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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번째 생일

일상, 단상/나 2021. 11. 21. 10:29

어제는 내 86번째 생일이었다. 

 

세상 일이란 알 수 없어라. 2020년 정월에 제주도에 도착하여 피한 한 달 살이를 시작할 때 만 해도 그 겨울이 그렇게 길 줄 몰랐다.  

 

2020년 제주도 여행을 시작할 때만 해도 코로나 소식은 없었고 떠날 때쯤  서귀포 남서쪽의 대평리에 있는 피자집 Pizzeria 3657에 가는 버스에 전염병 안전 수칙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는 전염병 사태가 일어난 것을 알 수 있었다. 

 

 

대평리에 있는 피자집 Pizzeria 3657. 멀리서 보면 무슨 서양 캐슬 같은 모양을 띄고 있다.

 

 

대평리 가는 버스에 붙어 있던 신종코로나 예방수칙. 아직 WHO가 Covid-19 이란 공식명칭을 내어 놓기 전이었다.

 

서귀포 시내에 나갈 때 자주 이용하던 버스 520번. 2년도 아직 지나지 않았는데 왜 먼 옛날 같이 느껴질까?

 

 

2020년 2월 6일 귀경했고 코로나19의 긴 겨울이 시작되었다.

 

2020년 여름과 2021년 여름의 암스테르담 여름 나기 피서여행은 생략되었고 이젠 그것도 2019년 여름 여행으로 끝맺어야 할 것 같다.   내년 여름이라고 우리 같은 코로나 취약계층이 해외여행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2019 마지막 여행때 우리가 늘 묵던 403호방 창문으로 내어다 본 풀밭. 이 공터도 이젠 사라졌다. 건축계획 패말에 그려진 건물들이 들어 선 것이다.

 

옛날에 Jane Fonda가 쓴 프라임타임이란 책을 소개할 때 인생을 3 등분하여 아래와 같이 구분했다.

 

************************

최근에 사서 읽었던 Jane Fonda의 "Prime Time"이란 책에 보면 그녀는 평균수명이 90살에 육박하는 우리네 인생극장을 3등분 하여 0-30년 1 막으로 잡고 이 시기는 배우고 준비하는 과정,  30-60 살까지는 사회에 기여하고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키우는 2 막으로 잡았고 60-90살까지를 3막으로 세상의 모든 짐을 내려놓고 인생을 즐기는  Prime Time으로 구분했다.

출처: https://boris-satsol.tistory.com/813 [지구별에서 - Things Old and New]

****************************

 

Jane Fonda 가 쓴 "Prime Time".

 

우리의 프라임 타임도 몇 년 남지 않았는데 2년을 허비하고 또 얼마를 더 허비해야 할지 모른다.   

 

우울한 86번째 생일이었다.

 

손녀 손자가 만들어 준 내 생일 축하 카드

 

생일 케이크로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먹었다.

 

그래도 손녀 손자가 가까이 사니 그게 큰 위안이다. 

Posted by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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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천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21.11.22 14:18

    허비한 시간만큼 프라임 타임도 연장되시도록 늘 건강하십시요. 생신 축하드립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86번째 생일을 맞는다.  

 

보건복지부는 OECD가 발간한 ‘보건 통계 2021’을 주요 지표별로 나눠 우리나라와 각 국가의 수준·현황을 분석해 20일 발표했다. 해당 통계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의 기대 수명은 2019년 기준 83.3년으로 OECD 평균인 81.0년보다 2.3년 길었다. 성별로 보면 남자는 80.3년, 여자는 86.3년으로, OECD 평균보다 각각 2년, 2.7년 길었다.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83.3년으로 OECD 국가 평균보다 2년 이상 길다.

 

그러니 난 평균을 넘게 살고 있는 셈이다.     갈 날이 가까워지니 옛 날 생각이 많이 난다.   

 

내 삶을 돌이켜 보면 나만큼 행복한 일생을 산 사람도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난 너무 어려운 삶을 살았기 때문에 다시는 한국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었다.    

 

그러나 그 결심은 10년 못 갔고 난 귀국했고 그리고 운도 좋게 모교에서 대한민국의 영재들을 가르칠 수 있는 행운을 맞았다.   또 그렇게 하고 싶었던 물리학을 평생동안 할 수 있었고 그 즐거움을 내 생업으로 삼을 수 있었으니 이 보다 행복한 삶이 있을까!    

 

내가 정년 퇴임을 하면서 퇴임사로 중학교 "Living English II",  2학년 영어 교과서의 lesson 1의 제목 "The happiest boy in the world"라는 말을 했던 생각 이 난다.  

 

내가 물리학을 그렇게 하고 싶어 했던 계기는 수학에서 시작했다.   난 초등학교때 부터 수학을 잘했다.  초등학교 6학년 수학책에도 벡타 비슷한 개념도 나왔던 것 같다.   즉 분력이라는 것을 가르쳤던 것 같은데 내 담임선생은 그런 것을 가르칠 수 없었다.   그래서 의례 내가 나가서 문제를 풀고 설명하면서 선생을 대신했다.

 

그것은 625 전쟁중 피난 살이 하던 영등포 훈육소에서도 그랬다.    그땐 반파된 교사에서 가마니를 깔고 앉아 수업을 했는데 선생이란 사람도 정식 교사가 아닌 피난민 중에서 조금 뭔가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면 그냥 교사 노릇을 했다.   그때에도 무슨 "논증 기하"같은 과목인데 선생이 실력이 조금 달려 가르칠 줄 몰랐다.  그래서 내가 나가서 문제를 풀교 설명을 하곤 했다.

 

그런데 그 중에서는 또 괜찮은 선생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물리학과 몇 년 선배가 되는 분이었다.   군복을 입고 와서 수학을 가르쳤는데 그땐 대학생이면 영어 좀 하니까 대부분 통역장교로 미군 부대에서 우리말 통역을 했다.  

 

내가 수학을 하는 것을 보고 내게 물었다.  어디까지 수학을 했냐고.   그러니까 내가 중학교 수학이 아니라 대학 수준의 수학 실력이 있는 것을 알아 보신 것이다.

 

그 때 까지만 해도 그냥 수학이 좋아서 "Love"가 지은 대학 1년용 미적분(한글 번역서),  "Granville"이 지은 미적분학 책(한글 번역서)을 피난살이 단칸방에서 사과 궤짝을 책상 삼아 공부할 때였다.    그리고 전에 포스팅했던 일본 고등학교 교과서인 엡실론 델타 법을 쓰는 일어 책 미적분학 책을 낑낑 대면서 공부했었다.

 

그런데 그 때 헌 책방에서 이 고급 미적분학책을 발견했다. 아마존에 나오기는 하나 절품이라고 나온다.   100 년전에 나온 책이 아직도 팔고 있을리 없을 것이고 고서로라도 나올 확률은 희박할 것이다. 

 

 

그렇게 수학이 좋아서 수학을 독학을 하고 있었지만 수학을 전공한다는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그저 좋아서 했을 뿐이다.   

 

그러다 우연히 일본 동북대 교수가 쓴 "물리학 통론"이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고 이제까지의 그 아름다운 수학이 물리학을 기술하는데 쓰인다는 사실에 감탄을 했다. 그래서 물리학을 전공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출처: https://boris-satsol.tistory.com/99 [지구별에서 - Things Old and New]

 

그러니까 내가 물리학을 전공하리라고 결심을 하게 되 계기는 바로 혼타 코타로 교수가 쓴 "부츠리가쿠 츠론(물리학통론)이란 책이였다.   너무 너무 감명이 깊었던 책이었다.   내 인생을 형성하는데 일등 공신인 책이다.     내가 "The happiest boy in the world"로 살게 해 준 운명의 책이다.

 

ebook으로 만들어 읽고 있는 일본 책 "아직도 국민을 행복하게 못 해 주는 일본이라는 시스템"을 읽다가 그 책 생각이 났다.    혹시 헌 책이라도 있나 하고  Amazon jp에 들어가 봤다.

 

그 책이 있었다.   주문을 했다.   내 인생을 만들어 준 "책"인데 다시 한 번 보자.

 

내 인생을 형성해 준 운명의 책 "물리학 통론"이 "일본우편"으로 발송되었다고 "track package"를 클릭하니 나온다.  말썽 없이 도착하려나?

 

책 그림은 나오지 않지만 오늘 발송했다고 나온다.   반송되지 않도록 열심히 야후 메일에 들어가  통관 번호 요청이 오는지 모니터링해야 할 것 같다. 

 

Posted by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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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익명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21.08.21 15:08

    비밀댓글입니다

블랙핑크의 Forever Young 이란 노래를 처음 들었다.   Blackpink가 부르는 것이 아니라 지난 월요일 방송한 JTBC 슈퍼밴드 경연 중에서 녹두라는 팀이 편곡해서 부른 것을 들은 것이다.

 

아내는 BTS 를 오래전부터 좋아했지만 난 요즘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면서 알게 되었고 노래도 듣게 되었다.   BTS의 노래도 처음 들은 것은 슈퍼밴드 시즌 1에서 아일이 부른 "봄날"에서 처음 알았다.  그리고 BTS의 노래들을 듣게 되었다.

 

Blackpink의 "Forever Young"도 젊음의 열정이 폭발할 것 같은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염원하는 내용이다.  

 

아내를 처음 만나 열애의 빠져 시애틀의 밤거리를 새하얀 아침이 올 때까지 걸었던 그때의 열정을 결혼 60주년이 되는 올해 추억하며 감히  또다시 할 수 없는 그 시절을 회상한다. 

 

***************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에 미국인 노부부 집에서 아내를 만났다.
우리는 열애에 빠졌다.
어느 주말에는 새벽 두시에 닫는 피자집을 나와 그냥 헤어지기 섭섭하여 새하얀 아침이 올 때까지 이슬 젖은 길을 걷기도 했다. 
아아 그 무슨 열정이었던가!
........

미국 목사님을 주례로 모시고 한 미국인 집 뜰에서 친구와 친지 몇을 초청하여 한국식으로 보자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결혼식을 올렸다.  싸구려 결혼반지와 목사님 사례비 10불이 결혼비용의 전부였다.
미국 친지들이 웨딩샤워와 선물로 준 중고 가재도구를 가지고 풀다운 침대가 있는 원룸에서 신혼여행도 없이 신혼을 차렸다.  아내는 나를 사랑하는 일념으로 이 모든 것을 감수하였다.
우리는 참으로 행복하였다. 
갈 데가 없어 밤새워 길거리를 헤맬 필요도 없었다. 
가난하지만 항상 함께 있 을 수 있었다.

출처: https://boris-satsol.tistory.com/84 [지구별에서 - Things Old and New]

***************************

 

 

*******************  정년 퇴임을 하고 40 년 만에 다시 가 본 Ravenna Park **************************

우리는 연애 시절  헤어지기 아쉬어 밤새워 길을 걸었고  새하얀 아침이 오자  그도 모자라 Revenna 공원엘 갔었다.   그 추억을 더듬어  Revenna  Park에 가 보기도 했다.   그 젊은 날의 정열을 추억하며....

 

 

헤어지기 섭섭하여 떨어 질 줄 모르던 두 남녀는 갈 데가 없어 새하얀 아침이 올때 까지 함께 걸었다.  아! 무슨 정열이 었던가 그리고도 모자라 우리는 이  공원엘 갔다.

 

 

 

 

공원 안은 한 낮에도 원시림의 아람들이 나무들로 서늘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출처: https://boris-satsol.tistory.com/377 [지구별에서 - Things Old and New]

********************************

 

블랙핑크의 "Forever Young"을 듣고 떠 올린 추억이다. 

 

세월의 무상함이여!

 

 

 

 

 

 

 

 

 

 

 

 

 

 

Posted by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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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번 째 생일

일상, 단상/나 2020. 11. 22. 12:40

지난 금요일이 내 85번째 생일이었다.

 

생일마다 Selfie를 올리는 것을 내 블로그의 일상으로 해 왔기 때문에 올 해도 방금 사진 하나를 찍어 올리기로 했다.    언젠가는 사라질 것들이지만 그냥 이제까지의 일상이라 따라 할 뿐이다.   

 

왼쪽 부터 서울대학교,  12살 손녀, 6살 손자의 자작 생일 카드

 

방금 찍은 셀피

 

손자 손녀의 카드를 그 냥 버리기 아까워 사진으로나마 남겨 놓으려고 찍었다.

 

서울대학교에서 온 것은 내가 매달 후원금을 내기 때문에 보내 준 것이다. 

 

공교롭게도 카드를 보내 준 현 총장은 내가 1970년 서울대에 부임할 때 물리학과에 입학한 제자다.  발령을 받기 전이지만 면접시험에 들어가 선배교수와 함께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이 학생을 처음 만났다.    이 학생은 예비고사 전국수석이고 본고사에서 전교 수석을 했던 학생이라고 면접장에서 선배교수가 귀뜀을 해 주어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부임하고는 이 학생이 속한 반을 내가 가장 많이 가르쳤다.    

 

나는 내가 가장 행복하게 세상을 살 수 있게 해 준 곳이 서울대학이라 그 감사의 뜻으로 작은 보답을 하고 있다.

 

 

 

 

Posted by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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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메이데이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20.11.22 18:03

    '관리의 선생님', 건강하신 선생님 뵈어서 참 좋습니다.

  2. 경천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20.11.22 18:21

    생신 축하드립니다. 늘 건강하십시요..

  3. june8th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20.11.24 05:00

    생신 축하드립니다. 한참전부터 선생님 글을 잘 읽고 있었습니다. 기회를 빌어 인사드립니다. :-)

  4. 엘리엇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20.12.09 18:18

    생신 축하드립니다. ^^*

어제(토요일)는 작은 아들 가족과 점심을 같이 하고 돌아오는 길에 매봉산을 산책했다.    손자 놈이 어린데 매봉산에 오를 수 있으려나 했는데 의외로 자력으로 정상에 올랐다.   

 

정상 부근에서는 제 누이가 먼저 오르자 따라 오른다고 다름 박질로 뛰어 올라갔다.   나는 숨이 차서 천천히 오르는데 순식간에 정상에서 손 짓하고 있었다. 

 

************************** 5년전에 썼던 글 *****************************

2015년 10월 30일 오후 6시경 내 Y-염색체를 가진 아기가 태어났다.

Y-line 은 부계로 이어지는 완전한 유정정보다. 

 

 

어제 태어난 두째의 둘째

아직까지는 유일한 내 Y-염색체를 가지고 태어났다.

저 아이도 2100년이면 내 나이보다 많은 85세가 된다.

그땐 어떤 세상일까?



*************    출처: https://boris-satsol.tistory.com/1379 [지구별에서 - Things Old and New] ************* 

 

이 아이도 2100 이면 내 나이가 된다.    이 글이 그때까지 살아 있어 이 놈이 읽을 수 있으려나?

 

매봉산 정상에서 

 

산책로 옆에는 진달래가 한창이었다.

 

의젓이 걸어 내려 오는 손자

 

진달래 옆에서 선 손녀

 

세상은 온통 코로나19로 난리중인데 산에는 어느새 봄을 뽑내고 있네

 

만개한 진달래 

Posted by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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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천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20.03.23 09:06

    손녀 손자와 산에 다녀오셨군요. 잘하셨습니다. 집에만 계시면 답답하실테니 사람들 적은 야외에 마스크쓰고 가시면 괜찮겠지요. 저도 요즘 종종 산에 가는데 아직 만개한 진달래를 못봤습니다.

84번째 생일

 

며칠 전(20일) 내 84번째 생일을 맞았다. 

 

생일이면 항상 블로그에 생일 일기를 쓰는데 요즘은 새 컴도 사서 적응하느라고 바쁘게 지내다 보니 오늘에서야 일기를 쓴다.     또 새 장난감(Samsung Gear360)을 사서 테스트 중이라 그것에도 시간을 많이 빼앗기고 있다. 

 

내 나이가 되면 가장 큰 관심사는 내 신체와 두뇌의 벤치마킹이다.

 

 

********81번째 생일에 쓴 글 ***************

내(채제공) 일찍이 들으니 미수(眉수) 허목(許穆) 선생은 여든세 살 때 관악산 연주대에 올랐는데 걸음이 나는 것 같아 사람들이 신선처럼 우러러보았다고 했다.

 

그래서 자기(채제공)도 83세에 관악산에 오르겠다고 별렀다는 것이다.  나이 80살에 세상을 떴기 때문에 그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나는 83세까지 살아남는다면  관악산에 오르고 싶다.



출처: https://boris-satsol.tistory.com/1455 [지구별에서 - Things Old and New]

 

**************************************************

 

작년에 관악산에 올랐어야 했는데 기회기 없었다.  

 

또 하나는 2007년에 남가주 Ventura 리컴번트 클럽에서 만났던 나 보다 5 살 연장인 UCLA 교수였다.

 

****************2007 년에 만났던 잔차인  Pedinoff 교수 ***************

이야기를 하다 보니 건너편에 앉은 할아버지가 물리학자라더군요.  나이도 나보다 5살 더 많고 UCLA에서 나보다 훨씬 전에 박사학위를 받았더라고요.  여기 물리학 박사가 둘이나 있다고 좌중이 환호하더라고요.  인연이란 참으로 신기합니다.   이름을 물어보니 Melvin Pedinoff인데 학위 받고 20 년 넘게 Hughes Aircraft Co. 에서 방위산업 계약 연구를 했는데 방위산업 계약이 끊어지면서 명퇴당했답니다.  다행히 친구가 UCLA 전기공학과에 있었는데 전기공학과에서 가르치는 게 어떠냐고 해서 작년까지 전기공학과 교수로 강의했답니다.

 

그러서 사진 한 장 찍었지요.

 

 노랑 옷 입은 이가 Melvin Pedinoff 님. 보리스 옆에 있는 이가 비 오는 날 커비숍에서 만났던 Dave Miller님, 두 손을 든 이가 지난 토요일 같이 잔차 탔던 University of Washington 동창(Huskies)  그래서 세상은 좁다고 하나 봐요. (it's a small world!)  

출처: https://boris-satsol.tistory.com/212 [지구별에서 - Things Old and New]

 

***************************

 

그때 우리도 5년 후에 Pedinoff 교수처럼 자전거를 탈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5년 후가 아니라 12년 후인 오늘도 잔차를 탄다.

 

그래서 어제 관악산 대신 도곡공원(매봉산)에 올랐다.

 

 

어제 매봉산에 오른 것은 새로 산 장난감 삼성 Gear360 카메라를 테스트 해 보기 위해서였다.  왼 쪽 어깨위의 vr360 카메라가 달려 있다.  이 카메라로 vr(가상현실) 비디오를 만들 수 있다.  소프트웨어가 도착하지 않아서 제작을 못하고 있다.   

 

 

생일 오찬에서 손자와 함께  

 

 

손녀와 함께

 

 

V 마크를 안 했다고 따로 한 컷

 

 

손녀가 만들어 준 생일 카드

 

 

카드 앞면

 

 

제 누이 시늉 내서 그려 준 손자의 편지 위는 할머니에게 아래 쪽은 할아버지에게

 

 

Posted by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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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익명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11.23 12:57

    비밀댓글입니다

  2. 경천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11.23 16:52

    늦었지만 생신 축하드립니다. 늘 건강하십시요..

  3. 백정현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11.24 00:47

    손주 재롱과 새로 장만하신 장난감 즐거움에 맞으신 84번째 생신 축하드립니다 선배님

  4. 엘리엇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11.29 10:19

    생신 축하드립니다. ^^ 늘 건강하시고, 즐거운 자전거 생활 하시길 바랍니다. (손자분 생일카드가 귀여워요 ㅋㅋ)

하마터면 못 올 뻔했던 길을 걸어왔다. - 그 무서웠던 운명의 갈림길

 

625 전쟁은 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갈라놓은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나 역시 그중의 하나다.   

 

전에 박완서님의 "못 가 본 길이 아름답다."라는 책에 대해서 썼을 때 내 운명에 대해서 몇 줄 언급한 일이 있다.

 

*****************************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지난해 625의 60돌을 맞아 내 625 생존기를 내 블로그에 올린 일이 있다.  나도 625로 인해 가정이 와해되고 전쟁고아 같은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해사에 들어가 물리학을 하려고 했었다는 이야기를 썼었다.

 

내가 해사를 뛰쳐 나와 내 가고 싶던 길을 가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떤 길을 갔을까?    나도 역시 이 책의 저자처럼 못 가본 길에 대한 아쉬움을 간직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참으로 다행한 것은 난 가고 싶었던 길을 갔고  행복하고 후회 없이 살았다는 것이 저자와는 다른 점일 것이다.



출처: https://boris-satsol.tistory.com/640 [지구별에서 - Things Old and New]

*****************************  

 

사실 이렇게 가볍게 몇줄로 적을 만 큼 내 운명의 갈림길에서 쉽게 선택한 길은 아니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난 그때 내가 겪었던 처절했던 내 "투쟁"에 대해 기록해 두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내 625 생존기  에도 간략히 언급했지만 태평양 전쟁으로 지리멸멸되었던 우리 가족은 625 전쟁으로 완전히 와해되었다.    

**********************************

그런 와중에서도 난 장래 물리학자가 되려는 꿈을 키우며 청계천변 헌 책방에서 산 일본어 수학이나 물리 책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물리학과  이 아무개라고 써넣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고3이 되자 내 장래를 내가 결정해야 할 상황에서 일반대학에 들어가 대학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자신감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해군사관학교에 가자는 것이었다.  그땐 3군 사관학교가 모두 4년제 정규 사관학교로 정착되어 졸업 후 이학사 아니면 공학사 학위까지 주도록 되어 있었다.

 

혼자 떠돌이로 살던 때라 공짜로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재워주고 거기에다 공부까지 시켜 주는 사관학교는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해군 사관학교를 선택하게 된 계기는 미국 해군사관학교(Annapolice) 출신의 노벨 물리학자  마이켈슨에  고무되었기 때문이었다.



출처: https://boris-satsol.tistory.com/561 [지구별에서 - Things Old and New]

**********************************

 

미국의 해군 사관학교를 그대로 흉내 내어 만들었다지만 한국 해사는 전혀 다르게 운영되고 있었다.    

 

긴 고민 끝에 다시 내 새 운명을 개척할 것을 결심한다.    내가 해사를 뛰쳐나올 만한 용기가 있으면 사회에 나가 일반 대학에 진학하여 고학을 해서 물리학을 공부할 수 있을 것이란 자신이 생긴 것이다.   

 

이 "용기와 자신감"에만 의존해 어마 어마한 일을 벌인 것이다. 

 

사실 사관학교 교칙에는 자퇴를 할 수 있게 되어 있었지만 교칙은 교칙일 뿐 실제 자퇴를 받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과실점을 충분이 받아서 퇴교 처분을 받아 낼 생각을 한 것이다.   탈영은 퇴교에 해당하는 과실점을 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돌이켜 생각하면 미련한 짓이었다.

 

1954년 11월 어느날  아침 난 몰래 사관학교 뒷산으로 올라가 탈영을 했다. 음주 흡연도 거의 퇴교에 가까운 과실점을 매긴다.  난 저녁에 진해 시내에 들어가 막걸리를 사서 마시고 필 줄도 모르는 담배를 사서 몸에 지니고 교문을 통해 사관학교에 들어왔다.

 

그러나 내 계획은 교칙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교장이었던 이용운 준장의 교장실에 불려 가 회유를 받은 것이다.    내가 12기 수석으로 들어왔는데 내가 퇴교를 하면 동기생들이 동요가 있을 것 같다는 예상을 한 것이다.

 

그래서 교장은 내가 퇴교 의사를 철회한다면 탈영 기타 교칙 위반은 가벼운 과실점으로 처리하고 내가 졸업하면 유학을 보내 물리학을 공부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거의 두 달 고민을 하고 그 엄청난 모험을 감행한 것인데 이제 교장의 회유를 수용한다면 무슨 꼴인가.   더욱이 교장이 무슨 수로 내 졸업 후의 진로에 대해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그건 그냥 당장 내 퇴교를 막으려는 감언이설일 뿐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교장은 내가 자기의 회유를 거부하자 격분하고 휴전은 휴전일뿐 아직도 전시라는 것이다.  그리고 전시의 탈영을 최고 총살형까지 받을 수 있는 중죄라고 위협하고 사관생도는 준사관이니 고등 군법 회의에 회부하겠다고 해병대 영창에 수감시켜 버린 것이다.

 

1954 11월 중순에 나는 해병대 영창에 수감되어 고등 군법회의를 기다리는 몸이 된 것이다.

 

그때 난 겨우 19번 째 생일 지난 지 며칠 안된 아직도 청소년일 때였다.  난 이 모든 사단을 어머니나 누님 가족에 알리지 않았고 나 홀로 맞섰다.   내 인생의 최대 위기를 내 홀로 맞아 싸웠다.  

 

사람이 불안해지는 것은 미래가 가장 불확실할 때다.   영창에 갇힌 후 한 두 번 해군 법무관이 나를 방문했던 것 같다.  그 중 하나는 서울 법대를 나와 해사 교관으로 사회과학 관련 교양과목을 가르쳤던 분 같다.   

 

내 변호인 격으로 방문한 법무관은 이 모든 과정은 교장의 독단으로 적법하지 않은 절차인데 사관학교 겨울 휴가를 보내고 나면 귀교하지 않는 생도가 생길 것을 우려해서 일종의 시범으로 군법회의를 연다는 것이다.   생도들의 휴가 전날 강당에서 전교생을 앉혀 놓고 열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날 군법회의가 열리면 어쩔 수 없이 휴가 가는 생도들에게 경고를 주기 위해서라도 중형을 내리게 될 것이란 예상이었다.

 

그것은 위로가 되지 않고 불안만 가중시켰다.

 

나는 기도 이외에 무슨 다른 할 일이 없었다.   그 때도 예비신자로 진해 성당에 다닐 때였다.   대림절에 부르는 성가를 입속으로 되뇌면 기도만 했다.

 

가톨릭 성가는 대부분 기도문이다.

 

구세주 빨리 오사 어둠을 없이 하사.. , 성조에게 허락하신 메시아를 보내소서 어지러운 세상에 방황하는 우리들의 간구함을 들으사… , 우리를 괴롭히니 이 어려움 이기게 도와 주옵소서…

  

 

어두움을 없이 하사..

 

내게서 이 불안을 없애주소서

 

 

사관학교에 응시하고 나서는 합격시켜 달라고 기도를 했고 이젠 내 인생의 가장 캄캄한 암혹을 없애달라고 기도를 하는 아이로닉 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군법회의를 기다리던 진해 해병대 영창에서의 20여 일간은 내 생애에서 가장 캄캄했던 불안, 절망의 암혹기였다.

 

사람이 종교적이 되는 때는 바로 이런 암혹기다.  이성적으로 생각을 하고 해도 벗어 날 길이 보이지 않는 그 절박함이 절대자에게 구원을 빌게 되는 것이다.

그때 내 변호인 격인 법무관이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어떻게든 전교생 앞에서 군법회의를 여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탈영 직전 한 두 달간 거의 묵언으로 보냈다.   내 고민이 깊기도 했지만 내가 퇴교의 계획이 혹시라도 새어 나가지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대신 일기만 열심히 썼다.  이 사실이 득이 되기도 했고 해가 되기도 했다.  

 

그는 내가 거의 두 달 묵언으로 지낸 사실을 지적해 내가 저지른 탈영은 정신상태가 온전하지 않아서 발생한 것일 수 있다고 주장해 정신 감정을 받게 하고 재판을 열 것을 주장했다.   배심관 대부분은 사관학교 교관(교수)들이었고 교장과 몇 골통 훈육관을 빼고는 이 군법회의는 적법한 절차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배심관들이 모두 동의하였기 때문에 난 전교생이 모인 강당에서의 재판을 모면할 수 있었다.    정신 감정을 받기 위해 난 영창에 재수감되는 대신 환자로서 위병 하나의 감시를 받으며 사관학교 의무실에서 입원환자 대우를 받으며 다음 군법회의를 기다렸다.  

 

정신감정 결과는 정상으로 판정이 나왔고 생도들이 다 떠난 빈 강당에서 2차 재판이 속개되었다.    이 재판의 판결은 근신 1개월이었고 이어 퇴교라는 행정처분이 내려졌기 때문에 판결 결과는 무의미한 것으로 끝난 것이다.   나는 그렇게 갈망했던 퇴교처분을 받고 서울행 기차를 탔다.

 

 

이 운명을 가른 한 장의 종이 쪽은 내 생애의 가장 처절했던 암흑기를 이겨 낸 훈장이다.  그래서 난 아직도 이 종이쪽을 간직하고 있다. 난 그 이듬해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하여 지금의 길을 걸어 왔다.

 

 

1954년 겨울 내가 용기를 내지 않고 머뭇거렸다면 나는 결국 딴 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쯤 그 길의 종착점 근방을 서성이며  "그때 난 물리학자가 꿈이었는데.."  하고 못내 아쉬워하며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라는 블로그 포스팅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Posted by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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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천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6.29 09:51

    어쩌면 해사에 계셨어도 결국 이 길로 오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 샛솔  댓글주소 수정/삭제 2019.06.29 12:14 신고

      동기중에도 사관학교 졸업하고 늦깎이로 물리학 교수가 된 사람이 두엇 있긴 있습니다. 임관후 한2년 일반근무를 하다고 사관학교 교수요원 코스로 서울대 물리학과에 학사편입하고 졸업후 유학도 가고 해서 사관학교 교수를 거쳐 퇴역후 일반 대학 교수로 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공부란 때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결국 만족스런 과정이라고 볼 수는 없지요.

  2. bruprin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7.01 01:29

    한 편의 영화와 같은 내용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

  3. 황성주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7.03 07:02

    젊은 시절 일반 사람과 달라도 뭔가 다르셨군요.

    박정희 전 대통령은 공과도 많고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지만,
    오래 전 그의 전기를 보니 젊은 시절 선생님과 비슷한 고민을 하고
    결단을 내려 자신의 길을 헤쳐나간 것 같더군요.

    문득 생각이 나네요. ㅎ

76년 전에 내가 쓴 엽서

 

오늘 나는 참으로 희귀한 문서 하나를 건졌다.      내가 76년 전 1943년 2월 18일에 쓴 엽서를 얻은 것이다. 

 

이런 문서가 있었다니 참으로 신기하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며칠전 셋째 누님의 두 째 딸인 생질녀가 우리를 찾아왔었다.   그때 제 어머니가 되는 셋째 누님 이야기를 하다가  그 누님의 옛 일기에 내 어렸을 때 이야기를 쓴 것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 생질녀는 이젠 70대의 할머니지만 끝까지 누님을 모시고 살았던 효녀다.     그래서 어머니(셋째 누님)의 유물을 가직하고 있었던 듯하다.  거기에도 내가 올렸던 사진도 있다고 했다.     그중의 하나가 내가 그 누님의 신혼초일 때 도쿄 누님 집을 갔다고 기념사진으로 찍었던 것이다.

 

    전에 그 이야기와 사진을 블로그에 쓴 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포스팅을 보여 주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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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에(1942년?) 셋째 누나는 도쿄에 사는 매형과 결혼했고

난 국민학교에 들어 간 다음 첫 여름방학에 바로 위의 누나와 함께 도쿄 누님 댁에 놀러 갔었다.

1943년(?) 여름 토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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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그 생질녀가 다른 볼 일이 있어 다시 찾아왔다.  그 때 내 이야기를 기억했던지   제 어머니(셋째 누님)의 유물 가운데에서 발견한 것이라며 내가 매형(생질녀의 아버지)에게 쓴 엽서라고 가지고 왔다.   "일어라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지만"  외삼촌인 아저씨가 쓴 것이니까 내가 보관하라고 주고 갔다.

 

매형의 일기장 비슷한 문서도 함께 가져왔다.

 

장난감 엽서는 아주 작은 사이즈다.

 

 

 

도쿄의 형님에게  오사카의 사다미츠 이사오(내 당시의 일본 이름)

 

 

엽서 뒷 면

 

"형님은 오겐키 데스까(건강하신가요?) 보꾸와 겐끼 데스 (저는 건강합니다) 처음 오셨을 때 스모토리(일본 직업 시름꾼)인 줄 알았어요.   저는 누님이 ***  가고 싶으니까 보러 가게 해 주세요.  동경에 가게 되면 후지산도 볼 수 있으니까 가고 싶네요.  이 엽서는 스모토리가 사 주신 엽서예요.   쇼와 18년 2월 18일 사요나라(안녕) "

 

일부 글자는 판독할 수 없어 ***으로 대치했다. 

 

1943년 2월 18일이면 초등학교 1학년 때다.   1942년 4월에 고꾸민각코(국민학교, 초등학교)에 들어갔으니까 아직 2학년에 오르기 전이다.      

 

  

 

 

미나토야 고꾸민각꼬 입학생

 

 

 

그 뒷면에는 선친이 쓴 촬영 일자와 내 생년 월일이 적혀 있다.

소화 17년은 1942년이다.

지금부터 정확히 70년 전이다.

당시는 조선사람에 대한 일본 사람들의 차별과 구박이 심해서

아버지는 내게 일본 이름을 따로 지어 주신 것 같다.

어떻게든지 "조센징 아이"라고 따돌림을 당하지 않게 해 주려는 아버지의 고심 어린 배려였다.

이 학교에도 또 그전에 다닌 유치원에도

일본말이 서툰 어머니를 대신하여 아버지가 시간을 내어 데리고 다니지 않으면 

동경으로 출가한 셋째 누님이 학부모 노릇을 해 주었다.

그래서 내 일본 이름이 <사다미츠 이사오>가 되었던 것이다.



출처: https://boris-satsol.tistory.com/870 [지구별에서 - Things Old and New]

 

이 셋째 누님 역시 어머니 같은 분이다.   

 

내가 어렸을 때 무척 귀여워해 주셨는데 초등학교 1학년 전후해서 도쿄의 매형에게 시집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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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5월 29일(일)

임시 시험이 어제로 끝났다.   점수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지만 홀가분한다. 

(남)동생의 말소리도 많이 자랐다. 작년에 <신군노우따>부를 때와는 영 다르다.  요지음 부르는 노래의 가사는 대체로 또렷하게 발음한다. <미요 토오까이노 소라아께떼>하고 노래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너무 귀여워 죽겠어서 레코드래도 취입해서 영구히 남겨 놓고 싶은 기분이 들 지경이다.  동생이 나중에 어른이 되어 4살쯤 되었을 때 자기의 목소리였다는 것을 알고 듣게 된다면 얼마나 좋아 할까 생각해 본다. 


출처: https://boris-satsol.tistory.com/630 [지구별에서 - Things Old and 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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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매형이 처음 오사카에 왔을 때 머리 모양이 일본 스모토리(프로 일본 씨름꾼) 같아서 스모토리란 애칭으로 그 매형을 불렀었다.   그 매형이 어린 처남인 나에겐 장난감 우편 국 세트를 사 주셨는데 거기엔 엽서,  우표 스탬프 등 우편국에서 취급하는 여러 용품들이 있었다.   그 걸 아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인 장난감 엽서에 이 편지를 썼던 것이다.

 

참으로 생각도 못한 내 76년 전 내 필적을 보게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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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ierrabird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6.28 00:00

    소중한 메모리가되는 것들을 구하셨네요
    총명한 어린 소년의 모습이 그때부터 보입니다

  2. 황성주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6.28 10:04

    예전에 읽었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가슴이 찡합니다.
    사람 사는 근본 모습은 세월이 아무리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기원 전에 지구 곳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애환도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겠지요.

    • 샛솔  댓글주소 수정/삭제 2019.06.28 11:57 신고

      공감합니다. 이런 옛 유물들을 보면 아련한 기억들이 서글프게 다고 옵니다. 애환을 함께 나눴던 사람들이 모두 고인이 되었기 때문일까요?

착하고 순진한 세상도 있었다.

 

착하고 순진한 세상도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남아 있으리라고 믿었던 때도 있었다.

 

최근에 읽은 프로그램 기술서적에 쓰여 있던 한 구절이다. 


내가 한 때 정열을 쏟아 부어 배우고 개발하고 가르쳤던 프로그램 언어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세상이 사악해졌기 때문이다.   세상이 그렇게 착하고 순진하게 남아 있으리라는 믿음에서 "보안"에 대한 깊은 생각 없이 개발되었던 언어들이기 때문이다.   


내 정년 퇴직이 가까워지던 20세기가 저믈어 갈 때였다.


인터넷에 GUI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점점 웹브라우저에 퍼져 나갈 때 나는 이것이 물리를 가르치는 큰 도구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기대를 했다.   나는 그 때 내 생각을 한국물리학회의  "물리학과 첨단기술" 지 1999년 11월호 에 발표하기도 했다.  





이 그림은 내가 전산물리를 개발해서 가르칠 때 제작한 프로그램들의 화면 캡쳐로 만들어

"물리학과 첨단기술"지의 1999년 11월호 표지에 사용하도록 제공한 것이다. 





안 표지에 위의 겉 표지가 내가 어떻게 제작한 것이란 설명을 싣고 있다.  

20년전 일이다.

이 논문은 아래의 사이트에서 다운 받을 수 있다.

http://webzine.kps.or.kr/contents/data/webzine/webzine/15307692381.pdf

 

 

처음 전산물리를 개발하고 가르칠 때에는 그 때 한 참 "뜨던" Java 를 프로그래밍 언어로 썼다.   그리고 애플랫(applet)를 만들어 웹페이지에서 구동할 수 있게 했다.

 

"주사위만 던저도 열물리를 이해할 수 있어요"는 이 애플랫들의 모음이었다.

 

정년 퇴직을 하고 이 물리 교육재료를 좀 더 보강 확장할 생각으로 프로그래밍을 하다가 우연하게 플래시(flash)를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플래시로 주사위를  그리려다  "물리로 배우는 플래시" 강좌 시리즈를 쓰게 된 것이다.    

 

그 이야기는 강좌 시리즈 첫 페이지에 아래와 같이 썼다.

 



내가 Flash programming을 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전에 Java 로 만든 대학 일학년 일반 물리 중 열물리의 보조교재

 주사위만 던져도 열 물리의 기본을 이해할 수 있어요. 

를 업데이트할 가 하던 중 주사위의 동영상을 그릴 필요가 생긴 데에 있습니다. 주사위를 그리기 위해 정6면체를 그리다 보니 주사위보다 Flash에 더 매료되 Java를 제쳐놓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엉뚱하게 프라톤 입체 몇 개를 더 그리게 되어 Flasher 가 되었습니다. 아래 동영상은 지난 겨울에 Flash MX  Actionscript 만으로 제작한 프라톤 입체들입니다.   그림을 마우스로 클릭하면 회전합니다.  View full size를 크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플라톤 입체들

 다음회에는 에는 플래시에 감춰진 수학이라는 주제의 이야기를 올리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2003/03/03 



http://phya.snu.ac.kr/~kclee/lects/lect01/lect01.htm

에서 발췌

 

강좌의 사이트는  여기에 있다.   http://phya.snu.ac.kr/%7Ekclee/lects/contents.php

 

이 강좌에 수록되지 않은 주사위 제작과정은 아래의 사이트에 있다.       

 

https://satsol.tistory.com/

 

 

그러니까 현직에 재직할 때에는 열물리 Java applet 을 프로그래밍하는 데 내 정열을 쏟았고 퇴직하고는 한 5,6년을 플래시 프로그래밍에 내 심혈을 기울였다.

 

그런데 이제 두 제작 툴(tool)들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내가 심혈을 기울여 썼던 플래시 강좌도 볼 수 없게 될 것이고 내 정열을 쏟아 부은 열물리 Java Applet도 구동할 수 없게 된다. 

 

Java를 인수한 Oracle은 몇년전 Java 언어에서 Applet 을 중단했고 웹 사용 지원도 올해(2019) 3월까지만 할 거란다.   

 

Oracle Announces End Of Java Applet Support

Thursday, 28 January 2016

It really is the end of an era. Oracle has announced that Applets are deprecated in JDK 9 and will be removed from the JDK and JRE in the future.


이 future 라는 때가 올해(2019) 3월이란다.

 

플래시의 운명도 이와 별 차이가 없다.  

 

Adobe will finally kill Flash in 2020

 

아들 모두가 퇴출되는 가장 큰 원인은 보안때문이다.   

 

플래시를 돌리려면 flash player 를 깔아야 하고 Java 를 돌리려면 JRE(Java Runtime Environment)를 깔아야 한다.   고객의 컴퓨터에 무엇을 깐다는 것은 구멍을 내는 것과 같다.    순진하고 착한 세상에서는 구멍이 있어도 사악한 짓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세상은 순진하고 착하게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이런 구멍을 내는 기술은 퇴출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들 기술들은 그 인연을 다 한 것이다.   내 정열과 심혈을 기울인 노고의 결실물도 함께 수명을 다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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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기원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2.15 00:22

    여러모로 참 아쉬우시겠습니다. 참, 저는 97년 가을에 교수님의 전산물리가 처음 개설되었을 때 수강했는데, 그 해에는 Borland C++ Builder로 수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카시니 간극, 2-D ising model 등 정말 재미있게 프로그래밍하며 지냈지요. 학기 말에 몇몇 우수 예제들을 뽑으셔서 발표하게 해주셨는데, 제 것도 포함되어 정말 기뻤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해 강좌에서는 말씀하신 java로 바뀌어, 살짝 아쉬웠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교수님께서 느끼시는 감정에 비교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약간이나마 느껴지네요.

    힘내세요, 교수님의 그러한 열정과 자산이 지금의 전산물리가 되는 토대가 된 것은 영원히 남을테니까요!

    • 샛솔  댓글주소 수정/삭제 2019.02.15 11:29 신고

      기원님 위로와 응원글 고맙네요. "전산물리의 새로운 가능성"을 쓴지가 올해로 20년이 되었네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강산이 두 번 바뀌는 20년이나 버텼으니 수명이 긴 거지요. 요즘같이 지수함수적으로 발전하는 second half of chessboard 시대에 20년의 수명을 지탱했다는 데 위로를 삼아야지요.

  2. kim99er@yahoo.com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12.21 02:53

    이렇게 훌륭한 분의 불러그에 들어온것
    영광이라 생각합니다

  3. daewonyoon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20.12.07 16:22 신고

    소스코드라도 github 에 올려 오픈소스로 공개해 보시면, 누군가 새로운 당대의 gui 언어로 포팅해서 생명을 이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83번째 생일

일상, 단상/나 2018. 11. 20. 18:45

83번째 생일 전후

 

오늘로 83년을 살았다.  (1935년 11월 20일 태어남)

 

 

 

 

지난 일요일 18일엔

아이들이 점심을 사 줬다.

삼성동 트레이드 타워 최상층(52층)

Top Cloud Restaurant

 

 

 

음식보단 View 값이다.

트레이드 타워 52층에서 내려다 본 한강과 영동대교

 

 

 

전날인 17일엔 국립박물관 극장 용에서

세종대왕 뮤지컬 "1446"을 봤다.

1446은 한글을 반포한 해라고 한다.

 

 

 

손녀가 그려서 만들어 준 북마크 생일 카드

 

 

 

세종대왕의 Y 염색체를 물려 받은 손자

제 누이가 학교에서 배운 명상 수련을 실습하고 있는데 따라하고 있는 손자

요즘은 이 놈과 노는 재미가 쏠쏠하다.

 

 

 

오늘 진짜 내 생일 상

동부 이촌동 일식당 "아지겐"의 "게살 옴렛"

미세먼지가 "보통" 수준이라 자전거를 타고 갔다 왔다.

 

 

 

청주 도꾸리 150 ml

 

 

 

두부튀김

 

 

 

11월 15일엔 서울대 자연대 명예교수 간담회가 있어서 갔었다.

교수 회관의 천정의 등불을 배경으로 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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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천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8.11.21 09:04

    83번째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앞으로도 늘 건강하십시요..

  2. 눈팅이지만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8.11.21 09:51

    감사히 잘 보고 있습니다. 생신 축하드립니다.
    열정 있게 사시는 모습뵈면서, 선생님 연세 절반도 못살았지만, 많이 배우게 됩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82번째 생일 -2017-11-20 제주도 Vadada 카페

 

2017년 11월 20일은 내 82번째 생일이었다.   82번째 생일을 제주도에서 맞았다. 

 

여행을 자주 다니다 보면 생일을 꼭 집에서 맞게 될 수도 없다.   이 번 여행은 겨울 피한을 위한 숙박호텔 답사의 예행여행이었다.   마땅한 숙소를 찾는다는 목적이었다.  해리안 호텔은 맘에 맞는 호텔이었다. 

 

콘도형이면서도 매일 하우스키핑을 하는 일반 호텔과 같은 서비스를 해 주었고 위치도 좋았다.   대 만족이다.

 

82번째 생일날은 월요일인데 카페 "VADADA" 에서 점심을 먹기로 정했다.   이틀전 토요일에 갔을 땐 주말이라 자리가 없어 월요일에 오면 어떠냐고 종업원에 물어 보니 주중은 조금은 한가하다는 대답이었다.

 

카페는 일종의 칵테일 바와 같은 메뉴를 걸어 놓고 있었다.  우린 2식을 하니까 중식이 메인 식사다.    

 

Magarita 를 마시고 점심으로는 이 카페의 시그네쳐 메뉴인 새우 버거를 시켰다.   다 맛이 있었다.   섭섭하게도 식후주가 없었다. 

 

코니가 좋아하는 "Kiss of Fire" 나 내가 늘 마시는 Calvados 아니면 Cognac 이라도 있었으면 식후에 홀짝일 수 있었을 터인데  아쉬웠다.   옥상에 올라가 11월의 햇살을 벗 삼아 바다풍경을 바라 보는 것으로 식후주를 대신했다.  

 

 

 

 

11월 18일 토요일에 처음 갔었다.

이 카페에 대해서 들은 적은 있었지만 여기에 있는 줄 몰랐다.

주상절리에서 월드컵 보조경기장으로내려와

어느 시인인지 화가의 저택을 지나니 주차장이 나오고 차가 엄청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뭔가 하고 가 보니 유명하다는 카페였다.

특이한 것은 "No Kid Zone" 으로 어른 한 사람당 한 아이만 데리고 올 수 있고

아이는 어른을 떨어져 혼자 다니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카페는 잘 다듬어져 있었고 바깥 파다 풍경도 일품이었다.

바깥 테이블에는 히터를 키고 담요를 빌려 준다.

 

 

 

실내는 이 런 테이블 들이다.

모두 셀프 서빙인데

설프 서빙 치고는

값은 꽤 높다.

 

 

 

제대로 된 마가리타를 만들어 줬다.

 

 

 

이 카페의 대표 메뉴인 슈림프 버거

 

 

 

식후엔 제주도의 남쪽 햇살을 즐겼다.

뒤로는 한라산이 보인다.

 

 

 

올레길 마크

 

 

 

올레길 마크 리본은 제주도의 바람 때문에 가만히 있지 않는다.

사진을 찍으려면 날리고 서 있는가 싶으면 날리고 한참 걸려 조용한 마커 리본을 찍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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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메이데이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7.11.27 20:14

    '제주도'가 귀빈 두 분을 모신 데다 생신 행사까지 맡았으니 큰일을 했습니다. 식후주를 어느 고리에서 놓쳤는지 돌아보고 다음에는 꼭 챙기기를 '제주도'에 당부합니다. 선생님 생신을 맞이하여 두 분 선생님께서 만수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 경천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7.11.28 08:56

    늦었지만 82번째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늘 건강하십시요.

  3. 박강서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7.12.17 11:12

    자주 들르지는 못 합니다만, 제가 소중한 말씀들을 듣는 곳 입니다.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건강하시고 즐겁게 사시는 날들이심을 확신합니다. 감사합니다.

금연주의자의 고백

 

지난 토요일 늘 보는 "불후의 명곡" 프로그램에 "이난영"씨의 "다방의 푸른 꿈" 이란 노래가 나왔다.     그런데 그 노랫말의 첫 머리에 "담배연기"란 말이 나온다.  

 

내뿜는 담배연기 끝에
희미한 옛 추억이 풀린다
고요한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며
가만히 부른다 그리운 옛날을 ....

 

담배연기 끝에 희미한 추억...

 

멋 있는 가사다.   

 

 

 

담배의 명장면은 뭐니 뭐니 해도 "제3의 사나이(The third man)"의  라스트 신이다.    

 

 

Joseph Cotton 주연의 1949년 영국 영화 "The Third Man"  의 마지막 장면 

Greham Greenee 원작의 이 영화는 1999년 영국 영화협회(British Film Institute)가 영국 영화 역대 최고의 작품

(greatest British film of all time.)으로 선정했다.

https://youtu.be/_pV6zRGeeGM


 

 

 

옛날에는 담배는 이처럼 멋이 있었다.

 

담배 연기하면 나도 추억이 있다.    극렬한 금연주의자인 나도 한 때 담배를 피웠다.

 

2년에 한 번씩 공단 건강검진 문진표를 작성하다 보면 옛날에 내가 지은 죄를 고백하게 만든다.   담배를 언제 얼마동안 하루에 몇가치 피웠는가를 되새기게 한다.   아 2년전에도 물었는데 또 이걸 묻네....

 

이 문진표의 답을 미리 말하면 난 스물 한 두살때 부터 마흔이 되기 한, 두해 전까지 하루 반갑 (열가치) 정도의 양을 피웠다.

 

내가 담배를 배울 땐 담배의 해독에 대해서 알려진 것도 없었고 담배를 피우는 것은 멋을 부리는 것과 비슷하게 받아 들였다.

 

남자가 술 담배 못하면 뭣에 쓰노?  할 만큼 남자면 술 담배 정도는 해야 남자라 불릴 수 있다는 식이었다.

 

1956년 내가 대학 2,3 학년 무렵에 쓴 일기장엔 담배연기를 자연(紫煙 보라빛 연기)이란 낱말로  멋을 부려 표현했다.

 

 

 

1956년 3월 18일 (일요일) 에 쓴 내 일기장의 일부

Viceroy는 그 당시 한국에서 유행하던 양담배 이름이다.

 

 

내가 담배를 배우게 된 계기는 내가 대학생 때 가정교사를 하고 나서였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혜화동 일대에서는 쪽집게 A급 가정교사로 소문이 났었다.  (2007/08/04 - [일상, 단상] - 강남엄마 따라잡기 - 쪽집게 과외선생)

 

그 때 그 글에서도 내가 담배를 배우게 된 동기를 간략하게 쓴 일이 있다.     과외를 맡긴 엄마들이 과외비를 낼 때가 되면  날 찾아와선 과외비와 함께 당시로는 최고의 선물인 양담배를 한 두 보루(10갑)씩  대 주었다.  자연히 담배를 자꾸 피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1959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양담배를 대 놓고 피게 되었던 것이다.    Chesterfield 와 Philip Morris 를 좋아하는 줄 알고 그 종류를 잘 갖다 주었다.   일기장에 적힌 Viceroy 도 한 동안 그 logo 가 한국 공군 마크를 닮았다해서 "공군담배"라는 닉네임이 붙어서 뜨던 담배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갔는데 군대에서는 "화랑" 담배를 대 주었다. 화랑담배는 그냥 보통 종이 포장이라 배급을 받을 때면 담배는 바짝 마른 풀가루였다.   연기가 너무 매워서 담배를 꺼꾸러 물고 입김으로 적셔서 불을 붙이곤 했다.   훈련소에서 노는 시간에 할 일 이 없으니 담배 피우는 일이 휴식의 전부였다.  화랑 담배를 꺼꾸러 물고 입김을 불어 넣던 생각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제대하고 419 가 났고 그 해 8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 다음 해 아내와 결혼했지만 담배 피우는 습관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1960 년 초반에 담배의 유해성 공방이 처음 일었다.   미국의 담배 회사와 보건 담국이 담배의 유해성에 대해 공방을 벌였다.    담배갑에 담배 유해성 경고를 넣어야 하느니 마느니 논란이 일었던 것이다.

 

막강한 자금을 동원한 담배회사들은 로비와 광고,  사이비 연구비를 지원하는 등 반격이 만만찮았다.

 

내가 박사논문 자격시험에 합격하고 논문을 준비하고 있을 때 이론물리 전공 대학원 학생은 Annex 라고 불렀던 물리학과 뒷켠 목조 건물에 연구실을 배당 받았다.    그 연구실을 쓰던 대학원생 대부분은 담배를 피지 않았는데 내 office mate 인 Nori 만 담배를 피웠다.   그래서 자연히 우리는 담배 피는 Office mate 끼리 방하나를 나눠 쓰게 되었다.

 

우린 대부분 올빼미족이었다.   낮에는 시끄러워 공부가 제대로 되지 않으니까 저녁을 먹고 다시 연구실에 와서 밤샘 공부들을 했다.   자정을 넘기는 것은 보통이고 두시 세시에 집에 돌아 갔다.   자연 다음날은 늦잠을 자고 10시 아니면 11시에 학교에 왔다.  

 

그러다 보니 자정 쯤 되면 출출해져서 캠퍼스에서 1 마일은 떨어 진 45가의 "Rainbow" 라는 Tavern (피맥)에 가선 피자를 사 먹곤 했다.     다시 연구실에 돌아 가지 않을 땐 생맥주도 한 두잔 했다.

 

그 때 옆방의 Ed Fizet 라는 친구는 의자 팔거리에 걸친 내 오른 손 손가락사이에 끼운 담배와  왼 손으로 잡은 맥주 Pitcher의 포즈를 쳐다 보고는  멋 있는 "Classic pose" 라고 칭찬해 주곤 했다.

 

난 그저 무심히 자연스럽게 취한 포즈인데 그 친구의 "classic pose" 라는 칭찬이 아직도 귓가에 맴 돈다.

 

담배는 내겐 그런 멋이었다.

 

1964 년경 경북대학교 전자공학과 교수이던 물리학과 선배 한 분이 UW 에 연수를 오셨다.    물리학과 선배이기 때문에 같이 많이 다녔는데 사진에 일가견이 있는 분이었다.  

 

내 담배 피는 모양을 사진 찍어 준 것이 있다.   아마도 멋 있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앨범에 붙어 있었던 같아 찾아 보니 있었다.

 

캐나다 Vancouver의 UBC 에서 포닥(박사후 과정)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에도 금연을 못하고 담배를 피울 때였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양담배를 금지하였고 공무원이 양담배를 피우다 들키면 엄중한 처벌을 내렸다.    그 땐 전매청에서 팔 던 최고품 담배는 "백양"이었는데 "청자"가 최고품으로 대체되던 시기였다.   전매청 담배는 양담배에 비하면 값도 만만찮은데 질은 형편 없었다. 

 

내 옆방에 내 동갑내기 교수가 있었는데 우리는 둘이 이 참에 담배를 끊자고 제안했다.  둘이서 끊으면 서로 격려하면서 감독하면서 금연이 용이하지 않을까 해서 였다.   그러니까 70년대 초에 내 최초의 금연 노력이 시작되었다.

 

"금연" 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이후에도 금연 다시 흡연등 여러번 끊고 피우고를 반복하다 1975년 관악 캠퍼스로 이사 간 다음엔 완전히 끊었다.      그러니까 불혹의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소싯적" 못된 버릇을 청산한 셈이다.

 

1977 - 78 년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USC 에서 방문교수로 1년 지낼 때 미국의 금연상황은 굉장히 발전해 있었다.     그래도 Semiar 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한 둘 있었지만 재털이는 치운 상태라 담배갑에 재를 터는 궁상을 떨었다.    

 

1965-66 년 Brown 대학에 1년 방문했을 땐 물리학과 건물 자체가 금연 빌딩이었다. 

 

작년에 노벨상을 탄 Kosterlitz교수가 추운 겨울에도 건물 밖 현관에서 떨면서 담배를 피던 딱한 모습이 떠 오른다.(2016/10/04 - [일상, 단상/잡문] - 2016년 물리학 노벨상)

 

 

 

.................

 

 

 

 

과외 선생을 할 때 엄다들이 갖다 주던 Chesterfield 담배

아마 이 담배로 담배를 배우지 않았나 싶다.

 

 

 

공군 담배로 닉네임이 붙었던 양 담배

Viceroy

1956 년 일기장에 썼던

Viceroy 의 자연(보라빛 연기) 주인공

 

 

 

1963년이나 64년 무렵 담배에 불을 붙이던 내 모습

Seattle 에서

당시 UW 에 연수왔던 경북대 L교수가 찍어 준 사진

당시엔 크루컷(Crew Cut)이 유행이라 나도 한 동안 크루컷 머리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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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천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7.06.07 08:29

    건강검진시 금연한 지 10년쯤 되고 아직도 100% 금연은 아닌 저는 사실대로 기재합니다만, 금연하신지 40년이 지나셨으면 건강 검진시 이실직고(?) 하시지 말고 평생 안피우신 걸로 간단 작성하셔도 검진에 영향이 없으실 듯합니다. ㅋ

    • 샛솔  댓글주소 수정/삭제 2017.06.07 11:37 신고

      감사합니다. 문항이 있으니까 항상 옛날 기억을 되 살려 주는 거지요. 담배라는 게 원래 인다안들은 의식으로만 피웠다던데 백인들이 그 악습을 달리 퍼뜨렸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그 많은 사람들을 고통의 도가니로 밀어 넣게 된 거지요. 안타깝습니다.

  2. 지나가는중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7.12.20 11:51

    재미있게 잘읽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빠져들어 읽었네요

서울대학교에 가다 - 2017-05-17

 

 

이론물리 연구센터 소장을 하는 내 애제자 교수가 오늘 몇 명예교수를 점심에 초대했다.

 

5월 중순 스승의 날 근방이면 항상 점심 초대를 하곤 한다.     오랜 만에 서울대학교에 갔다.   작년 5월에 가곤 1년만이다.   학교는 많이 변해 있어 자하연 식당을 찾는데에도 몇 사람에게 물어 봐야 했다.

 

점심을 먹고는 옛 물리학과 건물에 갔다.    내가 관악 캠퍼스에 가서  은퇴할 때까지 25년 넘게 쓰던 연구실도 다시 가 보고 또 새로 지어 옮겨 간 물리학부 새 건물도 구경할 겸 가 본 것이다.

 

은퇴하고 학교를 떠난지 벌써 17년이나 되었으니 변한 것이 많은 것은 당연한 것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17년이 지났다.

 

학교는 5월 축제의 한 가운데였다. 

 

 

 

 

 

 

27동 건물 현관 바로 옆 2충 방이 내 연구실이었다.

이 건물은 개축을 하고 수학부가 쓰고 있다.

 

 

 

개축을 할 때 현관 바로 위 연구실 두개를 헐고 천정을 2층까지 높여 놨다.

동숭동 문리대 캠퍼스에서 1975년 관악캠퍼스로 이사오면서

난 정면에 보이는 벽의 연구실을 25년간 차지하고 있었다.

지금은 이름도 알 수 없는 어느 수학과 교수의 연구실이 되어 있었다.

 

 

 

반대방향에서 바로 본 내 옛 연구실

목련 나무 대신 소나무가 서 있었다.

 

 

 

이 건물이 물리학부 새 건물이다.

 

 

 

대학 본부 앞 5월 축제장

 

 

 

SNU Festival 이란 치장물이 서 있다.

 

 

 

58년 전 내 대학 졸업사진 1959년 2월 쯤 될 것 같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이 된 옛 서울대 문리과 대학 캠퍼스에서 찍은 사진이다.

왼쪽 어깨위에 "대" 자가 보이는 뒷줄 왼쪽에서 네번 째 졸업생이 58년전 내 모습이다.

1970년 난 여기서 교수 생활을 시작했다.

관악캠퍼스로 이사 갈 때 까지 5년 남짓 이곳에서 연구하고 가르쳤다.

마로니에 공원엔 대학 본부 건물 하나만 남아 있고 옛 건물들은 다 사라졌다.

단지 남은 것은 마로니에 나무 몇 구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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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번째 생일

일상, 단상/나 2016. 11. 20. 15:02

81번째 생일

 

오늘은 내 81번째 생일이다.    1935년 11월 20일생이니 오늘이 정확히 생후 81년 되는 날이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누구나 한 때는 어린 아이였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 한 돌을 갓 넘긴 내 손자를 보고 있자면 나도 저렇게 간신히 발을 떼며 걸음마를 배울 때가 있었을 것이란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진도 있고 내가 손자를 귀여워 죽겠다고 하듯 세째 누님도 나를 귀여워 죽겠다고 쓴 일기장을 남겼다.

2011/01/04 - [일상, 단상/나의 가족, 가족사 ] - 셋째 누님의 옛 일기에서



또 어머니도 내 재롱이 비상하다고 출가한 큰 누님에게 쓴 편지를 남겼으니 사실은 사실이다.

2007/12/11 - [일상, 단상/나의 가족, 가족사 ] - 어머니의 유필(遺筆)


 

전에 옛 사람의 관악산 등정기를 올린 일이 있다.  

2008/12/14 - [뚜벅이 기행] - 옛사람의 관악산 기행 

 

관악캠퍼스에서 25 년 가까이 교수생활을 하면서 관악산을 무수히 올랐던 나는 옛 사람의 관악산 등정 기행문에 감동을 받아 그 글을 이 블로그에  옮겨 썼었다.

 

그 옛 사람은 정조 때 우의정에 올랐던 채제공이란 사람인데 나이 67세 때 관악산에 올라 갔다.  나도 그 나이엔 팔팔 했고  몇년전에 관악산 보다 높은 미국의 모나드노크 산 등정을 한 일도 있다.

 

2011/10/11 - [해외여행기/미국 동부] - 모나드노크(Monadnock)산 등반기

 

채제공이 그 나이에 관악산에 오른 것은 그 보다 얼마전의 정승이었던 허목이 83세에 관악산에 올랐다는 기록에 자극을 받아서 였다고 한다.

 

그 기행문에

 

내 일찍이 들으니 미수(眉수) 허목(許穆) 선생은 여든세 살 때 관악산 연주대에 올랐는데 걸음이 나는 것 같아 사람들이 신선처럼 우러러보았다고 했다.

 

그래서 자기도 83세에 관악산에 오르겠다고 별렀다는 것이다.  나이 80살에 세상을 떴기 때문에 그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나는 83세 까지 살아 남는다면  관악산에 오르고 싶다.

 

 

81번째 생일의 감회다.


 

 

 

1937년경 사진

어머니의 품에 안긴 두살쯤의 나

 

 

 

2,3주전에 찍은 내 손자

내 손자는 2015년 10월 30일 생이니 80년 (- 20일) 차이의 내 손자

위의 내 사진을 보니 내가 봐도 어딘가 닮은 것 같다.

이 녀석도 내 나이가 되어 혹여 이 글을 읽으며 이 때를 회상하려나? 


 

 

1938년경 사진

 

 

 

1941년 유치원 입원 기념사진

 

 

 

국민복을 입고 명찰 비슷한 것을 단 것으로 미루어

국민학교 들어 간 후인 듯

그렇다면 1943년경일 것이다.


 

 

오늘(2016년 11월 20일)  레스토랑에서 찍은 사진

Gallaxy S7 edge 로 찍은 사진

 

 

 

오늘(2016년 11월 20일)   돌아와서 서재에서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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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후학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6.11.21 12:56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2. 메이데이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6.11.21 15:32

    만수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런데 선생님 피부가 연세와 많이 모순됩니다. 수많은 shy 방문객들을 감히 대표하여 비결을 여쭙습니다.

    • 샛솔  댓글주소 수정/삭제 2016.11.21 19:56 신고

      감사합니다. 실물은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Galaxy S7으로 찍은 건데 그 카메라가 뭔가 포샵질하는 것 같습니다. 다른 카메라로는 그렇게 안 나옵니다.

    • 메이데이  댓글주소 수정/삭제 2016.11.21 21:00

      앗, 시중에 이상한 주사 이야기가 많이 나돌아서 뒤숭숭하길래, 선생님께서는 야채나 과일을 많이 드신다거나 하는 고전적 비결을 말씀해 주실 줄 알았습니다만. 늘 건강하시기를 다시 한번 바라마지 않겠습니다.

  3. 경천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6.11.21 16:14

    생신 축하드립니다.
    저도 관악산은 익숙한 산이니 선생님이 83세에 관악산을 오르신다면 제가 모시겠습니다..

    • 샛솔  댓글주소 수정/삭제 2016.11.21 19:58 신고

      감사합니다. 여든 세살에 관악산에 오르려면 매봉산 말고도 대모산 , 구룡산도 다녀봐야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힘을 길러야 할 것 같습니다.

  4. 황성주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6.11.22 10:42

    생신 축하드립니다.
    어린 시절 어머님과 찍은 사진을 보니 가슴이 찌릿합니다. ㅎ

  5. ejmoto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6.11.25 00:52

    만수무강하십시요. 피부가 너~무 좋으시네요. 정말 부럽습니다.....

  6. 익명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6.11.28 16:48

    비밀댓글입니다

  7. ezss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6.12.06 04:35

    브롬톤을 타는 입장에서 선생님의 사이트를 보고 ...와.. 대단하다 멋지다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 나도 선생님 나이때에 비슷한 경험을 해볼수 있을까 라는 생각도 해봤구요... 아무튼!

    건강하시고 앞으로도 좋은곳 많이 많이 다니세요!! 생신축하드립니다.

  8. gillez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6.12.10 15:59

    늦었지만 생일 축하 축하 드립니다.

  9. 자유인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7.01.06 21:48

    저희 아버지와 같으십니다. 멋지십니다.

  10. freedom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7.04.11 16:21

    안녕하세요^^
    도쿄에 대한 정보를 찾다가, 선생님의 소중한 기억공간에 놀러오게됐습니다!

    1993년생 한 사람으로서, 저 보다 연세가 훨씬 많으셔도
    기록습관 및 부지런하신 모습에 반성하고 갑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되시고, 늘 건강하게 오래오래 글 남겨주세요:D

3일 남기고 내 다이어트 목표치 달성

 

 

올해 초 대만 여행을 떠나기 전에 내 몸무게가 66 Kg 을 넘어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겠다는 결심을 했었다.  

 

그 때 마침 건강 지킴이 MotionX SleepTracker ( 2016/01/09 - [IT 와 새로운 것들] - 아이폰용 건강 지킴이 앱 - MotionX24/7 ) 을 발견하고 내 체중을 수첩이 아니라 아이폰에 기록할 수 있게 되어 기뻤다는 이야기를 썼다.      또 때 마춰 사서 읽은 다이어트책 "늘 배고팠지?" ( 2016/02/19 - [책] - 혁명적 새 다이어트 법 "늘 배고팠지?" - Always Hungry by David Ludwig )의 혁명적 다이어트 법의 실천법도 알게 되어 년초의 결심을 실행에 옮기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오늘(2016-06-27)은 내 개인적 역사의 뜻 깊은 날이 되었다.   마침내 30 여년만에 체중 60 Kg으로 내려 가는데 성공한 것이다.  

 

 

 

오늘 아침 내 몸무게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군사관학교에 응시할 때 신체검사에서 떨어질까 걱정을 했었다.   내 체중이 최저체중에 미달할 까 걱정했던 생각이 난다.   정확이 최저 체중이 얼마였는지 모르는데 50Kg 초반이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내 키도 해군사관학교의 최저 신장 조건을 간신히 통과해서 서열은 가장 빨랐지만 키는 동기중에서 가장 작았다.

 

1960 년 미국유학을 떠날 때 여권 사진같은 것이 남아 있다.   50 kg 초반의 몸무게일 때다.  

 

 

 

1960년 50 kg 초반일 때 사진

여권 사진이 아니었나 싶다.

턱이 뾰준하여 도라지 캐러 가겠다고

어머니가 농담을 하실 때였다.

 

 

 

미국에 가자 마자 결혼을 했고 아내가 손이 커서 항상 음식을 많이 만들었다.  음식이 귀한 나라에서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음식을 남겨서 버린다는 것은 상상을 못했다.   그건 "죄" 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자 은근히 몸무기가 불어나 70 Kg 에 육박했던 갓 같다.  

 

귀국후에도 70 Kg 안팍을 유지했었던 같고 70 Kg 을 웃돌면 특단의 조치를 취하곤 했다.  

 

80년대에 단학선원에 다닐 때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영동 옥천에 있는 천화원에서 단식 수련을 한 일이 있다.  그 때 1주간의 수련을 했는데 몸무게가 50 Kg 후반까지 내려 간 일이 있다.

 

그 후에도 여름이면 혼자서 "포도단식"을  했다.    10일 간 포도만 먹고 살았다.   그 것은 궤양성위염이 재발 하곤 했기 때문이었는데 포도단식후엔 효과가 있었다.     서너해 한 후엔 "관장" 하는게 고통스러워 그만 두었다.  

 

그리고 한 참 후에 궤양성 위염은 "헬리코 박테리아"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항생제로 치료를 한 후엔 재발은 없었다.  

 

포도단식후엔 항상 50 Kg 후반의 체중으로 줄었다.  그러니까 1980년 때 여름에는 항상 체중이 50 Kg 후반으로 돌아 오곤 했다.  

 

포도 단식을 마지막으로 한 여름 이후에는 50 Kg 후반으로 돌아 온 일은 없었다.   그리고 30년 만에 60 Kg으로 돌아 온 것이다.  

 

이번 체중 감량은 "포도단식"과 같이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지 않고 배 고프지 않은 채 감량에 성공한 것이다.

 

내 개인의 역사적 날이다. 

 

 

 

 

 

MotionX 에 오늘 측정치를 기입했다.

목표일이 3일 남았고 이젠 0.0 Kg 만 줄이면 된다고 나온다.

 

 

 

올해 1월 5일 부터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 날 몸무게는 66.0 kg 이었으니 6 개월에 6 Kg  뺀 셈이다.

평균 한달에 1 Kg 씩뺀 것이다. 

나이가 들어 감량을 할 때에는 서서히 해야 한다.

 

 

****

 

***** 다이어트 식사 *****

 

 

아침은 과일과 고구마

대만에서 이것을 시작했다. 

 

점심은 주로 곡물밥과 낫또에 달걀 하나로 비벼 먹었다.   반찬으로 김, 울외장아찌, 봄에는 동치미 여름에는 오이지등을 곁들여 먹었다.   간간히 기호식품으로 곤냐쿠 스파게리, 곤냐쿠 우동, 곤냐쿠 냉면, 곤냐쿠 콩국수 따위를 해 먹었다.  

 

시중에서 곤냐쿠로 이렇게 만든 식품들을 살 수 있다.    이 번 기회에 우리는  엄청히 많은 다이어트 식품들이 시중에서 유통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저녁은 주로 새러드와 생선구이 아니면 훈제 연어, 통조림어류(안초비, 연어 따위)를 얹어 먹었다.   또 묵밥을 만들어 먹었다.    참으로 다양한 다이어트 요리를 만들 수 있다.  코니가 음식 만드는 것을 좋아 하기 때문에 많은 것을 인터넷을 검색해서 실험했다.

 

한천도 곤냐쿠대신 써 봤지만 우리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그리고 운동은 대여섯번을 빼고는 매일 최소한 10000 보를 채웠다.  밖에나갈 수 없을 때에는 거실에서 왔다갔다 했다.



MotionX steps 수 목표로 10000보를 걸어놓고 30분 경고를 걸어놓으면 30분 움직이지 않으면 경고음이 울린다.  이것도 도움이 많이 됐다.

 

 

 

 

대만에서 시작한 과일 고구마 아침 식사

 

 

 

점심은 대부분 곡물밥과 낫토 달걀 하나였다.

여기에 김 따위 반찬 몇가지 얹어 먹었다.

 

 

 

곤냐쿠 우동

이 사진은 실곤냐쿠 우동이지만

면발이 굵은 우동용 곤냐쿠도 판다.

 

 

 

실 곤냐쿠 스파게리

실곤냐쿠 굵기 말고도 여러 굵기의 곤냐쿠들이 시판되고 있다.

 

 

 

저녁으로 주로 먹은 생선 샐러드

 

 

사진은 다 찍지 못했지만 코니가 요리에 열정이 있어 각각지 다이어트 요리를 맛 보게 해 줬다..    코니는 코니 대로 다이어트 요리 개발에 재미가 들렸고 난 좋아 하는 우동 냉면 판콘냐쿠 모밀등 기호식품을 밀가루 대신 먹을 수 있어 좋았다.

 

이 번 다이어트 기간에 내가 좋아하는 맥주를 못 먹고 대신 red wine 을 한잔씩 했는데 다이어트가 끝나면 다시 맥주로 돌아 갈지 모른다.  

 

또 견과류는 식탁에 꺼내 놓고 출출하면 집어 먹었다.   견과류는 절대 살찌는 음식이 아니다.  포만감만 준다.


단 한가지만 주의하면 된다.  정제된 탄수화물, 밀가루, 흰 쌀밥, 감자(전분 덩어리로 진짜 유일한 자연식 중에서 피할 것)만 피하면 된다.

 

이 번 여름 여행에 배송할가 생각해서 햇반을 검색해 보니 동원에서 100% 통곡물밥 100% 현미밥이 나왔다.  떠나기 전에 가 있을 호텔에 배송의뢰할까 생각중이다.

 

 


여행에 가져갈까 먹어 보기 위해서 몇가지를 사 봤다.

통곡물밥은 집에서 지어 먹는 밥과 비슷했다.

정제된 흰 탄수화물이 다이어트의 적이라는 것이 알려 지면서 다이어트 식품도 참으로 다양해졌다.

 

 

***** BMI *****

 

 

BMI (body mass index 비체중)은  몸무게 몸부피로 나눈 값이다.   몸집이 얼마인데 몸무게가 얼마 나가는가를 비교하게 위해서 만든 수치다.

 

사람의 키와 몸무게만 가지고 계산한다.

 

사람의 부피로 키의 제곱을 쓴다.  3제곱이 아니고 2제곱을 쓰는 이유는 키가 10% 크다고 배와 등사이가 10% 늘어 나지 않고 폭(겨드랑과 겨드랑사이 거리)이 10%  늘어 나지 않는다.  대강 제곱이 3제곱보다 부피의 근사치를 준다는 점에서 이런 공식이 나왔다.

 

 

비체중 또는 체질량지수(BMI)  =  몸무게 (Kg) / (키(미터) * 키(미터))

 

온라인으로 체질량지수를 계산할 수 있는 곳은

 

http://www.dietiyes.com/bmi-calculator (한글)

http://www.nhlbi.nih.gov/health/educational/lose_wt/BMI/bmi-m.htm (영어)

 

 

 

이번 감량으로 내 체질량 지수는 22.3으로 내려 갔다.

 

 

 

다이어트를 시작할 때인  몸무게 66Kg 일 때의 체질량지수

정상 범위엔 들긴 해도 과체중으로 넘어가기 직전이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번 감량에도 불구하고 내 체질량지수 22.3은 정상 범위에서 윗쪽에 위치하고 있다.   

 

내 체질량지수를 정상범위의 한 가운데 놓기 위해서는 몸무게를 얼마를 유지해야 하나?

 

58 Kg 이다.

 

제 2차 목표는 1 Kg 더 줄이고 제 3차 목표이고 최종 목표는 58 Kg 까지 내릴 생각이다.  

 

 

 

내 몸무게가 정상 범위의 한 가운데 있으려면 58 Kg 을 유지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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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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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천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6.06.29 09:18

    저도 요즘 다이어트에 관심이 많은데 선생님의 성공기(?)가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샛솔  댓글주소 수정/삭제 2016.06.29 11:32 신고

      미국보단 덜 하지만 우리나라도 비만이 큰 문제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의 fast food 식당과 그 식단들이 청소년들에게 어필하여 청소년 비만이 앞으로 큰 걱정입니다.

  2. 알 수 없는 사용자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6.07.09 23:15

    마인드라이프에서 EMDR다이어트 프로그램을 발표했어요.포털에서 검색하면 나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