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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의 계절에 생각나는 옛 추억 본문
폭우의 계절에 생각나는 옛 추억
우리나라엔 여름이면 엄청난 비가 내린다. 장마때도 그렇고 태풍이 올 때로 그렇고 또 수시로 고온 다습한 기단이 몰려 오면 엄청난 비를 뿌리곤 한다.
1954년 이맘때였다.
그 때 나는 해병 훈련을 받고 있었다. 진해시 동남쪽에 위치한 해병 훈련소에서 해병 훈련을 받았다. 휴전이 조인되던 해 고3 이었던 나는 진로에 대한 긴 고민 끝에 해군사관학교에 가기로 결심했다.
625전쟁으로 가족이 와해되는 비극을 맞았다. 환갑에 가까운 노모는 누님댁에 얹혀 살고 계셨다. 누구에게도 학비를 지원 받을 형편이 아니었기에 일반 대학에 진학해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결국 해군사관학교를 지망하게 되었다.
해군사관학교는 여름이면 3급생(2학년)이상은 원양항해훈련으로 함상 훈련에 들어 간다. 여름 휴가가 시작될 때까지 학교는 보톰(bottom)이라 불리는 4급생만 남는다.
그리고 4급생은 교실 수업대신 해병 훈련을 받는다. 해사의 보톰생활은 입교전의 지옥의 특별 훈련, 입교후의 일상생활도 직각 보행 계단 구보등 가해지는 규율이 만만치 않아 여간 힘든 "훈련"이 아니다. 나는 나중에 알았지만 다른 동기들이 상급생에 몰래 받는 기합도 만만치 않았다 한다.
그런 탓인지 해병훈련은 어렵다기 보단 갑갑한 학교내의 규율생활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느낄 수 있어 좋았던 것 같다.
기억에 남는 것은 1분 식사였다. 식사시작에서 식사끝까지 1분이다. 그 안에 밥을 다 먹지 못하면 그것으로 점심은 끝이다. 그런데 신기하게 1분에 밥을 다 먹었다.
또 기억에 남는 것은 <비에이 아르 다당 탕탕..>으로 시작하는 BAR(Browning Automatic Rifle 비에이아르 자동소총) 교관의 강의였다.
이 해병중위는 똑같은 BAR 강의를 새로 오는 훈련병에게 무수히 반복해야 하는 지루함에 지친 듯한 어투로 강의를 했다. 그런데 55년이 지난 지금도 그 <비에이 아르 다당 탕탕..>이란 운률이 귀전을 스친다.
그런데 이 교관을 나중에 민간인으로 다시 본 일이 있다. 해사를 1년을 못 마치고 뛰쳐 나온 나는 서울대에 다시 들어 갔다. 그 때 철학과 3학년에 다니고 있는 그 해병중위를 봤다. 어쩌다 말을 걸어 보지 못했지만 틀림없는 그 해병 중위였다.
625전에 대핵생이었던 젊은이들은 대부분 전쟁동안 군에 들어 갔고 살아 남은 사람은 휴전이 되면서 제대하고 복학하였다. 이 해병 교관도 어쩌면 그런 케이스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런데 그 해병 훈련을 마치고 해사로 돌아 오는 행군을 할 때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다. 우린 걸어서 훈련장에 갔고 걸어서 돌아 왔다.
해사에 수석으로 합격한 탓에 나는 동기중에서 서열이 1번이었다. 그래서 상급생이 없는 그 여름 나는 동기생들을 인솔하는 책임을 맡았다.
나는 구령도 붙이고 군가도 부르면서 그 폭우속을 행진해 갔다.
M1 소총은 물론 물에 빠졌다 나온 꼴로 완전히 젖은 우리는 해사 연병장에 도착했다. 우린 거기서 해산할 차례였다.
해사 연병장은 수상기 발진기지로 지어졌던 자리라 콩크리트 바닥이 바다로 완만히 이어져 있다. 우린 바다를 바라 보고 정열하고 있었다.
나는 해산 대신 바다로 뛰어 들기로 했다. 어차피 완전히 젖은 몸이다. 한번 물놀이나 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나는 "해산" 대신 "앞으로 가"를 소리 쳤다.
우리는 함성을 지르며 바다로 뛰어 들었다.
신기하게도 우리 옷은 곳곳이 바람 주머니가 되어 무거운 철모와 M1소총까지 모두 바쳐 줬다. 그냥 둥둥 떠다는 것이었다.
폭우속에 완전무장한채 바다를 헤엄친다는 경험은 쉽사리 겪어 볼 수 없는 일이리라.
그리고 우리가 한 일은 소총을 수도물로 씻어 내고 기름질 하는 일이었다. M1소총을 분해하고 손질하는 훈련은 수시로 받던 훈련이라 일도 아니었다.
폭우가 내리면 그 시절이 생각난다.
나는 이듬해 퇴교를 하기 위해 엄청난 일을 꾸미다 진해 해병대 영창에 갇히는 몸이 되고 고등 군법회의까지 받는 수난을 겪었다. 생각하면 참으로 무모한 일들을 했고 겪었다.
해사시절
뒷줄 오른편에서 두 번째가 필자
1954 년 여름
이런 복장을 하고 폭우속에서 바다에 뛰어 들었다.
각반을 친 바지 가랑이가 공기 주머니가 되어
우리 몸은 둥둥 떴다.
그 때 함께 바다에 뛰어 들었던 동기들 중에서 졸업후 10여명이 해병대를 지원했고
그 중 몇 사람은 월남전에서 전사했다.
그리고 살아 남은 한 사람은 해병대 총사령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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