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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에서 - Things Old and New

나도 "무인도의 디바" 본문

일상, 단상

나도 "무인도의 디바"

샛솔 2023. 12. 10. 12:50

나도 "무인도의 다바"

나이 90을 바라보는 세월을 살면서 세상의 급변을 모두 겪었다.

내가 어머니의 추모글을 쓰면서 " 조선 근대사를 몸으로 살다 간 우리 어머니 "란 부제를 붙였다. 

누군가가 내게 내 삶을 요약하라 하면 아마도 그 부제는 "두 번의 전쟁을 몸소 겪고 선진국이 된 세상을 보고 간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다. 

일본의 군국주의자가 일으킨 전쟁으로 전쟁고아로 전락한 나는 부모와 헤어져 제일 큰 누님의 사돈댁에서 2년 가까이 살아야 했다. 

각반을 둘둘만 군복차림의  일본 교장이 명치천황이 내린 교육칙서 "징 오모으니 코소코소 ...."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요슈코쿠민각코(양주국민학교)에서 해방을 맞았다.   내가 10번째 생일을 맞기 몇 달 전에 해방을 맞았다.

전쟁 말기의 일본의 군벌들이 한국의 자원을 싹쓸이 해가 한 반도는 먹고사는 것이 어려웠다. 해방 이듬해  일본에서 귀국한 아버지는 원인 모르는 병으로 누우신지 1주일 만에 아무 진료나 치료도 못 받고 세상을 뜨셨다.   1946년 3월 1일이었다.  아직 쉰도 되지 않은 지금 같으면 젊은 나이에 타계하셨다.

영조 때 좌의정에 오른 익헌공(이창의)을 낸 조선 갑반 정효공(이언강) 종가의 종손인 아버지(이석효)의 최후였다. 

말하자면 조선의 멸망과 우리 가문예 멸망은 궤를 같이 한다. 

625 때 행불(아마도 월북 아니면 납북)이 된 형까지 잃은 나는 두 째 누님댁 얹혀사는 노모 이외에는 아무도 보호해 줄 사람이 없는 전쟁고아나 마찬가지 신세가 된 것이다.   

그래서 잘 못한 선택을 한 결과 대학만 1년 늦게 들어가는 결과만 가져왔다.  (하마터면 못 올 뻔했던 길을 걸어왔다. - 그 무서웠던 운명의 갈림길)

나도 두 째 누님집에서 가정교사를 하면서 학비조달과 유학준비를 했고 열심히 한 덕에 나도 모르는 사이 일타강사가 되어 있었다.

군복무 1년 뒤 유학귀휴를 받고 유학자격시험에 합격하여 그 지긋지긋하게 가난한 나라를 벗어날 수 있었다.

미국 유학 중 아내를 만났고 우리는 첫 데이트 이후 석 달도 안 돼 결혼해 버렸다. 

우리의 만남은 운명이었다는 이야기를 썼다.  (운명의 인연)

 

신혼초의 우리 부부

 

내가 그토록 지겹게 생각하던 고국에 다시 귀국한 계기는 내가 한국의 첫 수출품을 보고 울고 난 다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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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한국에서 수출한 50센트 와이셔츠를 보고 울었던 Payn'Save 가게터 주차장

 

 

University Way와 47th 쯤에

Pay'nSave라는 저가품을 취급하는 대형 잡화점이 있었다.

뒤쪽 주차장은 Brooklyn Ave. 다.

1997년에 왔을 때 여전히 싸구려 잡화점이었는데 지금은 비어 있는 듯

임대 팻말이 붙어 있었다.

내가 여기를 굳이 찾아온 이유는

1968년인가 69년에 50 cent 짜리 Made in Korea 싸구려 와이셔츠를 처음 보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눈물이 너무 나서 이 주차장으로 숨어 나와 펑펑 울었었다.

1953 년 휴전이 되었지만

떠나 오던 1960년도

한국은 <가난> 그 자체였다.

뭘 만들어 선진국에 팔 수 있다는 생각은 꿈도 못 꾸었던 때였다.

그런데 미국 상점에서 비록 싸구려지만 한국제 상품을 처음 본 것이다.

 

 

출처: https://boris-satsol.tistory.com/594 [지구별에서 - Things Old and New: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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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운이 좋게 내 스승이자 멘토인 서강대로 옮겨 가신 조순탁교수의 빈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당시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물리학과는 이름만 한국의 최고학부이고 전국의 수재가 모이는 곳이긴 해도 속 빈 강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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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1970은 내 생애의 가장 기억에 남는 전환점이 되었다.

 

부임했을 당시 동아일보와 인터뷰 기사

어머니가 오려 두셨던 것 같다.  어머니의 유품에서 발견했던 1970년 기사다. 

출처: https://boris-satsol.tistory.com/1096 [지구별에서 - Things Old and New: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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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당시의 문리대 물리학과의 사정은 내가 떠날 때나 별로 바뀌지 않았다.  다만 이학부 과학관이 새로 지어져 내가 다니던 옛날 법대옆의 목조 건물만 바뀌었던 것 같다. 

교수수도 5명으로 한 때는 보직과 외유등으로 모두 떠나 1년간은 내가 혼자 물리학과를 지켰었다.  

당시에 나는 학부부터 대학원까지 4 과목인지 5과목을 가르친 일도 있다.

그러니까 60년에 한국을 떠나 박사과정과 박사후과정(Post Doc)을 거쳐  거의 10년을 외유하고 70년에 서울대 문리대 물리학과에 교수로 돌아온 것이다.

내가 돌아오고 몇 년 후에 수출 1억 불 달성 경축행사가 있었다.  그때부터 "한강의 기적"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경부 고속도로가 천안까지 뚫린 것도 아마도 4,5년 후였을 것이다.

그래도 서울대에 부임한 지 5년쯤 뒤에 기아에서 출시한 경차(배기량 1000cc 이하) 브리사를 사서 몰았다.

당시에는 자기차를 자기가 직접 운전하는 경우가 없어서 차 주인이 차를 직접 운전하는 이를 "오너드라이버"라고 불렀다. 

아마도 나와 아내가 몇 안 되는 초기 오너드라이버였을 것이다.  

아내가 주로 차를 정비하러 성수동의 자동차 정비소에 가곤 했는데 정비소 직원(브리사 회사직영)은 여성 오너드라이버는 흔하지 않아 브리사 광고가 된다고 많이 운전하고 다니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그 차로 여름이면 강원도 근덕 해수욕장에 아이들을 태우고 휴가를 가곤 했다. 

당시 우리가 몰던 기아차의 차색이 이와 비슷했다.

 

서울대학교가 관악산에 옮겨 가서 이 차를 몰고 가기도 했는데 그때 정문에서 교통순경이 세워서 웬일인가 했는데 관악구청까지 태워 달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내가 교수인 걸 알고 미안해서 쩔쩔 매고 사과했다.  서울대학교 교수를 세워서 동승을 요구했으니 여간 미안하지 않았을 것이다. 

월급은 쥐꼬리만 해도 서울대학교 교수의 사회적 위상은 지금과 같진 않았다. 

서울대학교가 관악산으로 통합되면서 물리학과도 공대의 응용물리학과와 합쳐져 식구가 10여 명이 넘는 숫자가 되었다.  성백능, 박봉열, 송희성, 장회익교수등이 그때 합세했다.

물리학과가 그래도 큰 대학의 틀로 잡힌 것이 1970년 말이다.  당시 미국의 개발 도상국 원조기구인 AID 가 해체 직전 서울대 자연과학대에 대대적인 투자를 했다.   교수들이 모두 한 번 미국대학에 가서 연수할 기회를 주었고 또 그런 덕에 여러 명의 신임 교수를 영입할 수 있었다. 

그 덕에 나도 성장할 수 있었다.   

처음 부임했을 때 내 심정을 쓴 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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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지로 밑을 씻던 때 귀국했던 나는 그야말로 광야에 던져진 그런 느낌이었다.   제1 세계에서 10년 가까이 살다 제3 세계로 던져졌으니 그 느낌이 어뗐을까 생각해 보면 안다.  

그것은 마치 내가 1960년 미국에 갔을 때의 느낌, 즉 가난한 고국에서 세계 최고 부자 나라에 들어갔었을때의 문화충격의 정 반대였다.   

출처: https://boris-satsol.tistory.com/2127 [지구별에서 - Things Old and New: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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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마치 무인도에 홀로 남겨진 그런 느낌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 변두리 제국대학 학부만 졸업한 교수 두 분을 포함  5 명이 전부였던 물리학과에 합류했다.   한 때는 보직 또는 외유로 모두 나가 나 혼자 물리학과를 지켰을 정도로 황폐했던 물리학과가 이젠 세계에서 인정하는 물리학과로 발전하였다. 

나도 그 덕에 함께 발전하였다.   ResearchGgate라는 사이트에 보면 3 개의 PRL 단독 논문을 포함 27개의 영문 논문을 발표한 것으로 나온다.  

"무인도의 디바"처럼 한 때 나 혼자 있던 무인도 서울대 물리학과에서 살아남아 그 정도의 성과를 냈으면 디바급이라 자랑해도 크게 욕먹지 않을 것이다.  

1988년에 발표한 내 단독논문

 

1992년에 발표한 PRL 단독논문

 

1994년 내 PRL 단독 논문

 

저물어가는 2023년 해를 보내는 감회를 적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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