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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에서 - Things Old and New
하마터면 못 올 뻔 했던 길을 걸어 왔다. - 그 무서웠던 운명의 갈림길 본문
하마터면 못 올 뻔했던 길을 걸어왔다. - 그 무서웠던 운명의 갈림길
625 전쟁은 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갈라놓은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나 역시 그중의 하나다.
전에 박완서님의 "못 가 본 길이 아름답다."라는 책에 대해서 썼을 때 내 운명에 대해서 몇 줄 언급한 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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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지난해 625의 60돌을 맞아 내 625 생존기를 내 블로그에 올린 일이 있다. 나도 625로 인해 가정이 와해되고 전쟁고아 같은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해사에 들어가 물리학을 하려고 했었다는 이야기를 썼었다.
내가 해사를 뛰쳐 나와 내 가고 싶던 길을 가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떤 길을 갔을까? 나도 역시 이 책의 저자처럼 못 가본 길에 대한 아쉬움을 간직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참으로 다행한 것은 난 가고 싶었던 길을 갔고 행복하고 후회 없이 살았다는 것이 저자와는 다른 점일 것이다.
출처: https://boris-satsol.tistory.com/640 [지구별에서 - Things Old and 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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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렇게 가볍게 몇줄로 적을 만 큼 내 운명의 갈림길에서 쉽게 선택한 길은 아니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난 그때 내가 겪었던 처절했던 내 "투쟁"에 대해 기록해 두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내 625 생존기 에도 간략히 언급했지만 태평양 전쟁으로 지리멸멸되었던 우리 가족은 625 전쟁으로 완전히 와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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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와중에서도 난 장래 물리학자가 되려는 꿈을 키우며 청계천변 헌 책방에서 산 일본어 수학이나 물리 책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물리학과 이 아무개라고 써넣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고3이 되자 내 장래를 내가 결정해야 할 상황에서 일반대학에 들어가 대학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자신감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해군사관학교에 가자는 것이었다. 그땐 3군 사관학교가 모두 4년제 정규 사관학교로 정착되어 졸업 후 이학사 아니면 공학사 학위까지 주도록 되어 있었다.
혼자 떠돌이로 살던 때라 공짜로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재워주고 거기에다 공부까지 시켜 주는 사관학교는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해군 사관학교를 선택하게 된 계기는 미국 해군사관학교(Annapolice) 출신의 노벨 물리학자 마이켈슨에 고무되었기 때문이었다.
출처: https://boris-satsol.tistory.com/561 [지구별에서 - Things Old and 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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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해군 사관학교를 그대로 흉내 내어 만들었다지만 한국 해사는 전혀 다르게 운영되고 있었다.
긴 고민 끝에 다시 내 새 운명을 개척할 것을 결심한다. 내가 해사를 뛰쳐나올 만한 용기가 있으면 사회에 나가 일반 대학에 진학하여 고학을 해서 물리학을 공부할 수 있을 것이란 자신이 생긴 것이다.
이 "용기와 자신감"에만 의존해 어마 어마한 일을 벌인 것이다.
사실 사관학교 교칙에는 자퇴를 할 수 있게 되어 있었지만 교칙은 교칙일 뿐 실제 자퇴를 받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과실점을 충분이 받아서 퇴교 처분을 받아 낼 생각을 한 것이다. 탈영은 퇴교에 해당하는 과실점을 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돌이켜 생각하면 미련한 짓이었다.
1954년 11월 어느날 아침 난 몰래 사관학교 뒷산으로 올라가 탈영을 했다. 음주 흡연도 거의 퇴교에 가까운 과실점을 매긴다. 난 저녁에 진해 시내에 들어가 막걸리를 사서 마시고 필 줄도 모르는 담배를 사서 몸에 지니고 교문을 통해 사관학교에 들어왔다.
그러나 내 계획은 교칙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교장이었던 이용운 준장의 교장실에 불려 가 회유를 받은 것이다. 내가 12기 수석으로 들어왔는데 내가 퇴교를 하면 동기생들이 동요가 있을 것 같다는 예상을 한 것이다.
그래서 교장은 내가 퇴교 의사를 철회한다면 탈영 기타 교칙 위반은 가벼운 과실점으로 처리하고 내가 졸업하면 유학을 보내 물리학을 공부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거의 두 달 고민을 하고 그 엄청난 모험을 감행한 것인데 이제 교장의 회유를 수용한다면 무슨 꼴인가. 더욱이 교장이 무슨 수로 내 졸업 후의 진로에 대해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그건 그냥 당장 내 퇴교를 막으려는 감언이설일 뿐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교장은 내가 자기의 회유를 거부하자 격분하고 휴전은 휴전일뿐 아직도 전시라는 것이다. 그리고 전시의 탈영을 최고 총살형까지 받을 수 있는 중죄라고 위협하고 사관생도는 준사관이니 고등 군법 회의에 회부하겠다고 해병대 영창에 수감시켜 버린 것이다.
1954년 11월 중순에 나는 해병대 영창에 수감되어 고등 군법회의를 기다리는 몸이 된 것이다.
그때 난 겨우 19번 째 생일 지난 지 며칠 안된 아직도 청소년일 때였다. 난 이 모든 사단을 어머니나 누님 가족에 알리지 않았고 나 홀로 맞섰다. 내 인생의 최대 위기를 내 홀로 맞아 싸웠다.
사람이 불안해지는 것은 미래가 가장 불확실할 때다. 영창에 갇힌 후 한 두 번 해군 법무관이 나를 방문했던 것 같다. 그 중 하나는 서울 법대를 나와 해사 교관으로 사회과학 관련 교양과목을 가르쳤던 분 같다.
내 변호인 격으로 방문한 법무관은 이 모든 과정은 교장의 독단으로 적법하지 않은 절차인데 사관학교 겨울 휴가를 보내고 나면 귀교하지 않는 생도가 생길 것을 우려해서 일종의 시범으로 군법회의를 연다는 것이다. 생도들의 휴가 전날 강당에서 전교생을 앉혀 놓고 열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날 군법회의가 열리면 어쩔 수 없이 휴가 가는 생도들에게 경고를 주기 위해서라도 중형을 내리게 될 것이란 예상이었다.
그것은 위로가 되지 않고 불안만 가중시켰다.
나는 기도 이외에 무슨 다른 할 일이 없었다. 그 때도 예비신자로 진해 성당에 다닐 때였다. 대림절에 부르는 성가를 입속으로 되뇌면 기도만 했다.
가톨릭 성가는 대부분 기도문이다.
“구세주 빨리 오사 어둠을 없이 하사.. , 성조에게 허락하신 메시아를 보내소서 어지러운 세상에 방황하는 우리들의 간구함을 들으사… , 우리를 괴롭히니 이 어려움 이기게 도와 주옵소서…
어두움을 없이 하사..
내게서 이 불안을 없애주소서
사관학교에 응시하고 나서는 합격시켜 달라고 기도를 했고 이젠 내 인생의 가장 캄캄한 암혹을 없애달라고 기도를 하는 아이로닉 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군법회의를 기다리던 진해 해병대 영창에서의 20여 일간은 내 생애에서 가장 캄캄했던 불안, 절망의 암혹기였다.
사람이 종교적이 되는 때는 바로 이런 암혹기다. 이성적으로 생각을 하고 해도 벗어 날 길이 보이지 않는 그 절박함이 절대자에게 구원을 빌게 되는 것이다.
그때 내 변호인 격인 법무관이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어떻게든 전교생 앞에서 군법회의를 여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탈영 직전 한 두 달간 거의 묵언으로 보냈다. 내 고민이 깊기도 했지만 내가 퇴교의 계획이 혹시라도 새어 나가지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대신 일기만 열심히 썼다. 이 사실이 득이 되기도 했고 해가 되기도 했다.
그는 내가 거의 두 달 묵언으로 지낸 사실을 지적해 내가 저지른 탈영은 정신상태가 온전하지 않아서 발생한 것일 수 있다고 주장해 정신 감정을 받게 하고 재판을 열 것을 주장했다. 배심관 대부분은 사관학교 교관(교수)들이었고 교장과 몇 골통 훈육관을 빼고는 이 군법회의는 적법한 절차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배심관들이 모두 동의하였기 때문에 난 전교생이 모인 강당에서의 재판을 모면할 수 있었다. 정신 감정을 받기 위해 난 영창에 재수감되는 대신 환자로서 위병 하나의 감시를 받으며 사관학교 의무실에서 입원환자 대우를 받으며 다음 군법회의를 기다렸다.
정신감정 결과는 정상으로 판정이 나왔고 생도들이 다 떠난 빈 강당에서 2차 재판이 속개되었다. 이 재판의 판결은 “근신 1개월”이었고 이어 “퇴교”라는 행정처분이 내려졌기 때문에 판결 결과는 무의미한 것으로 끝난 것이다. 나는 그렇게 갈망했던 퇴교처분을 받고 서울행 기차를 탔다.
1954년 겨울 내가 용기를 내지 않고 머뭇거렸다면 나는 결국 딴 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쯤 그 길의 종착점 근방을 서성이며 "그때 난 물리학자가 꿈이었는데.." 하고 못내 아쉬워하며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라는 블로그 포스팅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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