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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민국호>에서 살아 남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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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민국호>에서 살아 남기

샛솔 2014. 5. 1. 13:06

<대한 민국호>에서 살아 남기

 

세월호 이준석 선장과 비슷한 선장이 모는 배를 탄 일이 있다. 때는 1950년 초여름이었다.  나는 당시 중학교 3학년에 진급한지 몇 달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때도 살기 어려울 때라 신문배달도 하고 신문을 들고 다니며 팔기도 했었다.    

6월 25일 일요일이었다.  신문이 나오지 않아서 저녁에 배달이나 가두 판매에 나갈 일이 없었다.   

 

그런데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저녁 5시나 6시경 트럭이 거리를 다니며 확성기로 외친다.  "휴가나 외출 나온 장병은 빨리 귀대하십시오"    뭐 이와 비슷한 소리였다.    그제서야 그 날 아침(새벽)에 인민군이 남침을 했으나 국방군이 방어하여 퇴각시기키고 있다는 내용의 국방부 발표를 들었다.

 

오래된 일이라 기억은 확실치 않다.    단 한가지 국방군이 잘 반격하여 인민군은 퇴각중이니 시민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것이었다.

 

6월 26일 멀리 북쪽에서 포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국방군이 잘 막아 내고 있다는데 왠 포성일까?

 

나는 그때 종로구 원남동이 있는 한 적산가옥에 세들어 살고 있었다.       6월 27일 되니까 포성은 더 가까워지고 민심은 술렁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피난 갈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신문 방송은 국방군이 잘 막고 있으니 동요하지 말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방송만 했다.

 

27밤은 무시무시한 밤이었다.       을지로 4가에서 돈암동까지 전차가 지나는 중요 통로다.      처음 들어 보는 요란한 굉음을 들었다. 그 통로를 인민군의 소련제 T-38 탱크가 지나갔다.   

 

28일 아침 굉음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지만 뭔가 또 다른 손확성기로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중요통로의 골목길을 지나 다니며 외치는 여군의 목소리는 국방군이 아니었다.   인민군의 선무대 여전사였다.

 

서울은 해방이 되었으니 겁내지 말고 모두 나와서 새 세상을 마지하라는 독려였다.

 

인공치하의 서울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28일 그날 새벽 서울에서 남쪽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폭파되었다.   한강인도교가 폭파되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폭파는 아무 예고도 없이 폭파되었기 때문이 피난길에 올라 인도교를 건너던 피난민 800 여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던 <대한민국호> 선장은 승객이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를 폭파시키고 혼자 도망쳤다.   

 

우리는 928 수복까지 인공치하에서 살아야 했다.

 

928 이후에 서울에 돌아 온 선장은 독재정권을 이어 갔다.   그 과정에서 사사오입이라는 희대의 코미디를 연출하면서 국회에서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국민의 직접선거로 헌법을 바꿔 놨다.     

 

직접선거라는것은 부정선거였다.      결국 국민이 참다 참다 못해 419를 일으켜 이 못된 선장을 몰아 냈다.

 

못된 선장은 국민이 몰아 낼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여 준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인명피해도 났다.

   

휴전 이후 난 고학을 하며 대학을 졸업했다.  

 

419가 났을 땐 유학 귀휴조치를 받아 갈아 입을 사복도 없어 군복을 입은 채 어슬렁 대던 때였다.   

 

허정 임시 정부가 들어 서고 나는 외무장관 겸 임시 행정수반인 허정이 발행한 여권을 쥐고 1960년 8월22 일 태평양을 건넜다.

 

난 그 때 다시 대한민국에 발을 들여 넣지 않겠다고 굳은 결심을 했다. 

 

그리고 아내가 Univ. of Wash. 의 극동학과 한국학 책임사서로 취직이 되어 영주권도 받았다.  큰 아들도 거기에서 낳았다.    그리고 <대한민국호>를 갈아 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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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결심은 10년이 못가서 깨어 진다.     Pay'n Save 라는 한 할인 마트에서 made in Korea 라는 라벨이 붙은 싸구려 와이셔쓰를 보았다.  난 마트 뒤 주차장에 나와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떠나 올 때 서울은 전쟁의 상흔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 못살고 가난한 나라에서 미국에 싸구려일 망정 물건을 만들어 상품으로 내 놓았다는 것에 난 너무나 감동을 하였던 것이다.

 

우린 많은 고민 끝에 영주권을 포기하고 귀국하기로 결심한다.     1969년 한국은 아직도 후발국가이고 정치적으로도 419 이후 나아진 것이 없었다.   우리가 미국에서 사는 동안 박정희 정권이 들어 서고 박정희의 영구집권 계획이 입에 오르내릴 때였다.  왜 그런 나라에 다시 돌아 가려는가?    아내는 아내대로 다른 이유로 귀국을 반대였다.

 

그러나 우린 마침내 1970년 귀국했다.   다시 돌아 갈 가능성을 남겨 두느라 영주권을 남겨 두었으나 재입국패스는 1년간 그리고 1년 연장으로 2년 허용될 때였다.   난 영구귀국에 마음을 굳혔지만 아내는 고민이 많았다.

 

2년은 금방 지나갔다.  영주권은 소멸되었다.   다시 <대한민국호>에 올라 탄 것이다.

 

우려했던 대로 얼마 안 있어 박정희의 영구 집권계획이 성사되었다.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선포하고 자유선거를 폐지하였다.   이승만은 부정선거를 일삼았어도 선거자체를 없애지는 않았다.   박정희의 유신 헌법은 자유선거를 아예 없애 버렸다.

 

반한운동(반박정희운동)을 한다고 겁을 낸 유신정권은 온가족모두를 대동하는 교수의 외유를 금지했다.   유신말기에 난 가족과 떨어져 1년을 USC에서 Sabbatical을 보낸 일이 있다.   

 

여름에 아이들을 남겨놓고 아내가 LA를 방문했다.    그 때 시간을 내서 덴버에 사는 건축가인 아내의 처외사촌(아내의 외사촌) 내외를 방문한 일이 있다.  

 

건축가의 부인이 나를 힐란했다.   어떻게 교수가 반박정희운동을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짓밟은 독재자에 항거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시국선언이라도 동참하고 운동권 교수가 되어 대학에서 쫓겨 나야 하는 거 아니냐는 것이다.

 

그 때 내가 한 말은 아직도 생각이 난다.

 

우리가  운동을 안해도 박정희 유신정권은 오래 못간다.

 

난 시나리오를 두 개 제시했다.  박정희의 경제정책이 실패하는 순간 제2의 419가 날 것이다.

 

 

또 박정희의 경제정책이 성공하여 중산층이 많이 형성되면 지금(당시)과 같이 억압된 사회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이다.   머리가 길다고 파출소에 잡혀가서 머리 잘리고 미니스커트는 길이가가 짧다고 잡아다가 자로 재는 사회,    음반하나 사면 마지막곡은 "건전가요" 랍시고 새마을 노래 같은 것이 나오는 나라에 견딜 것 같냐고.   그리고 긴급조치9호란 아무때나 영장없이 사람을 잡아 가는 나라. 

 

증권가의 넥타이 부대가 나와서 데모를 할 것이다.

 

어느 시나리오던간에 박정희정권은 오래가지 못한다.

 

내가 시국선언을 하고 학교에서 쫓겨 나는 운동권 교수가 되지 않아도 결국 박정희정권은 끝났다.     

 

절대권력의 절대부패가 불러 온 총성이 유신정권을 마무리했다.   

 

사실 나는 겁도 났다.   조금 이상한 기미가 보이면 남산에 잡혀가는 교수를 여럿 보았다.       어느 모임에서 나와 똑 같은 <London Fog> 라는 트렌치코트를 입은 법대 C교수가 있었다.    그래서 옷거리에서 코트를 잘못 바꿔 입어 간 일이 있었다.   그도 남산에 잡혀 가서 투신하여 주검으로 돌아 왔다. 

 

또 K 변호사는 법정에서 긴급조치 9호로 잡혀 온 학생들을 변론하다  자신이 긴급조치 9호로 법정 구속되는 희한한 사태도 벌어졌다.      이런 것 조차 신문에 보도조차 되지 않았다.  신문은 독재정권의 검열을 받았다.

 

그 땐 정말 무서운 세상이었다.   

 

내 예상대로 유신 독재는 끝났다. 

 

그 이후 제대로 된 자유선거가 부활하기까지는 몇 년이 더 걸렸지만 난 아직도 운동권의 민주화운동이 민주화를 가져왔다고 보지 않는다.    독재는 결국 망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거기엔 자기 모순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난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쳤고 내가 할 연구를 했다.    학생들은 오늘날 반도체산업과 초 일류 전자제품을 만드는 과학자와 엔지니어로 자랐다.    그것이 경제발전의 밑걸음이 되었고 경제발전은 민주주의를 갈구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지켜 봤기 때문에 <대한민국호>는 침몰하지 않고 여기 타고 있어도 살아 남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금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풍랑도 거셀 것이다.

 

차떼기 하던 정당이 당사 옮기고 이름 바꾸고 권력을 잡으니 지금은 당장 시스템이 개조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 잘 못된 시스템  ***   그런 돈으로 선거를 치르고 권력을 잡고 그 댓가로 기업봐주기 여기저기 위법 눈감아 주기 그 바로 그 잘못된 시스템의 정상이 지금 권력의 최 정상이다.    누구에게 손가락질하며 호통치는가?

 

이런 잘못된 시스템이나 썩은 정권은 오래 가지 않는다.   난 두 눈으로 봐왔기 때문에 <대한민국호>를 계속 탄다.     

 

내가 오래 전에 썼던 단상 "오 대한민국"  ( 2005/11/16 - [일상, 단상/잡문] - 오 대한민국 )  은 아직도 유효하다.

 

 

 

 

 

이 헌법조항을 이해하는 대통령이 나올 때까지

난 기다린다.

난 반드시 나올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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