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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단상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생각나는 Y 군의 이야기

샛솔 2014. 4. 20. 10:20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생각나는 Y 군의 이야기

 

 

내 물리학과 동기에 Y 군이 있었다.    괴팍하고 고지식한 친구였다.    

 

대학을 졸업후 원자력 연구소에 들어갔다.     핵공학과 라는 학과가 공대에 생기기전이라 물리나 화학과 졸업생이 원자력 연구소에 많이 들어 갔다.   

 

그를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본 것은 80년쯤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은퇴한 다음인가 2000년초에 LA에서 그를 만났다.   그 사이에 미국으로 이민을 와 버린 것이다.     

 

저녁을 먹으면서 오랜 시간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했는데 그가 이민을 온 이유중의 하나는 한국의 부조리와 비리에 염증이 나서 였다고 했다.

 

원자력 연구소에 다닐 때 한 번은 조선소에 파견 근무를 나갔다고 한다.     배를 만들려면 용접을 많이 해야 하는데 용접이 제대로 되었는지를 검사를 해야 한다고 한다.  그 당시 이 검사는 방사선 동위원소(radioactive isotope)를 써서 방사선으로 비파괴검사를 하는 것이 표준 procedure 였다고 한다.   

 

방사선 동위원소를 사용하니까 그 사용 저장 관리에 대한 감시를 해야 한다.     방사선  동위원소는 매우 위험한 물질이다.    그것으로 피폭되면 피폭된 자체가 방사선 물질로 바뀌게 되기 때문에 방사선이 새 나가지 않게 안전하게 보관해야 하고 그 취급방법도 매우 까다로운 규정에 맞게 해야만 한다.

 

이런 것이 제대로 이행 되고 있는지를 감독하기 위해 원자력 연구소에 조선소에 파견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용접 부위에 대한 방사선 비파괴검사를 하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하지도 않고 서류상으로만 검사를 했다고 작성한다는 것이었다.  

 

고지식한 Y 군은 연구소에 보고하고 조선소 관리자에게도 제언했지만 그건 관례적으로 묵인 되어 왔다는 것이었다.  환멸을 느낀 그는 얼마후 원자력 연구소를 그만 두고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고 했다.  

 

80년대 이야기이니 지금은 어떤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보아온 크고 작은 일들로 미루어 보면 이런 관행이 여전히 행해지고 있지 않나 의혹이 든다.

 

80년대 아마도 조선소 업주는 그랬을 지 모른다.   "그 걸 눈감아 주지 않으면 우리 단가 못 맞춥니다.   우리가 그 값으로 수주한 건 그것 다 안하기로 해서 한 것 아닙니까?     배 하나 수주 하면 일자리가 얼마가 생기는데... 그만 뒤도 되겠습니까?·"

 

세월호도 마찬가지일것이다.   그 정도로 배를 틀었다고 배가 침몰한다 한다면 배 자체가 불안정했다는 이야기다.  승선 인원을 늘리고 짐을 더 싣기 위해 배를 개조했을 때 배의 복원력이 떨어 진게 아닐까.  

 

이 나라는 이런 배를 운항하게 눈감아 주고 선원 훈련도 시키지 않는 것까지도 눈감아 주지 않았을까?

 

"그것 다 하 다간 그 운임가지고 제주도 못 다닙니다.    운임 올려도 되겠습니까?"    하지 안 했을까?

 

비용을 줄이는 가장 쉬운 방법은 안전을 희생하는 것이다.   어치피 안전은 확률적인 문제니까.

 

한국 경영학 교과서에서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는 건 아닐까?

 

 

 

 

용접부위의 기포

내부의 기포는 비파괴 검사로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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