔 던 최고품 담배는 "백양"이었는데 "청자"가 최고품으로 대체되던 시기였다.   전매청 담배는 양담배에 비하면 값도 만만찮은데 질은 형편 없었다. 

 

내 옆방에 내 동갑내기 교수가 있었는데 우리는 둘이 이 참에 담배를 끊자고 제안했다.  둘이서 끊으면 서로 격려하면서 감독하면서 금연이 용이하지 않을까 해서 였다.   그러니까 70년대 초에 내 최초의 금연 노력이 시작되었다.

 

"금연" 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이후에도 금연 다시 흡연등 여러번 끊고 피우고를 반복하다 1975년 관악 캠퍼스로 이사 간 다음엔 완전히 끊었다.      그러니까 불혹의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소싯적" 못된 버릇을 청산한 셈이다.

 

1977 - 78 년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USC 에서 방문교수로 1년 지낼 때 미국의 금연상황은 굉장히 발전해 있었다.     그래도 Semiar 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한 둘 있었지만 재털이는 치운 상태라 담배갑에 재를 터는 궁상을 떨었다.    

 

1965-66 년 Brown 대학에 1년 방문했을 땐 물리학과 건물 자체가 금연 빌딩이었다. 

 

작년에 노벨상을 탄 Kosterlitz교수가 추운 겨울에도 건물 밖 현관에서 떨면서 담배를 피던 딱한 모습이 떠 오른다.(2016/10/04 - [일상, 단상/잡문] - 2016년 물리학 노벨상)

 

 

 

.................

 

 

 

 

과외 선생을 할 때 엄다들이 갖다 주던 Chesterfield 담배

아마 이 담배로 담배를 배우지 않았나 싶다.

 

 

 

공군 담배로 닉네임이 붙었던 양 담배

Viceroy

1956 년 일기장에 썼던

Viceroy 의 자연(보라빛 연기) 주인공

 

 

 

1963년이나 64년 무렵 담배에 불을 붙이던 내 모습

Seattle 에서

당시 UW 에 연수왔던 경북대 L교수가 찍어 준 사진

당시엔 크루컷(Crew Cut)이 유행이라 나도 한 동안 크루컷 머리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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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tsol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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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천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7.06.07 08:29

    건강검진시 금연한 지 10년쯤 되고 아직도 100% 금연은 아닌 저는 사실대로 기재합니다만, 금연하신지 40년이 지나셨으면 건강 검진시 이실직고(?) 하시지 말고 평생 안피우신 걸로 간단 작성하셔도 검진에 영향이 없으실 듯합니다. ㅋ

    • Satsol 샛솔  댓글주소 수정/삭제 2017.06.07 11:37 신고

      감사합니다. 문항이 있으니까 항상 옛날 기억을 되 살려 주는 거지요. 담배라는 게 원래 인다안들은 의식으로만 피웠다던데 백인들이 그 악습을 달리 퍼뜨렸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그 많은 사람들을 고통의 도가니로 밀어 넣게 된 거지요. 안타깝습니다.

  2. 수문장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7.06.12 09:24

    담배는 멋으로 피웠던 시기가 제게도 있었지요.
    담배 피우는 모습이 멋지십니다. 커피와 담배는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친구이자 필수품이었지요..^^

    • Satsol 샛솔  댓글주소 수정/삭제 2017.06.18 15:58 신고

      감사합니다. 수문장님도 흡연 경력이 있으셨군요. 전에는 담배에 대해 너무 몰랐습니다. 지금은 그 해악이 그 만큼 알려졌는데도 금연운동은 상대적으로 미약합니다. 좀 더 강력해 져야 할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3. 지나가는중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7.12.20 11:51

    재미있게 잘읽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빠져들어 읽었네요

서울대학교에 가다 - 2017-05-17

 

 

이론물리 연구센터 소장을 하는 내 애제자 교수가 오늘 몇 명예교수를 점심에 초대했다.

 

5월 중순 스승의 날 근방이면 항상 점심 초대를 하곤 한다.     오랜 만에 서울대학교에 갔다.   작년 5월에 가곤 1년만이다.   학교는 많이 변해 있어 자하연 식당을 찾는데에도 몇 사람에게 물어 봐야 했다.

 

점심을 먹고는 옛 물리학과 건물에 갔다.    내가 관악 캠퍼스에 가서  은퇴할 때까지 25년 넘게 쓰던 연구실도 다시 가 보고 또 새로 지어 옮겨 간 물리학부 새 건물도 구경할 겸 가 본 것이다.

 

은퇴하고 학교를 떠난지 벌써 17년이나 되었으니 변한 것이 많은 것은 당연한 것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17년이 지났다.

 

학교는 5월 축제의 한 가운데였다. 

 

 

 

 

 

 

27동 건물 현관 바로 옆 2충 방이 내 연구실이었다.

이 건물은 개축을 하고 수학부가 쓰고 있다.

 

 

 

개축을 할 때 현관 바로 위 연구실 두개를 헐고 천정을 2층까지 높여 놨다.

동숭동 문리대 캠퍼스에서 1975년 관악캠퍼스로 이사오면서

난 정면에 보이는 벽의 연구실을 25년간 차지하고 있었다.

지금은 이름도 알 수 없는 어느 수학과 교수의 연구실이 되어 있었다.

 

 

 

반대방향에서 바로 본 내 옛 연구실

목련 나무 대신 소나무가 서 있었다.

 

 

 

이 건물이 물리학부 새 건물이다.

 

 

 

대학 본부 앞 5월 축제장

 

 

 

SNU Festival 이란 치장물이 서 있다.

 

 

 

58년 전 내 대학 졸업사진 1959년 2월 쯤 될 것 같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이 된 옛 서울대 문리과 대학 캠퍼스에서 찍은 사진이다.

왼쪽 어깨위에 "대" 자가 보이는 뒷줄 왼쪽에서 네번 째 졸업생이 58년전 내 모습이다.

1970년 난 여기서 교수 생활을 시작했다.

관악캠퍼스로 이사 갈 때 까지 5년 남짓 이곳에서 연구하고 가르쳤다.

마로니에 공원엔 대학 본부 건물 하나만 남아 있고 옛 건물들은 다 사라졌다.

단지 남은 것은 마로니에 나무 몇 구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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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tsol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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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번째 생일

 

오늘은 내 81번째 생일이다.    1935년 11월 20일생이니 오늘이 정확히 생후 81년 되는 날이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누구나 한 때는 어린 아이였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 한 돌을 갓 넘긴 내 손자를 보고 있자면 나도 저렇게 간신히 발을 떼며 걸음마를 배울 때가 있었을 것이란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진도 있고 내가 손자를 귀여워 죽겠다고 하듯 세째 누님도 나를 귀여워 죽겠다고 쓴 일기장을 남겼다.

2011/01/04 - [일상, 단상/나의 가족, 가족사 ] - 셋째 누님의 옛 일기에서



또 어머니도 내 재롱이 비상하다고 출가한 큰 누님에게 쓴 편지를 남겼으니 사실은 사실이다.

2007/12/11 - [일상, 단상/나의 가족, 가족사 ] - 어머니의 유필(遺筆)


 

전에 옛 사람의 관악산 등정기를 올린 일이 있다.  

2008/12/14 - [뚜벅이 기행] - 옛사람의 관악산 기행 

 

관악캠퍼스에서 25 년 가까이 교수생활을 하면서 관악산을 무수히 올랐던 나는 옛 사람의 관악산 등정 기행문에 감동을 받아 그 글을 이 블로그에  옮겨 썼었다.

 

그 옛 사람은 정조 때 우의정에 올랐던 채제공이란 사람인데 나이 67세 때 관악산에 올라 갔다.  나도 그 나이엔 팔팔 했고  몇년전에 관악산 보다 높은 미국의 모나드노크 산 등정을 한 일도 있다.

 

2011/10/11 - [해외여행기/미국 동부] - 모나드노크(Monadnock)산 등반기

 

채제공이 그 나이에 관악산에 오른 것은 그 보다 얼마전의 정승이었던 허목이 83세에 관악산에 올랐다는 기록에 자극을 받아서 였다고 한다.

 

그 기행문에

 

내 일찍이 들으니 미수(眉수) 허목(許穆) 선생은 여든세 살 때 관악산 연주대에 올랐는데 걸음이 나는 것 같아 사람들이 신선처럼 우러러보았다고 했다.

 

그래서 자기도 83세에 관악산에 오르겠다고 별렀다는 것이다.  나이 80살에 세상을 떴기 때문에 그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나는 83세 까지 살아 남는다면  관악산에 오르고 싶다.

 

 

81번째 생일의 감회다.


 

 

 

1937년경 사진

어머니의 품에 안긴 두살쯤의 나

 

 

 

2,3주전에 찍은 내 손자

내 손자는 2015년 10월 30일 생이니 80년 (- 20일) 차이의 내 손자

위의 내 사진을 보니 내가 봐도 어딘가 닮은 것 같다.

이 녀석도 내 나이가 되어 혹여 이 글을 읽으며 이 때를 회상하려나? 


 

 

1938년경 사진

 

 

 

1941년 유치원 입원 기념사진

 

 

 

국민복을 입고 명찰 비슷한 것을 단 것으로 미루어

국민학교 들어 간 후인 듯

그렇다면 1943년경일 것이다.


 

 

오늘(2016년 11월 20일)  레스토랑에서 찍은 사진

Gallaxy S7 edge 로 찍은 사진

 

 

 

오늘(2016년 11월 20일)   돌아와서 서재에서 찍은 사진

 

Posted by Satsol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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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후학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6.11.21 12:56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2. 메이데이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6.11.21 15:32

    만수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런데 선생님 피부가 연세와 많이 모순됩니다. 수많은 shy 방문객들을 감히 대표하여 비결을 여쭙습니다.

    • Satsol 샛솔  댓글주소 수정/삭제 2016.11.21 19:56 신고

      감사합니다. 실물은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Galaxy S7으로 찍은 건데 그 카메라가 뭔가 포샵질하는 것 같습니다. 다른 카메라로는 그렇게 안 나옵니다.

    • 메이데이  댓글주소 수정/삭제 2016.11.21 21:00

      앗, 시중에 이상한 주사 이야기가 많이 나돌아서 뒤숭숭하길래, 선생님께서는 야채나 과일을 많이 드신다거나 하는 고전적 비결을 말씀해 주실 줄 알았습니다만. 늘 건강하시기를 다시 한번 바라마지 않겠습니다.

  3. 경천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6.11.21 16:14

    생신 축하드립니다.
    저도 관악산은 익숙한 산이니 선생님이 83세에 관악산을 오르신다면 제가 모시겠습니다..

    • Satsol 샛솔  댓글주소 수정/삭제 2016.11.21 19:58 신고

      감사합니다. 여든 세살에 관악산에 오르려면 매봉산 말고도 대모산 , 구룡산도 다녀봐야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힘을 길러야 할 것 같습니다.

  4. 황성주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6.11.22 10:42

    생신 축하드립니다.
    어린 시절 어머님과 찍은 사진을 보니 가슴이 찌릿합니다. ㅎ

  5. ejmoto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6.11.25 00:52

    만수무강하십시요. 피부가 너~무 좋으시네요. 정말 부럽습니다.....

  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6.11.28 16:48

    비밀댓글입니다

  7. ezss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6.12.06 04:35

    브롬톤을 타는 입장에서 선생님의 사이트를 보고 ...와.. 대단하다 멋지다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 나도 선생님 나이때에 비슷한 경험을 해볼수 있을까 라는 생각도 해봤구요... 아무튼!

    건강하시고 앞으로도 좋은곳 많이 많이 다니세요!! 생신축하드립니다.

  8. gillez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6.12.10 15:59

    늦었지만 생일 축하 축하 드립니다.

  9. 자유인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7.01.06 21:48

    저희 아버지와 같으십니다. 멋지십니다.

  10. freedom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7.04.11 16:21

    안녕하세요^^
    도쿄에 대한 정보를 찾다가, 선생님의 소중한 기억공간에 놀러오게됐습니다!

    1993년생 한 사람으로서, 저 보다 연세가 훨씬 많으셔도
    기록습관 및 부지런하신 모습에 반성하고 갑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되시고, 늘 건강하게 오래오래 글 남겨주세요:D

3일 남기고 내 다이어트 목표치 달성

 

 

올해 초 대만 여행을 떠나기 전에 내 몸무게가 66 Kg 을 넘어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겠다는 결심을 했었다.  

 

그 때 마침 건강 지킴이 MotionX SleepTracker ( 2016/01/09 - [IT 와 새로운 것들] - 아이폰용 건강 지킴이 앱 - MotionX24/7 ) 을 발견하고 내 체중을 수첩이 아니라 아이폰에 기록할 수 있게 되어 기뻤다는 이야기를 썼다.      또 때 마춰 사서 읽은 다이어트책 "늘 배고팠지?" ( 2016/02/19 - [책] - 혁명적 새 다이어트 법 "늘 배고팠지?" - Always Hungry by David Ludwig )의 혁명적 다이어트 법의 실천법도 알게 되어 년초의 결심을 실행에 옮기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오늘(2016-06-27)은 내 개인적 역사의 뜻 깊은 날이 되었다.   마침내 30 여년만에 체중 60 Kg으로 내려 가는데 성공한 것이다.  

 

 

 

오늘 아침 내 몸무게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군사관학교에 응시할 때 신체검사에서 떨어질까 걱정을 했었다.   내 체중이 최저체중에 미달할 까 걱정했던 생각이 난다.   정확이 최저 체중이 얼마였는지 모르는데 50Kg 초반이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내 키도 해군사관학교의 최저 신장 조건을 간신히 통과해서 서열은 가장 빨랐지만 키는 동기중에서 가장 작았다.

 

1960 년 미국유학을 떠날 때 여권 사진같은 것이 남아 있다.   50 kg 초반의 몸무게일 때다.  

 

 

 

1960년 50 kg 초반일 때 사진

여권 사진이 아니었나 싶다.

턱이 뾰준하여 도라지 캐러 가겠다고

어머니가 농담을 하실 때였다.

 

 

 

미국에 가자 마자 결혼을 했고 아내가 손이 커서 항상 음식을 많이 만들었다.  음식이 귀한 나라에서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음식을 남겨서 버린다는 것은 상상을 못했다.   그건 "죄" 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자 은근히 몸무기가 불어나 70 Kg 에 육박했던 갓 같다.  

 

귀국후에도 70 Kg 안팍을 유지했었던 같고 70 Kg 을 웃돌면 특단의 조치를 취하곤 했다.  

 

80년대에 단학선원에 다닐 때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영동 옥천에 있는 천화원에서 단식 수련을 한 일이 있다.  그 때 1주간의 수련을 했는데 몸무게가 50 Kg 후반까지 내려 간 일이 있다.

 

그 후에도 여름이면 혼자서 "포도단식"을  했다.    10일 간 포도만 먹고 살았다.   그 것은 궤양성위염이 재발 하곤 했기 때문이었는데 포도단식후엔 효과가 있었다.     서너해 한 후엔 "관장" 하는게 고통스러워 그만 두었다.  

 

그리고 한 참 후에 궤양성 위염은 "헬리코 박테리아"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항생제로 치료를 한 후엔 재발은 없었다.  

 

포도단식후엔 항상 50 Kg 후반의 체중으로 줄었다.  그러니까 1980년 때 여름에는 항상 체중이 50 Kg 후반으로 돌아 오곤 했다.  

 

포도 단식을 마지막으로 한 여름 이후에는 50 Kg 후반으로 돌아 온 일은 없었다.   그리고 30년 만에 60 Kg으로 돌아 온 것이다.  

 

이번 체중 감량은 "포도단식"과 같이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지 않고 배 고프지 않은 채 감량에 성공한 것이다.

 

내 개인의 역사적 날이다. 

 

 

 

 

 

MotionX 에 오늘 측정치를 기입했다.

목표일이 3일 남았고 이젠 0.0 Kg 만 줄이면 된다고 나온다.

 

 

 

올해 1월 5일 부터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 날 몸무게는 66.0 kg 이었으니 6 개월에 6 Kg  뺀 셈이다.

평균 한달에 1 Kg 씩뺀 것이다. 

나이가 들어 감량을 할 때에는 서서히 해야 한다.

 

 

****

 

***** 다이어트 식사 *****

 

 

아침은 과일과 고구마

대만에서 이것을 시작했다. 

 

점심은 주로 곡물밥과 낫또에 달걀 하나로 비벼 먹었다.   반찬으로 김, 울외장아찌, 봄에는 동치미 여름에는 오이지등을 곁들여 먹었다.   간간히 기호식품으로 곤냐쿠 스파게리, 곤냐쿠 우동, 곤냐쿠 냉면, 곤냐쿠 콩국수 따위를 해 먹었다.  

 

시중에서 곤냐쿠로 이렇게 만든 식품들을 살 수 있다.    이 번 기회에 우리는  엄청히 많은 다이어트 식품들이 시중에서 유통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저녁은 주로 새러드와 생선구이 아니면 훈제 연어, 통조림어류(안초비, 연어 따위)를 얹어 먹었다.   또 묵밥을 만들어 먹었다.    참으로 다양한 다이어트 요리를 만들 수 있다.  코니가 음식 만드는 것을 좋아 하기 때문에 많은 것을 인터넷을 검색해서 실험했다.

 

한천도 곤냐쿠대신 써 봤지만 우리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그리고 운동은 대여섯번을 빼고는 매일 최소한 10000 보를 채웠다.  밖에나갈 수 없을 때에는 거실에서 왔다갔다 했다.



MotionX steps 수 목표로 10000보를 걸어놓고 30분 경고를 걸어놓으면 30분 움직이지 않으면 경고음이 울린다.  이것도 도움이 많이 됐다.

 

 

 

 

대만에서 시작한 과일 고구마 아침 식사

 

 

 

점심은 대부분 곡물밥과 낫토 달걀 하나였다.

여기에 김 따위 반찬 몇가지 얹어 먹었다.

 

 

 

곤냐쿠 우동

이 사진은 실곤냐쿠 우동이지만

면발이 굵은 우동용 곤냐쿠도 판다.

 

 

 

실 곤냐쿠 스파게리

실곤냐쿠 굵기 말고도 여러 굵기의 곤냐쿠들이 시판되고 있다.

 

 

 

저녁으로 주로 먹은 생선 샐러드

 

 

사진은 다 찍지 못했지만 코니가 요리에 열정이 있어 각각지 다이어트 요리를 맛 보게 해 줬다..    코니는 코니 대로 다이어트 요리 개발에 재미가 들렸고 난 좋아 하는 우동 냉면 판콘냐쿠 모밀등 기호식품을 밀가루 대신 먹을 수 있어 좋았다.

 

이 번 다이어트 기간에 내가 좋아하는 맥주를 못 먹고 대신 red wine 을 한잔씩 했는데 다이어트가 끝나면 다시 맥주로 돌아 갈지 모른다.  

 

또 견과류는 식탁에 꺼내 놓고 출출하면 집어 먹었다.   견과류는 절대 살찌는 음식이 아니다.  포만감만 준다.


단 한가지만 주의하면 된다.  정제된 탄수화물, 밀가루, 흰 쌀밥, 감자(전분 덩어리로 진짜 유일한 자연식 중에서 피할 것)만 피하면 된다.

 

이 번 여름 여행에 배송할가 생각해서 햇반을 검색해 보니 동원에서 100% 통곡물밥 100% 현미밥이 나왔다.  떠나기 전에 가 있을 호텔에 배송의뢰할까 생각중이다.

 

 


여행에 가져갈까 먹어 보기 위해서 몇가지를 사 봤다.

통곡물밥은 집에서 지어 먹는 밥과 비슷했다.

정제된 흰 탄수화물이 다이어트의 적이라는 것이 알려 지면서 다이어트 식품도 참으로 다양해졌다.

 

 

***** BMI *****

 

 

BMI (body mass index 비체중)은  몸무게 몸부피로 나눈 값이다.   몸집이 얼마인데 몸무게가 얼마 나가는가를 비교하게 위해서 만든 수치다.

 

사람의 키와 몸무게만 가지고 계산한다.

 

사람의 부피로 키의 제곱을 쓴다.  3제곱이 아니고 2제곱을 쓰는 이유는 키가 10% 크다고 배와 등사이가 10% 늘어 나지 않고 폭(겨드랑과 겨드랑사이 거리)이 10%  늘어 나지 않는다.  대강 제곱이 3제곱보다 부피의 근사치를 준다는 점에서 이런 공식이 나왔다.

 

 

비체중 또는 체질량지수(BMI)  =  몸무게 (Kg) / (키(미터) * 키(미터))

 

온라인으로 체질량지수를 계산할 수 있는 곳은

 

http://www.dietiyes.com/bmi-calculator (한글)

http://www.nhlbi.nih.gov/health/educational/lose_wt/BMI/bmi-m.htm (영어)

 

 

 

이번 감량으로 내 체질량 지수는 22.3으로 내려 갔다.

 

 

 

다이어트를 시작할 때인  몸무게 66Kg 일 때의 체질량지수

정상 범위엔 들긴 해도 과체중으로 넘어가기 직전이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번 감량에도 불구하고 내 체질량지수 22.3은 정상 범위에서 윗쪽에 위치하고 있다.   

 

내 체질량지수를 정상범위의 한 가운데 놓기 위해서는 몸무게를 얼마를 유지해야 하나?

 

58 Kg 이다.

 

제 2차 목표는 1 Kg 더 줄이고 제 3차 목표이고 최종 목표는 58 Kg 까지 내릴 생각이다.  

 

 

 

내 몸무게가 정상 범위의 한 가운데 있으려면 58 Kg 을 유지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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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tsol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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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천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6.06.29 09:18

    저도 요즘 다이어트에 관심이 많은데 선생님의 성공기(?)가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Satsol 샛솔  댓글주소 수정/삭제 2016.06.29 11:32 신고

      미국보단 덜 하지만 우리나라도 비만이 큰 문제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의 fast food 식당과 그 식단들이 청소년들에게 어필하여 청소년 비만이 앞으로 큰 걱정입니다.

  2. 마인드라이프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6.07.09 23:15 신고

    마인드라이프에서 EMDR다이어트 프로그램을 발표했어요.포털에서 검색하면 나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