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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에서 - Things Old and New

저물어 가는 해, 내 삶의 여정의 끝자락에서 본문

일상, 단상/나의 가족, 가족사

저물어 가는 해, 내 삶의 여정의 끝자락에서

샛솔 2022. 12. 19. 17:45

오후 5시 12분인데 땅거미가 진다.     동지가 이틀 남았으니 일 년 중 낮이 가장 짧은 때가 된 것이다.   그리고 12월의 끝자락이니 해도 저물어 간다.      그리고 내 삶의 여정도 저물어 간다.

며칠 전 장조카 가족과 부모님의 묘소를 다녀와서는 뭔가 자꾸 우리의 끝 날을 생각하게 한다.     

삶이란 여정이 저물어 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여행의 끝자락도 아쉽고 서운한데 그래도 돌아가는 집이 있어 위안이 되지만 삶의 여정의 끝은 그냥 무의 세계다.   

깊은 잠 속으로 영원히 빠지는 것이다.  그래서 영면이라고 한다.

내가 어머니의 추모글을 쓰면서(비극의 유산 --- 조선 근대사를 몸으로 살다 간 우리 어머니 ) "조선 근대사를 몸으로 살다 간" 이란 부제를 붙였다.

그러고 보면 내 삶은 어떤가 어쩌면 "한국 현대사를 몸으로 살다 간"이란 부제가 붙을 것 같다.

일제 강점기에 그 영향으로 집안이 폭삭 망하여 일본으로 건너가야 했던 아버지 그리고 나중에 합류한 어머니 사이에서 막내로 일본에서 태어났다. 

그러니까 일제 강점기 한가운데에서 난 태어났고 곧 일어난 태평양 전쟁을 몸으로 겪었다. 

오사카 대공습을 피하여 초등학교에 들어 가 2학년에 진급하던 해 부모를 떠나 지금 의정부시가 된 "양주"의 첫 째 누님의 시가 사돈집에서 낯 선 고국생활을 시작했다.  

일본이 패망하고 귀국한 부모님을 만났지만 아버지는 알 수 없는 병으로 누우 신지 1주일 만에 세상을 뜨셨다. 난 아직도 10번째 생일을 맞기 전이었다. 

한 반도는 둘로 갈라졌고 좌우 대립이 심각하던 때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3학년에 진급하던 해 625 전쟁이 터졌고 우리 집은 또 한 번의 폭망을 맞는다.

6남매 중 둘이 행불이 된 것이다.   월북인지 납북인지 알 수 없는 행방불명이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아버지를 이어 명목상 가장이 된 형을 잃게 된 것이다.

50이 넘어 중노의 어머니는 당시로는 그래도 가장 잘 사는 두 째 누님 집에 얹혀사는 신세가 되셨다.  조선 갑반의 종부 출신인 어머니가 돈벌이에 나설 형편도 아니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대학 대신 사관학교(해군)에 가게 된 것이지만 그것은 아주 잘못 고른 선택이었다.   고등 군법회의를 기다리며 해병대 영창에 갇히는 신세까지로 전락했다. (하마터면 못 올 뻔했던 길을 걸어왔다. - 그 무서웠던 운명의 갈림길)

그래도 나는 용기를 내어 해사를 뛰쳐나왔고 내가 꿈꾸던 물리학의 길로 갈 수 있었다.

1961년 나는 태평양 일부 변경선을 건넜고 "꿈의 미국"에 갈 수 있었다.  

그리고 1년도 안 되어 아내를 만나 결혼까지 했고 내 운명은 펴지기 시작했다.    

아내와의 만남은 운명적이었고 내 생애에서 가장 행운이었다.   이제 그 끝이 다가오고 있다.   누가 먼저 죽던 우린 헤어져야 한다. 

귀국 후 우리의 생활은 평탄했지만 세상 그중에서도 대한민국은 어마어마한 발전과 변화가 있었다.

신문지로 밑을 씻던 때 귀국했던 나는 그야말로 광야에 던져진 그런 느낌이었다.   제1 세계에서 제3세계로 던져진 느낌이었다. 

그것은 마치 내가 1961년 미국에 갔을 때의 느낌 즉 가난한 고국에서 세계 최고의 사회에 들어갔던 문화충격의 정 반대였다.   

지금 서울대 오세정 총장이 1970년 까까머리에 검은 교복을 입고 면접실에 들어온 것을 봤다.  아직 교수로 발령을 받지 않았지만 물리학과 지망생의 얼굴을 보라고 날 그때 가장 어른이신 K교수의 연구실에서 그 학생을 봤다.    이미 예비고사 본고사에서 수석을 한 학생이라고 함께 면접한 다른 교수가 귀띔을 해 주었다.

그때 문리대 물리학과에는 나까지 6명의 교수가 다였지만 K교수는 1년인지 2년 만에 정년 퇴임하셨고 5명의 교수가 물리학과를 꾸렸다.

한 때에는 나 혼자 물리학과를 1년 꾸린 일도 있었다.  5 명중에서 2분이 보직으로 나가셨고 2 분은 외유 중이었다. 

그때 내가 몇 과목을 가르쳤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다. 

이런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을 겪으면서 시작한 물리학과는 이젠 대단한 물리학부로 성장했다.

그러니까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손꼽히는 국력을 자랑하게 자라는 과정을 내가 현장에서 본 것이다.   

수출 1억 불 달성이라고 대대적으로 축포를 터뜨리던 때가 내가 귀국해서 몇 해 지나지 않아서였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 혁명(?)으로 동숭동 문리대 정문에 탱크가 막아 선 것을 보았다.   

계엄령으로 학교가 문 닫아 모자랐던 수업을 보충한다고 구정날에도 나와 강의를 했던 일도 있었다.  

관악산으로 캠퍼스가 모두 모였던 해가 1975년이었던가?    거기서도 우리는 매캐한 최루탄을 맡으며 살았다.

전두환이 정권을 잡으면서 7년간 데모와 최루탄 냄새를 맡으면서 난 그래도 열심히 연구를 했다.  

그래서 당시로는 인용지수가 최고인 Phys. Rev. Lett. 에 단독 논문도 냈다.  

당시엔 물리학 학술지에서 임팩트 팩터(Impact Factor)가 가장 높은 Physical Review Letters 의 60(20) 분권의 첫 페이지 실렸다. 불모지에 귀국하여 어쩌면 한국에서는 최초의 PRL 논문이 아닌가 싶은 논문을 실을 수 있었던 것은 내게는 커다란 영광이고 자부심이었다. 당시에는 이론 물리 연구 센터도 생기기 이전이라 내 소속은 "서울대 물리학과"였다.

 

IMF도 겪었고 나도 금부치 모두를 내놓아 이젠 금부치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 

그리고 얼마 안돼 학교를 떠났다.

내 연구실 창가에 손에 잡힐 듯  서 있던 목련은 항상 이른 봄을 알렸고 정년이 가까워질 때 내가 얼마나 저 목련 꽃을 볼 수 있으려나 햇 수를 세던 때가 어제 같은데 목련을 못 보게 되는 날은 기어이 왔고   

얼마 후에 캠퍼스에 갔을 때에는 목련은 사라지고 소나무가 서 있었다.  그 건물도 몰라 보게 내 외장 공사를 다시 했고 물리학과는 새로 지은 건물로 이사를 갔다.   

수학과와 함께 쓰던 27동은 수학과 전용 건물로 변해 있었다.

옛 연구실 목련 나무 대신 소나무가 서 있었다.

서울대학교에 가다 - 2017-05-17

에서

은퇴 후 우리 부부는 더 밀착하게 되었다.    주로 자전거를 가지고 다니면서 세계 여행을 했고  인천 아라 뱃길에서 을숙도까지 국도 종주를 한 것이 아마도 잊지 못할 추억일 것이다. (국토종주 제3일 - 아라뱃길에서 대치동까지) (삼랑진에서 을숙도까지 - 낙동강 종주 2014-05-10)

 

마칙내 하구뚝 인증센터에 왔다.

 

어머니가 90년에서 몇 달을 뺀 수를 누리셨으니 나도 그만큼은 더 살 수 있으려나?     그것도 3년이 안된다.  

사람의 수(壽)는 타고났다니 얼마가 되건 여여하게 기다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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