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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 한일 문제를 생각하며 본문
역사란 무엇인가 - 한일 문제를 생각하며
한 때 운동권이 후배학생의 소위 <의식화교육>의 첫단계로 E.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란 책을 읽게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도 궁금해서 조금 읽어봤는데 책은 매우 중립적인 한 역사학관(historiography)이었다. 역사, 사실(史實), 사학자의 편견, 과학, 도덕관, 개인과 사회, 역사의 도덕적 판단등을 논한 것이다. 종이책을 버리고 정리할 때 그 책도 사라졌기 때문에 다시 열어 볼 수 없지만 대강 그런 것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루비콘 강>을 건넜지만 시저가 <루비콘 강>을 건넌 것만을 역사적 사실로 선택하고 있다" 는 것이 바로 역사학자의 선택이란 것만 기억에 남는다.
Carr의 말대로 역사는 역사를 기술하는 사가의 이미 정해진 틀에 맞추어 사실이 선택되고 자기와 같은 역사관을 가진 사람들의 문헌을 포장해서 많은 사람들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자연과학과 달리 문헌연구(docmentary research)란 그런 의미에서 객관성이 없다.
MB의 독도 방문과 그 후유증에 대해 굼굼해 이것 저것 검색하다 우연히 한 일본인의 블로그를 보게 되었다.
제목은 <일본인이 본 한국인의 역사 인식의 문제점> 이었다.
대강을 훒어 보건데 역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역사학자같지는 않고 취미로 문헌 연구를 하는 아마춰 역사가 같았다. 아마춰라고 낮추어 보는 것이 아니라 historiography 에 기본 연구를 토대로 뭘 쓰는지 하는 의구심으로 하는 말이다.
한글로 쓴 것으로 미루어 한글을 아는 분 같은데 그 머릿말이 재미가 있다.
<이 페이지는 한 늙은 일본인과 젊은 한국인의 대화로부터 태어났다. 그 과정에서 일본인이 느낀 것은 기본적인 부분에서 역사인식의 차이가 크고 일본측 논리를 설명하기에 예상외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미리 일본측 논리를 제시해 두면 한국인들이 그에 대한 반론을 준비하는 것부터 출발할 수 있어 낮은 차원의 논의를 생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아래는 늙은 일본인이 모은 한국인을 논파하기 위한 논거와 자료를 정리한 것이다. 일본인을 논파하려고 하는 한국인은 여기서부터 출발하기를 바란다.>
자못 도전적인 말투다. 그런데 그 블로거가 주장하는 <한국인의 역사인식>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지 또 <일본인의 역사인식> 무엇을 말하는지 매우 건방진 발상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내가 설정한 한국인의 역사인식>과 <내가 설정한 일본인의 역사인식>라고 말해야 맞는 말이다. <한국인> <일본인>하는 말은 쉽게 쓸 수 있는 단어들이 아니다. 그런 포괄적 지칭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런데 난 그런 논쟁따위엔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내 역사관은 환원주의 역사관 (reductionism)이기 때문이다. 환원주의 역사관에서는 역사 논쟁은 부질없는 짓이다.
더 포괄적인 환원주의 세계관이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고 하나의 역사철학적 명제였는데 더 근대에 와서는 Vienna Cicrlce 이란 과학철학에서 크게 부각되었었다. 언젠가 내가 내 블로그에서 언급한 Reihenbach 같은 이는 Hegel 의 역사철학을 비판하기 위해 환원주의를 제시했지만 최근의 뇌과학의 발전 성과를 보면 더욱 더 그 시각에 대한 설득력이 강해진다.
구체적으로 언급은 안했지만 최근의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의 저서 <위대한 설계(Grand Design)>도 환원주의 세계관을 암시하고 있다. 세계의 변화는 결국 모두 물리와 화학의 법칙에 따라 일어나고 물리와 화학의 법칙은 인과율(causality) 을 따른다. 즉 역사는 우주의 대폭발(big bang)시 이미 정해진 것이라는 관점이다.
한 때 이런 기계론적 우주관을 생각한 사람들은(대표적으로는 Pierre Simon de Laplace ) 초기조건(intial condition)만 알면 역사를 예언할 수 있다는 극단적 주장도 했지만 고전 역학의 chaos 가 이해되고는 기계론적 세계관에는 한계가 있다고 전에 내 블로그에 ( http://boris-satsol.tistory.com/373) 쓴 일이 있다.
고전역학의 chaos는 무한 정밀도의 초기조건을 제시하지 않는하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한 정밀도란 인간의 인식한계를 넘어서기 때문에 단순한 기계론적 세계관은 그 한계에 부닥치게 된다.
거기에 더하여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 는 물리법칙 자체가 확률적 해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전 Chaos와 마찬가지로 결정론적이기 보다는 확률적이란 관점이 함축되어 있다. 그렇다고 causality 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확률과정 자체가 causality 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면 causality 라고 해서 미래가 예측된다는 것은 아니다. 환원주의란 세계의 변화는 궁극적으로는 물리와 화학의 법칙(laws of physics and chemistry) 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이지 미래가 예측가능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고전 chaos 가 말해 주듯 원리적으로는 무한 정밀도의 초기조건을 알면 뉴턴의 법칙에 따라 세상이 움직인다는 것이지 오히려 무한 정밀도란 인간의 인식한계를 넘어서기 때문에 이 관점은 미래는 근원적으로(intrinsically)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런데 이런 환원주의적 관점으로 보면 역사에 도덕적 판단을 내릴 근거가 없어지게 된다.
지난 815는 일본 홋카이도 여행중에 맞았다. 일본은 815를 종전이라 부른다. 우연혀 보게된 일본방송은 왜 일본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비극을 맞기전에 전쟁을 끝낼 수 없었던가를 여러 문헌과 그와 관련된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해설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그 당시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는 시점이 되었지만 <무조건항복>이란 말을 천황 앞 어전회의서 입밖에 낼 수 없었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실 조금만 일찍 일본이 항복했더라면 소련의 참전이 성사되지 않았고 한국의 남북 분단도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625전쟁도 없었을 것이고 그 결과로 분단 한국이 받았고 받고 있는 고통도 없었을 것이다.
어전회의에서 한줌의 일본 사람들이 좀더 일찍 항복선언을 제안하고 성사시켰다면 히로시마의 비극도 한국 분단의 고통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환원주의 역사관으로 보면 그 한줌의 일본사람들의 의식구조와 그들의 뇌에서 분비되는 호르몬과 그 호르몬의 지배를 받은 뉴론들은 역사를 그 반대방향으로 움직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 역사에 대한 도덕적 평가(moral judgement)를 할 수 없는 것이 환원주의 역사관이다. 이미 그렇게 역사는 움직에게 되어 있었고 그들의 자유의지에 의해 움직인 것이 아니라 우주의 빅뱅시 이미 정해진 코스였기 때문이다.
환원주의적 역사관은 우리의 모든 존재와 행태는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자연현상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없듯이 역사에 대해서 역사를 만들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도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도죠히데키도 히틀러도 그저 하나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환원주의 주장을 하면 내 견해와 반대하는 사람들은 난리를 칠 것이다. 그것도 하나의 현상이다. 대개 그 정도는 예측 가능하다.
그런데 내 역사관중의 하나의 믿음은 현상이던 인과율이던 역사는 진화한다는 것이다.
세계는 항상 공동선(共同善)의 방향으로 움직여 왔기 때문에 그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란 믿음이다. 도죠도 처벌을 받았고 히틀러도 매도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아마춰 사가도 그래도 한 일본 청년의 Free Hugs for Korea-Japan Peace
를 자기 같은 사람보다 이 청년의 용감한 행동이 한일 평화에 기여한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난 언젠가 내 글 passport 가 없는 세상을 꿈꾸며에서 말한것과 같이 한일간에도 시모노세키와 부산간에 해저 터닐이 뚫리고 자동차와 기차로 패스포트 없이 오갈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란 기대를 해 본다. 그것이 역사의 순방향 흐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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