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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날과 미투 본문

일상, 단상/나의 가족, 가족사

여성의 날과 미투

샛솔 2018. 3. 10. 11:49

여성의 날과 미투

 

어제가 여성의 날이었다고 한다.  그런게 있는 줄도 몰랐다.  미투운동과 맞물려 여러가지 행사가 있었던 것 같다.

 

"여인"하면 가슴이 아프다.   난 왜 여성하면 가슴아프고 눈물이 날까? 

 

내가 내 생전 가까웠던 여성은 모두 비운의 여인들이었다.

 

내가 처음 가장 좋아했던 여성은 할머니였다.  내게 "귀먹어리 세 할멈" 이란 구전 동화를 불러 주시고 불러주셨던 그 할머니다.  (2014/04/08 - [일상, 단상/나의 가족, 가족사 ] - 세 귀머거리 할멈 이야기 - 내 할머니가 들려 주신 구전동화)

 

 

"내 할머니는 고종 계유 (윤 6월 13일) 생으로 족보에 기록되어 있어 추산해 보니 1873년에 태어 나셨다. 1943 경 돌아 가셨으니 한 70년 사신 것이다.   나하고는 8년동안 이 세상을 함께 지내셨는데 마지막은 오사카 집 이층 다다미방에 병환으로 누어 계셨다. 

 

병환나시기 전까지 내가 너댓살쯤 되었을 때 할머니는 내게 많은 한국의 구전 동화를 들려 주셨다.  할머니의 이야기 주머니는 엄청 컸다.   무진장의 이야기가 나왔다.  어머니는 자기는 얘기는 잘 못하는 데 할머니는 이야기도 많이 알고 이야기도 잘 하신다고 칭찬을 하곤 하셨다.

 

할머니는 우리와 아무 혈연이 없다.    익헌공 종가집은 증조할아버지때 혈손은 끊어지고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모두 그 윗대의 후손집에서 양자로 들어와 종가를 이어 왔다.   그런데 오사카에서 같이 산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3취로 첫번째 두번째 할머니가 모두 손 없이 돌아 가셨고  이 할머니도 할아버지와 얼마 살지 못하고 할아버지를 잃은 것이라고 한다. 마지막 이 할머니는 할아버지 사후 양아들인 아버지가 어머니로 모신 분이다.

 

파평 윤씨로 가난한 양반 집안이라는 것만 난 알고 있다.   어머니의 이야기로는 가난하니까 부자집 덕좀 보려고 나이 많은 할아버지에 3취로 시집 보냈다고 하셨다.   난 할어버지를 뵌 적도 없고 어머니 말씀으로 기억할 뿐이다.  할아버지 사후 아버지가 나이 많은 사촌의 빚보증을 섰다가 가산을 모든 날리고 말 그대로 우리집은 망했다.   할머니 친정은 덕은 보기는 커녕 나이많은 할아버지의 삼취로 보내서 자손도 못보았고 할머니는 할아버지 사후엔 집안이 망해서 일본으로 건너간 아버지의 부양으로 살다가 돌아 가신 조선조 말기의 비운의 여인이었다. "



출처: http://boris-satsol.tistory.com/1153?category=380860 [지구별에서-MyLifeStory]

 

내 어머니는 말할 것 없이 내겐 가장 소중하고 귀한 여인이었다.

 

한말에 태어나 가장 험난했던 조선 근대사를 몸으로 살다가셨다.   625때 6남매중 둘을 북쪽으로 보내 생이별을 했고 막내딸, 내겐 4살 터울의 손윗 누이는 생사도 모른다.   1997년 1월   그 막내딸에게 금비녀 하나와 지폐 20만원을 돌돌 말아 유언장과 함께 나에게 남기고 가셨다. (비극의 유산 --- 조선 근대사를 몸으로 살다 간 우리 어머니 ------- )

"유품을 정리하던 나는 어머니의 낯익은 필적을 발견합니다.  내가 씨애틀에 살 때 푸른 봉함엽서에  "... 보 거라"  로 시작하며 보내셨던 안부 편지.  글씨와 글씨가 이어지는 옛날 붓 글씨체로 세로 쓰기 했던 그 필적. 지폐 스무 장(이십만원)과 금비녀를 함께 쌌던 그 유서에는 "내가 K가 시집 갈 때 아무것도 못 해 줬는데 나중에 K를 보면 이것이라도 전해 주어라..."

언제 쓰신 유서인지 모릅니다.  아마도 교통사고 이전이라고 추측 됩니다.  어떻게 K 가 살아 있다고 생각 하셨을까?  그리고 시집갔다고 생각하셨을까?   나에게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입니다. 

조선 근대사의 비극을 몸으로 살다간 우리 어머니 창녕 성씨는 그 마지막 장을 마감하지 못한 채 떠나 갔습니다.   그 마지막 장을 나에게 남긴 채.

나는 생각합니다. 이 비극의 마지막 장을 내 생전에 보게 될는지.....  그리고 어머니의 비원을 이뤄 드릴 수 있을지.......
아 어머니...."


출처: http://boris-satsol.tistory.com/91 [지구별에서-MyLifeStory]

 

 

내 6남매중 위의 4남매는 나와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    우리 집안이 망하기 전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중에 세 누님은 내게 어머니 같은 분들이다.    첫째 누님은 내가 태평양전쟁때 오사카에 소카이(피난)와야 할 때 날 맡아 키워 주셨다.  그런데 625때 큰 매형은 1950년 가을 수복해 들어 온 국군뒤에 따라 온 서북청년단 같은 반공단체가 "치안대"라 자처하며 조금이라도 인공치하에서 나섰던 사람들을 마구 잡아다 폭행하고 죽이고 했다.   매형도 이 치안대라는 테러집단에 잡혀가 폭행당하고 결국 살해당했다.  이 누님은 남편의 시신도 찾치 못했다. 30대 중반에 과부가 되어 외로운 여생을 살다 기셨다.

 

두째 누님은 내가 대학을 다닐 때 돌봐 주셨고 내가 그 누님집에서 가정교사를 하면서 돈을 벌어 미국 유학을 갈 수 있었다.  그 누님이 가장 오래 사셨다. (두째 누님의 부고)

 

 내가 전에 쓴 "늙음은 더욱 아름다워라)의 주인공이다.

 

젊었을누님은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병상에 누워 있는 누님 또한 아름다왔습니다.  누님을625전쟁피난길에서 얼굴전체에화상을입어자국이아직도남아있습니다. 시대의모든땅의여인이그랬듯누님역시인고의생을살았습니다. 그럼에도여전히아름다운여인으로남아있는누님을나는송원스님이말한늙음의아름다움을생각해 봅니다 

 



출처: http://boris-satsol.tistory.com/87 [지구별에서-MyLifeStory]

 

"내가 좋아 했던 형수님은 형과 약혼했을 때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선화국민학교 전학을 도와 주셨다.  아버지가 하시다가 갑자기 알 수 없는 병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1946년경이다. 

 

그 형수님이야 말로 내가 좋아했던 여인중에서 가장 비극적 삶을 살다 가셨다.  결혼한지 5년이 채 안 되었을 때 625가 터졌고 형은 25살의 새 색시와 년년생 두 아들을 남겨 두고 인민군이 패주할 때 북으로 따라 갔다. 자발적이었는지 반 강제였는지 그 건 알 수 없다.

 

"14 후퇴로 서울이 다시 인민군치하에 돌아 왔을 때에도 형은 형수나 아들을 데리려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형수는 마냥 기다릴 수 없었다.   형이 안오면 자기가 아들 둘 데리고 남편을 찾으려 북으로 갈 결심을 한다.

 
 
어머니는 그 자랑스러워한 조선 갑반의 종부 답게 종부와 종손을 젊은 며느리의 손에만 맡길 수 없다는 생각으로 며느리와 손자 둘을 따라 월북을 결심한다.
 
 
 
나와 어머니에게는 행운이요 형수에겐 불운하게도 십리도 못가 미군의 폭격에 형수의 뒷굼치에 부상을 입는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뒤굼치가 아믈 때엔 이미 서울은 다시 미군과 국군이 들어 왔을 때였다.
 
 
 
이 사건이 아니었다면 중3인 어린 나이에 난 어머니와 생이별하는 전쟁고아가 될 번 했다.  

 
 
그 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형수는 끝내 독수 공방 외로은 삶을 살다 세상을 뜬 것이다.   이민 가서 살고 있는 두 아들이 있는 Los Angeles 에서 재작년에 한 많은 이 세상을 하직했다."
 

 

내가 은퇴하고 LA 에 자주 갔을 때  "데련님"에서 "서방님"으로 호칭이 바뀐 나에게 한국에서 이산가족 상봉이야기가 나올 때면 "서방님, 형님 소식 못 들으셨어요" 하곤 묻곤 했다.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가슴 아프다.

 

  출처: http://boris-satsol.tistory.com/1135 [지구별에서-MyLifeStory]

 

 

어머니의 비원의 대상인 K 누나는 나와 4살차이다.    오사카에서 태어난 6남매중에서도 같은 "세대"에 속한다.   위의 누님들이 어머니 같았다면 K누나는 내 진짜 동기같은 누나다.   손이 귀한 집에서 오시카에 와서도 또 딸을 낳았으니 어머니의 실망은 컸을 것이다.    그리고 막내로 내가 태어났으니 내가 얼마나 귀여움을 독차지 했을까는 상상이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얼마나 그 K누나에게 못되게 굴었을 까도 상상이 간다.  내가 국민학교에 들어 가 처음 여름방학을 맞았다. 한 달 방학동안을 팡팡 놀다 개학 하루전에 방학 숙제가 생각이 났던 것 같다.     난 울고불고 떼를 썼을 것이다.   내 한달 방학 숙제를 K누나가 대신 다 해 주었다.

 

그러니까 K 누나는 내 "밥"이었던 셈이다. K누나도 못된 동생이긴 해도 위의 4남매와는 달리 세대가 같은 나를 오사카에서 태어난 유일한 혈육 남매같은 의식이 있었을 지 모른다.  난 원남동의 셋째 누님집에 학교를 다녔고  K누나는 혜화동의 두째 누님집에서 가사를 도우며 살았다.  가끔 혜화동 두째 누님집에 가면 그 동안 생겼던 사탕 같은 것을 모았다가 날 주곤 했다.

 

625가 나자 인민군의 노력동원에 징발되어 나갔다 오곤 했다.   나가서 무슨 일을 하고 왔는지 알 수 없지만 서울대 부속병원이 가까이 었었으니 인민군 부상병을 치료하는 간호보조일 같은 걸 하지 않았나 추측할 뿐이다.     인민군의 패색이 짙어 가던 9월 어느날 노력동원이 끌려 나갔던 K누나는 끝내 집에 돌아 오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928 수복이 되고 세상은 또 한번 뒤집혔다.

 

"나중에 나는 이태씨가 쓴 다큐소설 "남부군"을 읽었습니다.  남쪽에 있던 인민군은 인천상륙으로 퇴로가 차단되어 지리산에 집결하여 남부군으로 재편합니다. 그리하여 몇 년간 빨치산으로 전쟁을 계속합니다.  우리에게는 "공비" 라 불리는 저주와 토벌이 대상이 되었던 빨치산이지요.   남과 북 모두에게 버림받아 끝내 소멸하고 만 남부군이었지요.  

거기에는 서울에서 간호 보조원으로 인민군을 따라 나선 한 처녀가 등장합니다.  열 아홉의 나이입니다.  K  누나가 인민군을 따라 나섰을 때 나이가 바로 열 아홉 살이었습니다.  이 처녀 역시 타의에 의하여 지리산 의 여자 빨치산이 되어 종래에는 피아골의 외로운 혼령으로 사라집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어쩌면 K 누나 였는지 모른다고요."



출처: http://boris-satsol.tistory.com/91 [지구별에서-MyLifeStory] 

 

은퇴후 어느 봄날 지리산 한화 호텔에 며칠 머믄 일이 있다.    그 때 그 아픈 이름의 피아골에 올라 가 본 일이 있다.

 

이데올로기란 이름으로 갈라져 싸운 그 전장의 골짜기, 그 날은 유난히 봄바람이 세차기 불었다.  몸을 가누기 힘든 세찬 바람이었다.

 

난 그 무서운 바람소리가 50여년전 피아골에서 스러져 간 젊은이들의 울부짖음 같이 들렸다.   

 

내 구원의 연인 아내도 자칫 비련의 주인공이 될 뻔 했었다.

 

1960년 말 미국 시애틀에서 아내를 만나 열애에 빠지고 마침내 결혼을 결정하고 서울의 양가에 알렸을 때 우리가 동성동본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결정적인 반대의 구실엔  더 심각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양가 모두에게 해당되고  우리들 자신에게도 미치는 심각한 결혼 장애 요인이었다.    우리는 동성 동본이었다.   우리는 모두 전주 이씨였다.  그러나 우리 모두 족보를 보면 나는 세종대왕의 23대 직계 후손이고 아내는 태조가 추존한 태조의 할아버지 때에서 갈라져 온 후손으로 27대에서 갈라진 동성동본이다.   

 

1960년 한국의 민법에는 동성동본 금혼이 규정되어 있었고 사회통념상으로도 결혼은 불가였다.   그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아내는 집안에서는 다른 이유를 더 대어 봐야 먹혀 들지 않으므로 동성동본을 들먹거리면서 한국에 오면 결혼신고도 할 수 없다고 위협을 하였다.

 

민법의 동성동본 금혼조항은  여성에게는 엄청난 불평등 조항이었다.  결혼은 하되 결혼신고가 되지 않으면 아내는 단순히 내연의 처가 될 뿐이다.   내가 맘을 달리 먹고 다른 여자와 다시 결혼한다 하여도 아무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다.  아이를 낳아도 내 호적에 입적시키면 "모"가 등재되지 않은 호적에선 자기 자식에 대한 친권을 주장할 아무 법적 근거가 없다.   삐뚤어진 문화와 몽매한 인습으로 한국에서 태어 난 여성들이 받는 갖가지 고통중의 하나였다.

 

이 조항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동성동본 결혼부부가 고통을 받았겠는가.  끝내 결혼을 반대하여 남자가 결혼을 무효화하는 순간 아내는 그냥 쫓겨 나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남자는 다른 여자와 버젓이 결혼해도 아내는 아무 주장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 한국의 민법 실정이었다.  

 

우리의 경우에 비추어 보면 우린 고려시대의 친척이었던 사람들의 후손인데도 한 왕조(조선조)가 서고 망한 20세기에서까지 결혼을 금하고 있는 민법이었던 셈이었다.  "

 



출처: http://boris-satsol.tistory.com/375 [지구별에서-MyLifeStory]

 

동성동본 금혼 조항을 개정하는 데 반 세기가 넘게 걸렸다.  

 

 

"그러나 상상해 보라 우리가 혜화동에서 만났다면 과연 우리는 백년 해로의 맺음에까지 이어졌겠는가.  그것은 비극의 인연으로 끝나 버렸을 것은 불 보듯 훤한 일이다.   설혹  어찌어찌 맺어졌다 하여도 우리들이 겪었을 고통과 시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맺어지기 보다도 못한 비극이었을 것이다."

출처: http://boris-satsol.tistory.com/375 [지구별에서-MyLifeStory]

 

 

이 글을 쓰면서 난 연신 눈물을 닦아 냈다.   특히 K누나를 회고하면 계속 눈물이 난다.  

 

왜 내 주변엔 슬픈 여인들 뿐인가?

 

아니 내 주변이 특별한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조선의 여인들이 아팠고 슬펐다.

 

"우리는 참으로 많은 왜곡된 인습에 의하여 상처 받고 고통을 당한다. 
우리나라의 여성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 어려서는 부모에 따르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따르고 늙어서는 자식 을 따르라고 가르친 옛 도덕율.
칠거지악이니 하여 여성의 자유를 억압하는 유교적 전통들에 의하여 우리 나라 여성은 한없이 구박 받고 속앓이 하였다. 
우리의 어머니 우리의 누나들이 또 아내와 딸들이 그런 대우 를 받은 것이다.  아직도 그 인습이 우리사회 구석구석에 남아 있다."

출처: http://boris-satsol.tistory.com/84 [지구별에서-MyLifeStory]  (인생, 만남, 부부)

 

오는 세상에서는 이 땅의 여성이 더 이상 아프고 슬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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