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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인연 본문

일상, 단상/사랑, 운명, 인연

운명의 인연

샛솔 2007. 6. 27. 08:17

운명의  인연

 

 

우리 부부의 인연을 보면 무언가 긴 끈으로 처음부터 묶여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돌이켜 보면 참으로 신기하달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안은 깨닫지 못하는 인연의 끈을 다 살고 난 다음 돌이 켜 보면 인연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부부의 맞남보다 더 가까운 만남은 인간사엔 없다.   부부의 만남은 부모 자식간의 만남보다 더 밀착된 만남이다.  그래서 부부간은 무촌간이라 하지 않는가.  그러니 그 만남이 구원겁(久遠劫)의 인연이라 하여도  놀랄 것이 없다.   

 

우리는 세상사의 현재창밖에 보지 못한다.   현재창 마져도 완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세상사가 진행하여 인연이 맺어지면  그때  돌이켜 과거를 생각하면 그 맺음이 우연히 아니었다고 생각되는 여러 요소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 부부가 처음 만난 것은 1960 년 12월 크리스마스를 전후한 어느 날이었다.  

 

나는 그해 (1960) 8월 22일 한국을 떠나 미국 워싱톤주 시애틀에 와서 워싱톤대학 물리학과 대학원에 다니고 있을 때였다.  

 

아내는 그해 12월 10일 한국을 떠나 미국 웨스트 버지니아주의 웨스트 버지니아대학 대학원에 진학할 계획으로 시애틀에 왔다.  그녀의 계획은 시애틀에서 그레이하운드 버스로 미국 여행을  하면서 웨스트 버지니아에 갈 생각으로 시애틀에 내린 것이다. 그리고 며칠 지내다 버스 편으로 미국 여행을 하면서 동부로 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생각을 고쳐 내가 다니는 워싱톤대학 대학원에 다닐 생각으로 시애틀에 주저 앉을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녀가 생각을 바꾼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웨스트 버지니아 대학에서 그녀가 공부하려는 도서관학과는 전국 도서관학회에서 인가를 받지 못한 학과로 석사학위를 받게 되어도 미국 전역에서 인정하는 사서(librarian)자격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한편 워싱톤대학 도서관학과는 인가된 학과로 석사학위를 받으면 자동적으로 전국에서 인정하는 사서자격을 얻을 수 있다.

 

당시 시애틀에는 한국학생이면 누구나 다 아는 Daughty 라는 은퇴한 미국인 노부부가 있었다.  우연히 미국에 연수하러 온 한국군인을 보살펴 준 인연으로 많은 한국 유학생이 시애틀에 오면 처음 이 노부부의 신세를 지곤 했었다.   그런 연고로 아내도 그 집에서 며칠을 지냈는데 이 노부부가 새로 온 학생을 소개하기 위해 한국 학생들을 부른 것이다.   그래서 나도 그집엘 갔다 아내를 만난 것이다.  

 

당시엔 여자 대학생도 흔하지 않았거니와 단신 유학 오는 한국 여학생은 참으로 귀했었다.  한국 유학생중 여학생은 비율은 2~3 % 도 되지 않을 때였다.   여학생이 한국에서 새로 왔다기에 함께 자취를 하고 있던 다른 두 친구와 함께 여학생 구경 간다는식 장난기 어린 기분으로 Daughty가엘 갔었던 것이다.

 

우리의 인연은 여기서 시작한다.

 

같은 대학을 다니다 보니 켐퍼스에서 자주 보게 되고 마침내 이듬해 4월 1일 첫 데이트를 했다.  처음부터 우린 서로 끌렸었는지 모른다.    

 

그리고는 우리는 열애에 빠졌다.    우리는 잠시도 떨어지기 어려운 연애 중독자가 되어 버렸다.  아내는 공부에 집중을 할 수 없어 아예  봄학기 등록을 취소하고 말았다.  

 

 나는 학교에서 조교를 맡고 있어 등록을 취소할 형편이 못되어 간신히 중간시험과 기말 시험을 쳤다.  성적이 엉망일 수밖에 없었다.  그야 말로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자칫 파멸적인 연애가 될뻔 했다.  

 

그래서 우리는 학기중이라도 결혼을 해서 안정을 찾으려 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학기가 끝나기를 기다려 1961년 6월 16일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첫 데이트한 날로부터 2달 16일 후였고 첫 만남에서 부터는 여섯달도 채 못되어서였다.

 

우리는 안정을 되찾고 아내는 가을학기에 재등록하여 2년후 석사과정을 마쳐 정식 사서가 되었다.  그리고는 곧 워싱톤 대학 극동학과 도서관의 한국학 담당 책임 사서로 취직도 되고 이로 인해  우리는 모두 영주권도 취득했다.  나 또한 이듬해 박사과정 자격시험에 합격하여 학위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결혼후 모든 것이 잘 풀린 것이다.

 

그러나 지금 도리켜 생각하면 그 파멸적 연애기간은 악몽과 같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결혼후 우리는 신기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미국으로 서울을 떠나 오기 전 거의 7년간을 아내와는 불과 400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625전쟁이 나서 가족이 와해되는 비극을 맞자 혜화동의 혜화초등학교 바로 뒤에 사는 둘째 누님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러니까 1951년서부터 1960년까지 근 10년을 혜화초등학교 뒤어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아내는 고등학교 1학년때 우리집에서 직선거리로는 400 미터도 안되는 이웃에 이사왔고 2년뒤 고3 때에는 더 가까운 곳, 직선 거리 300 미터도 안되는 이웃으로 다가 왔고 대학교에 들어 가자 바로 36 미터 떨어 진 이웃으로 이사를 온 것이다.   

 

우리집과 아내의 집과는 직접 알지 못했지만 많은 서로의 공동 이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그러니까 미국에 오기전 4년간은 정말 가까운 이웃에 살고 있었던 셈이다. 나도 아내가  살던 집이 어느집인지 알고 있고 아내도 내가 살던 집을 안다.  우리가 서로 몰랐다 뿐이지 아주 가까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960년 8월 22일 내가 미국에 오자 넉달도 안되는 1960년 12월 10일 아내도 태평양을 건너 내가 사는 시애틀에 따라 온 것이다.

 

아내와 나는 나이도 두 살 차이이고 학년도 2년 차이가 난다.  그러니까 아내가 고1이고 내가 고3일 때 같은 동네로 이사를 온 뒤 계속 점점 더 가까이 내가 사는 곳으로 따라 온 셈이 된다.

 

아래 지도가 아내가 날 따라 집을 옮긴 자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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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3 이고 아내가 고1일 때 우리는 직선 거리가 불과 400 미터도 안되는 거리에서 살고 있었다.
내가 대학생이 되자 고3의 아내는 직선 거리가 300 미터도 안되는 더 가까운 곳까지 다가 왔다..
그리고 그녀가 대학생이 되었을 땐 불과 40 미터도 안되는 가까운 거리까지 이사를 왔다.
내가 미국 시애틀로 오자  4개월도 안되 아내는 내가 있는 곳으로 날아온다.
그리고는 더 가야 할 사람이 가질 않고 그곳이 머믈기로 한다.
우리는 만나고 열애에 빠지고 반년 남짓 후에는 영원히 함께 살기를 맹세한다.
이 맹세 전 7년간의 그녀의 행적을 보면 이것은 단순히 우연이라기에는 너무 소름이 끼치는 우연이다.
 
 
 
   

그리고  보면 아내는  나를 만나기 위해 7년간을 날 따라 다닌 셈이 된다.    그러나 그녀나 나나 우리가 만나기전까지는 그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아니 우리는 서로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종국엔 만나고 영원히 함께 살기를 맹세한다.   그리고 며칠전에  그 만남의 46주년을 맞은 것이다.   우리의 만남이 과연 우연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소름 끼치는 우연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우연이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나는 아내를 구원(久遠)의 연인이라 부른다.

아니  운명이 우리를 만나게 해 주기 위해서 집요하게 아내를 내게 다가가게 한 것이 아닐까?  그러다면 아내는 내 운명의 여인이다.   


 


 

운명의 남녀다.
 
둘 사이엔 보이지 않는 빨간 끈이 매여 있었는지 모른다.
 
왼쪽은 1942년 4월 18 일 촬영하였고
오른쪽도 거의 같은 때로 추정된다.
이들은 18년 후인 1960년 12월에 미국에서 서로 만났고
이듬해인 1961년 6 월 16 일 결혼한다.
 
왼쪽은 일본 오사카에서 찍은 사진이고
오른쪽은 한국의 서울에서 찍은 사진이다. 
 
오른 쪽 여아(아내)는 뭔가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의자 팔걸이의 기둥을 꽉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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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처음 헤화동 가까이에 이사 왔을 땐 고딩때였다.

아래줄 제일왼쪽.

그녀는 나와 불과 400 미터 되는 곳에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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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좀더 내게 다가 왔을 땐 아내는 애띤 대학신입생이었다.

그녀는  내가 사는 집에서 고작 200 미터 남짓 떨어진  

집에서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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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좀더 성숙한 여대생이 되었을 땐 불과 40 미터도 안되는 가까운 거리까지 이사를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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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국 워싱톤주 시애틀에 오자 4개월도 안되 내 뒤를 따라온다.

그리고 웨스트 버지니아에 갈 사람이 가진 않고 시애틀에 주저 앉는다.

 그리곤 나와 함께 영원히 살기를 맹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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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함께 살기를 맹세한 후 신혼초 프로팅 브리지 근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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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석사학위를 받고 워싱톤대 극동학과 학국학 담당 책임 사서로 일했다.

 

 

 

 

내가 은퇴한 후  결혼 40주년이 되던 여름 우리의 첫 만남과 격렬한 연애의 추억,  그리고 신혼의 달콤한 추억이 서린 Seattle 엘 갔다.  우리가 다니던 학교는 많이 변해 있었지만  우리가 첫살림을 차렸던 15th Ave. 의Comodore and Ducthces Apt.  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40년이 지난 그때까지도. 

 

우리는 연애 시절  헤어지기 아쉬어 밤새워 길을 걸었고  새하얀 아침이 오자  그도 모자라 Revenna 공원엘 갔었다.   그 추억을 더듬어  Revenna  Park에 가 보기도 했다.   그 젊은 날의 정열을 추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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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지기 섭섭하여 떨어 질 줄 모르던 두 남녀는 갈 데가 없어

새하얀 아침이 올때 까지 함께 걸었다.  아 ! 무슨 정열이 었던가

그리고도 모자라 우리는 이  공원엘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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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안은 한 낮에도 원시림의 아람들이 나무들로 서늘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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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예나 지금이나 책을 좋아해 미국 여행만 가면
Barnes & Noble 대형 서점에 가서 하루 종일이라도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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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또 동부 워싱톤 주에도 여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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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shington 주  동부의 Dry Fall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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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시대에 거대한 폭포를 이뤘으나 이제는 물이 말라
마른 폭포(Dry Fall) 라 불린다.  우리는 신혼 때 여기도 가서 자동차 캠핑을 하곤 했다.
그 때 그 시절을 추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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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만나고 46년이 지난 올 1월 겨울
Greenspeed GT5 Trike 를 처음 사서
San Gabriel River Bike Path를 달렸다.
긴 여정을 달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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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죽는 날까지 함께 살자고 맹세한 날로부터 46년이 지났다.

나도 아내도 세월의 때가 많이 묻었다.

지난16일 우리는 결혼 46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강원도 정선엘 갔다.

펜션"은하수와 여울" 의 "은어"실 베란다에서.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인연의 나선 궤적을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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